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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요 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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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요 8:2~11)


오늘 본문의 난하주를 보면 7장 53절부터 8장 11절까지 괄호로 묶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본에서는 이 부분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한글 개역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영어 번역이나 헬라어 성경, 혹은 오래되고 믿을 만한 다른 사본들에도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 헬라어로 분석한 결과 이 부분이 다른 요한복음과는 어휘나 문체가 상이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오히려 어떤 사본에서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에 삽입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누가복음 뒤에 혹은 요한복음 뒤에 부록처럼 끼워두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떠돌이 에피소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출처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에피소드를 요한복음에서 혹은 성경에서 과감히 덜어낸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건의 배경부터 살펴봅시다.

1. 모세는 율법에...

예수님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나오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7장 마지막을 보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으나 실패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넣을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몇 날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이 아침에 이런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의심이 가던 사람이 있더라도 이런 사건의 현장을 덮치기란 얼마나 힘듭니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을 잡기가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로 쳐죽일 정도의 사건에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또한 분명 둘이었을텐데 상대방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조작극 같은 의심이 갑니다.

여하튼 이들은 예수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처럼 왔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온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자를 처형하면 사적인 형 집행을 금하는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됩니다.  반대로 로마의 법을 따른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예수님의 대중적 지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 잡아 언제든 예수님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면에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쿵, 저러쿵…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지는 않지만 여기서 잠시 생각해봅시다.  우리도 성경 말씀을 궁금해 하거나 그것을 인용하면서 남에게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떤 상황인지 되돌아보십시오.  자신의 행동을 나름대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혹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지요?  

요즘 우리가 욥기를 읽고 있는데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면서 구구절절 얼마나 맞는 말들을 합니까?  말씀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다른 지체들을 상담할 때 잘 범하는 실수가 이런 것 아닙니까?  말씀에서 이 구절, 저 구절 가져다가 위로한답시고 말하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아픕니다.  차라리 안 들었으면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누군가에게 권면하실 때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듣는 상대방에게는 역효과가 나기 쉽습니다.  신앙의 연령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십니까?  아니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그대로 실천하기가 힘이 드니까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질문을 던지지는 않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라고 말하듯이, ‘성경에...’ 혹은 ‘아는 목사님이...’ 라고 말하면서 권위를 끌어들일 때는 자신이 그렇게 살기 위하여 노력하려고 할 때보다는 비껴나가기 위해서, 남을 정죄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셨습니까?  

성경을 인용하거나 질문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남을 정죄하기 위한 수단으로, 애매한 상황을 비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아니면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정말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우리는 말씀을 몰라서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경우 보다는 알고 있는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모세의 율법이나, 로마의 현행법이나, 간음을 하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몰라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님이 껄끄러워서 빛이신 주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 환하게 드러나니까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 진리를, 그 빛을 없애버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손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이라는 무기를 들고 오는 것이죠.

또 다른 일면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그 경계선상에서 줄타기하는 것을 즐깁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은 상황들을 가정하면서 만약에 이러면 이것은 죄인가 아닌가 묻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가 그 경계선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어떨까, 아니면 조금 더 가면 어떨까, 요즘 말로 치자면 간을 보는 거죠.  처음 시작할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또 다시 그 자리에 가게 되고 이번에는 조금 더 한 걸음 내딛습니다.  지난 번 보다 더한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이번에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점점 습관적으로, 너무나 쉽게 그 길을 갑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죄가 아니다, 혹은 어쩔 수 없다, 남들도 다 그런다는 식으로 자신을 위로합니다.  

우리가 요즈음 읽고 있는 욥기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욥기 20장 12~14절입니다.  이것은 마치 맛있는 사탕을 한꺼번에 깨물지 않고 혀 밑에 넣어서 조금씩 녹여 먹는 것 같다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우리들은 이렇게 악을 즐깁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런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  혀 밑에 넣어 둔 사탕을 녹여 먹듯이 상황을 즐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자리로 몰아 넣는 것이나 그러기 위해서 한 여인을 간음현장에서부터 끌고 오기 위한 계략들도 그들에게는 전혀 죄책감을 주지 않습니다.  이미 이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죄가 주는 달콤함을 즐기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은근히 간음하다 잡혀 온 이 여인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기도 하는데, 이 여인도 분명 혀 밑에서 사탕을 녹여 먹다가 그것이 독으로 변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여인은 유부녀인 것으로 보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먹이감이 될 정도로 꼬리가 길어서 밟힌 경우일 가능성도 보이구요.  오늘 어쩌다가 운이 없어서 이 자리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밤에는 이 여인이 그들의 덫에 걸린 것이겠죠.  

간음하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를 몰랐을까요?  그리고 이 짧은 말에 어떠한 주해나 다른 이의 교육이 필요했습니까?  또 반대로 결혼 후 갑자기 작정하고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살다 보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이 자리까지 왔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잡혀 오기 전까지 혀 밑의 사탕을 아껴 가며 녹여 먹듯 그 상황을 즐겼을 겁니다.  ‘모세는 율법에…’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잡혀 온 사람이나, 이 율법이 난해해서 혹은 지키기에 너무 어려워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것으로 남을 옭아매려는 사람이고, 혹은 조금씩 조금씩 무시하다가 이 죽음의 자리에 온 것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다양한 경우의 수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득달 같이 달려드는 그들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 무언가를 쓰고 계십니다.  덫에 걸린 먹이감은 발버둥쳐야 제 맛인데 예수님은 느긋하게 오히려 땅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계십니다.  이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여하튼 지금 득달같이 달려와서 질문하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앉아서 바닥에 무엇을 쓰시는 것은 그들의 질문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난처해 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자신들을 무시하듯 땅에 앉아 뭐라고 쓰고만 있습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들은 계속 질문합니다.  점점 압박해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던진 한 마디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많은 설교를 통해 이 장면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돌을 들고 곧 달려들어 칠 것 같던 그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처형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그들!  그러나 예수님의 한 마디에 그들은 손에 들고 있는 돌을 하나 둘씩 내려놓습니다.  

