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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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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시 23:1~6)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 최고의 애송시
교우 여러분께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몇 주 동안 교회 공동체를 떠나고 보니, 교우 여러분들 모두가 제 삶에 있어 매우 소중한 분들임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행여라도 누가 어려운 일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몸은 유럽에 있었어도 마음은 늘 이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제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며칠 동안의 체류로 유럽 사회를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보다는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너무 거칠어졌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울리히 벡이라는 독일의 사회학자는 현대세계를 불안과 위험과 재난과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위험사회’라고 규정했습니다. 삶의 편의를 위한 도구들은 발전하고 있지만,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이해는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인들은 무한경쟁의 살벌한 전쟁터로 사람들을 몰아댑니다. 약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정부는 오히려 공공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쪽으로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과 말투는 우리 사회가 지금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는 세상, 우리는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세상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시편 23편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시는 성서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좋아하는 시입니다. 이 시가 사랑받는 이유는 구조적 단순함과 표현의 적확성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하지 않아 기억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이렇게도 심오한 확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목자’라는 은유로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던 어린 양을 찾아 목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의 이미지에서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목자로서의 하나님, 이 은유는 이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목자로서 고백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님을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창49:24)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목자의 이미지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보호와 인도입니다. 거친 짐승들로부터 지켜주고,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목자들의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유대인들에게 집합적 고백의 대상이었던 목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나의’라는 1인칭 소유격 명사를 덧붙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을 가리켜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 대신 믿어줄 수도 없고, 나 대신 결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두렵고 떨림 가운데서 선택해야 할 나의 몫입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체험은 늘 공동체의 자산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체험이 개인 속에 머물 때 그것은 감상이 되기 쉽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 때면 공동체의 자산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 목자’라는 고백도 필요하지만 그런 고백의 바탕은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실존적 확신이어야 합니다. 

• 부족함 없어라 
시인이 주님을 가리켜 ‘나의 목자’라고 칭하는 까닭은 언제나 부족함 없이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내밀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부족함 없어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결핍의 감정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돈은 언제나 부족하고, 건강도 여의치 않고, 시간도 넉넉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은 적어도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삶의 순간순간 우리는 결핍을 체험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고백은 괜한 수사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도움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손 내미심인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요단강 동쪽 광야에서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고, 이 넓은 광야를 지나는 길에서, 당신들을 보살펴 주셨으며, 지난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계셨으므로, 당신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신2:7)

왜 부족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광야에서의 삶이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이었습니까? 그런데도 모세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욕망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늘 결핍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정말 부족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고, 정을 나눌 사람들이 있고, 가야 할 생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비록 넉넉지는 않다 해도 불퉁거리며 살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에 2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시인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또한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살아갈 방편을 얻는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생존의 문제에 짓눌려 사람다운 삶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이 사실 하나를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일어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속에 불어넣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도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내가 고쳤다’고 말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보이진 않아도 주님은 지팡이를 들고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막대기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호세아는 어긋난 길로 가려는 그의 백성을 가시나무로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막으시는 주님의 사랑(호2:6)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 임마누엘
이 시의 핵심어를 하나 말한다면 무엇이 될까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가 아닐까요? 뮌헨에 있는 Frauenkirche(성모교회)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나는 얼핏 게시판에서 알 듯한 얼굴을 본 것 같아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그 얼굴은 18세기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습니다. 그는 현대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인데, 게시판에는 그가 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참 훌륭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서 시편 23편에 나오는 네 단어보다 내 마음을 더 고요하고 기쁘게 해준 말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DU BIST BEI MIR)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한 마디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가슴을 고요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의 의미를 되새김하다가 문득 그의 이름 ‘임마누엘’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일컫는 말임을 자각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그의 운명이었던 것일까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한 마디야말로 그의 인생의 말이었던 셈입니다.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도 난감한 현실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일도 일어납니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시인은 바로 그 순간에도 자기 곁에 계시면서 그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주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있는 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자녀를 둔 부모들을 몇 분 압니다. 그들은 그 낯선 현실 앞에서 한 동안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통해 자기 삶이 오히려 치유되고 온전해졌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불행을 예비하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도 그들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 생을 경축할 수 있는 능력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확신은 시인으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되도록 해줍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움 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걷는 이에게 주님은 마치 보란 듯이 잔칫상을 차려 주시며, 그 머리에 기름을 흠뻑 부으시어,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신다는 확신처럼 큰 생의 동력은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주님께서 이미 차려놓으신 잔칫상이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누리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잔칫상을 앞에 두고도 다른 곳에 마음이 팔려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삶이 기적이고 은총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울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보다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귀한 존재로 여겨준다는 사실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은 없습니다.

이번의 유럽 여정을 통해 나는 정말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나를 지극한 정성으로 환대해 주었던 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뒤셀도르프에서, 두이스부르크에서, 베를린에서, 뮌헨에서, 파리에서 나를 맞아주었던 이들은 모두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지극한 환대를 경험케 하고는 나를 환대의 삶으로 부르시기 위해 계획하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분들이 보여준 개방성과 존경, 부드러움과 정성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팝의 황제라 불리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노래를 들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만 그가 만드는 무대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 가끔 외신을 통해 그의 얼굴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보며 안타깝게 여기곤 했습니다. 흑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계속되는 성형으로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변했던 것이지요.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지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자는 그를 가리켜 ‘인종적 패러독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코카서스 사람처럼 변해가더니 급기야는 그의 얼굴이 그의 가면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슈퍼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된 흑인으로서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은 ‘너는 추하다’는 말이 어쩌면 그의 일생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불행했습니다. 자기를 마음으로 인정할 수도, 자기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귀한 손님으로 여겨주시는 주님을 마음 깊이 경험한 사람은 자기 생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을 경축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두려워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 사실 하나 깨닫지 못해 우리는 지옥의 주민으로 살아갑니다. 이 사랑받은 사람은 이제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삶의 희망조차 빼앗겨, 겨울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는 봄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프랑스 시인 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의 시 <진정한 장소>를 들어보십시오. 

가까이 다가오는 이에게 자리를 내줄 것 
그는 춥고 집이 없는 자이기에. 
외딴집의 불 켜진 문지방에 
호롱불 타는 소리에 이끌린 자이기에. 
불안과 피로에 그가 지쳐 있다면 
그를 위해 회복의 말을 다시 해주기를. 
단지 침묵하던 이 마음에 무엇이 필요하리. 
성호와 기도의 말이 아니라면 
밤중에 느닷없이 만난 작은 불빛 같은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집의 조촐한 식탁을 넘겨보기가 아니라면.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만난 작은 불빛은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기적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또 주님이 보내신 이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네 단어가 칸트에게 그러했듯이, 위험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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