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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의 비늘을 벗자 (행 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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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비늘을 벗자 (행 9:10~18)


그리스 신화에 보면 오이디푸스가 나옵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그의 왕비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삼아 테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뒤늦게,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 왕이 자기 아버지요 아내로 삼은 여인은 자기 어머니임을 알게 됩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친부모도 알아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부모도 알아볼 수 없는 눈이라면 더 이상 지니고 있을 까닭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립니다. 

두 눈을 뽑고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의식을 되찾게 되었을 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는 ‘오, 빛이여!’ 였습니다. 더 이상이 눈이 없어 빛을 볼 수 없는데 빛을 찬양하니 신하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오이디푸스에게 조심스럽게 ‘왕이여 두 눈을 뽑아 태양의 빛을 볼 수 없는데 무슨 빛이 보인다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오이디푸스는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라고 말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세상의 눈을 버림으로써 인생의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났고 높은 학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또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들고 예루살렘에서 200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하늘에서부터 강한 빛이 비췄습니다. 사울은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메섹에 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 만큼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과 봉사로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을 했는데 도리어 그 하나님을 강하게 거역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할 더 이상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먹어야 할 이유도, 마셔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위해 다메섹에 사울을 도울 사람을 이미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제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사울에게로 보내십니다. 17-19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대로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자 그의 눈이 다시 열렸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 이 벗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 사울은 눈에 비늘 같은 것을 뒤집어 쓰고 살아온 것입니다. 사울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눈에 비늘을 뒤집어 쓴 사울이 어떻게 바르게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비늘에 의해 모든 것이 왜곡되었습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검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을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눈에 덮혀 있는 비늘 즉 자신의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봤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자신의 이념,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자신의 기준이 하나님의 정신과 뜻을 왜곡시키고 결국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눈이 미움과 분노의 비늘로 덮혀 들판에서 동생 아벨을 죽일 때 그 현장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던 다윗의 눈이 음란의 비늘로 덮혀 있을 때 밧세바와 동침하는 그 현장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눈이 재물의 비늘로 덮혀 있을 때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후에 사울에게서 변화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후에 자신의 실상을 똑바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비늘이 벗겨지기까지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인 ‘사울’의 어원은 ‘희망’ ‘큰자’ 라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울은 자신과 같은 베냐민 지파로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처럼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눈에서 비늘을 벗은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가 바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의 어원은 ‘작다’ ‘단념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큰 자라 여기며 민족의 희망이 되리라고 자만하던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임을 자각하고 교만하던 옛 삶을 단념한 것입니다. 눈에서 비늘을 벗음으로 자신과 자기 삶의 자리를 바로 찾은 것입니다. 

사울은 눈에서 비늘을 벗기 전에는 자신을 그렇게 자랑하며 뽐내며 안하무인격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눈에서 비늘을 벗은 후에는 전과는 전혀 다른 겸손한 모습이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사울이 눈에서 비늘을 벗은 후에 성경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8절을 찾아봅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 말하며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자신을 말합니다. 자신은 온전하지 못한 모자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3장 8절을 찾아봅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사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1장 15절을 찾아봅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 즉 예수님 안에서 눈의 비늘을 제대로 벗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기보다 자신을 낮추며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 장님이 캄캄한 밤에 등잔불을 들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장님에게는 등잔이 필요 없었지만 혹시 지나가던 행인이 지나가다 부딪칠까봐 미리 대책을 세운 것입니다. 장님은 한참 가다가 그만 지나가던 행인과 정면 충돌을 해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장님은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눈을 뜨고 무얼 보고 다니는거요? 이 등잔불이 당신 눈에는 안 보이시오?’ 그랬더니 그 행인은 ‘선생님, 당신의 등잔불은 이미 바람에 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장님은 불 꺼진 등잔을 켜진 것으로 착각하고 들고 다닌 자신의 실수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을 잘 살피지 않으면 종종 이런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가장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더욱이 나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엉터리 신앙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혹시 우리의 눈에 아직 벗어져야 할 나만의 비늘이 있다면 성령님 안에서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바르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후에 사울에게 변화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재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서학자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사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제사장들이 약 8천 명 정도가 있었고, 성전에서 활동하던 레위인들을 포함하면 1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의 생활풍속’의 저자인 R. 드보는 당시 예루살렘 주민의 수가 3만 명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그 숫자가 대략 맞다면 예루살렘 사람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성직자였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부패할 때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청하신 것을 보아서도 성전이 얼마나 부패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잇속을 위한 장터로 전락되었습니다. 종파 간에는 기득권을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권과 기득권을 공격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일거에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개인이든 집단이든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릴 정도로 무섭고 거대한 이해집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당시 제사장들과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왜곡시켜 가르친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하나님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 그리고 종교적인 권력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아니라 기득권자들이 왜곡시켜 놓은 신념에 충성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멕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식음을 전폐하는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2장 1-2절을 찾아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울은 다메섹 도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눈에서 비늘을 벗은 후에 자신의 신념과 경험, 그리고 이해관계 등으로 인해 왜곡되고 변질된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신앙의 자리에 섰다고 선언합니다. 

성지 순례를 가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올라가면서 시내 산에 오르게 됩니다. 날씨가 무척 덥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 산에 오릅니다. 시내산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 대략 새벽 1시 정도에 올라갑니다. 마지막 코스는 급경사입니다. 약 3시간이 넘는 산행을 통해서 정상에 오릅니다. 시내산 정상에 오르면 그 곳에는 아주 작은 규모의 예배당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입구 문고리에 묶인 쇠사슬은 새빨갛게 녹이 슬어 있습니다. 

유리창도 이곳 저곳이 깨져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굳게 닫혀 있고 모세가 40일간 금식 기도하며 십계명을 받았던 그 거룩한 영성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영성을 묵상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듯합니다. 반면에 예배당 조금 아래쪽엔 한국 라면을 포함하여 온갖 기념품과 일회용 커피를 파는 아랍 상인의 가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내산 정상에 세워진 교회는 폐쇄된 채 방치되어 있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아랍인들의 가게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한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이 시내산 정상에 유리창이 깨지고 문은 붉게 녹슨 쇠사슬로 굳게 닫혀 있는 예배당과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고 웃고 떠드는 아랍 상가의 모습은 아닌지 점검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비늘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비늘이 벗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욕심과 정욕의 비늘, 게으름과 나태함의 비늘, 교만과 자만심의 비늘, 열등감과 패배감의 비늘, 불신앙과 무관심의 비늘이 벗겨지기를 원합니다.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광을 보고 온전한 주님의 일꾼으로 변환된 것처럼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영적인 신선한 변화가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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