요즘에 예수님이 이러셨으면, 아무 생각 없는 사람 하나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고 하나 둘씩 나 몰라라 하면서 던졌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다행히 2000년 전 유대인들은 현대인들보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본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그 말씀에 어떤 권위를 느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여하튼 여인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여인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그 여자만이 남았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의하면, 유일하게 돌로 칠 수 있는 죄 없는 자인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던 여인에게는 깜짝 놀랄 일입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이 구절을 가지고 이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런던 National Gallery에 있는 작품입니다. 언뜻 보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예수님만 보이는데 이 그림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위의 부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법정입니다. 이곳에서는 모세의 율법대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법정입니다. 밑에 보이는 예수님의 법정은 죄 없는 이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법정입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둘을 대비시키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감상자 각자에게 달려 있겠지만 감상자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저 여인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하는 듯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의 구절을 읽으면서 어느 시각에서 읽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입장이십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입니까?  아니면 많은 군중들 속에 있으십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 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해가 거듭될수록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지 처음부터 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잘못된 길을 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들었다가 또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내리고 돌아서는 사람들 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이 사건을 여기까지만 보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  또한 미끼로 삼으려고 간음 현장에서 여자를 끌고 왔다.  모세의 율법과 로마의 법 중 어느 것으로 처벌해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죄 없는 이가 먼저 치라고 하셔서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 하고 다들 돌아갔다.  그리고 예수님은 역시 좋으신 분이시라 그 여자를 용서해주셨다.  해피엔딩!  이렇게 마무리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교훈 때문에 이 떠돌이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살아 남아서 요한복음 8장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니겠죠.  제가 나누고 싶은 말씀은 이제부터입니다.


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10절입니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에 ‘주여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단순한 말입니까?  사실 이 여인이 간음을 했든 말든 예수님에게 큰 손해 안 끼쳤으니까 별 상관없잖아요?  그래서 용서도 쉬워 보입니다.  아니 사실 용서고 뭐고 말할 입장도 안 되어 보입니다.  이 이름없는 여인도 이 때는 그 말의 뜻을 십분 이해하지 못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완성은 바로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그냥 눈 감아 버리고 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이 여인이 맞아야 할 돌을 대신 맞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 여인을 죽음의 자리로 몰았던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도 대신 지셨습니다.  돌을 들고 죽이려고 서 있다가 ‘죄 없는 이가 먼저 치라’는 그 말에 자신의 죄가 생각나서 돌아갔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죄도 다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모든 죄를 대신해서 죽으실 분이기 때문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간음을 용인하는 듯 하다는 해석을 내리는 분들은 여기까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용서하며 돌려보내신 것은 예수님 당신이 결국 자신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그 죄 값을 대신해서 지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갚아야 하는 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죄를 가볍게 여기신 것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의 말씀 뒤에는 내가 대신해서, 나의 죽음으로, 그 죄 값을 치를 것이다라는 말씀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많이 흥얼거리는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바닥에 새긴 사랑”이라는 제목의 찬양입니다.  조금 전에 보여 드렸던 그림을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가지고 몇 년 전에 설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National Gallery에서 이 그림을 직접 본 순간 온 몸에 전율이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억 너머에 있던 이 찬양의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바닥에 새긴 사랑

사람들은 나의 죄를 보고  주는 나의 아픔을 보네
그들은 내게 손가락질하고  주는 나를 감싸주네
죄 없는 이가 먼저 치라 바닥에 새긴 사랑
십자가에 다시 새겨 나의 생명을 구하네
감출 수 없는 나의 허물을 자신을 버려 덮으시고
피할 곳 없는 나의 영혼을 십자가에 숨기시네
나의 수치와 죽음을 대신 당하신 그의 십자가 뒤로
죄없는 이 예수 그의 십자가 뒤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서 여러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에는 그 분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담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감출 수 없는 너무나 뻔히 드러난 이 여인의 허물을 자신을 버려서 덮으신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 앞에 끌려 나온 이 여인의 수치와 죽음을 십자에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미끼 삼아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허물도 덮으셨습니다.  양심에 찔려 돌아가던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했던 그 죄들을 대신해서 지셨습니다.

조금 전에 보여 드린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여러분은 내가 어디에 있다라고 생각하시면서 보셨는지요?  위에 있는 법정에 계십니까?  예수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 중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림 밖에 지금 그 자리에 계십니까?  찬양의 가사를 들으시면서 “나”에 여러분을 대입시키셨는지요…   

그렇다면 저 그림에서 여러분 아니 우리, 제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니라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일촉즉발 죽음의 위기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그것도 현장에서 잡혀왔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는 것이죠.  아무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함정을 파 놓았다고 하지만 자신의 동의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 죄이거든요.  

우리가 우리를 변호하려고 할 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정말 솔직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충분히 피할 수 있었고,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혀 밑에 두면서 녹여 먹는 사탕처럼 우리는 그 상황을 즐겼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 배로 들어가서는 독이 되어 우리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독을 주님이 빨아내시는 것입니다.  그 독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죽을 것을 아시면서 독을 제거해 주신 것이죠.


4.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렇게 그 여자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신 분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리고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정말 이 여인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았을까요?  글쎄요… 그렇지는 못 했겠죠.  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사탕을 혀 밑에 두며 녹여 먹는 것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그 당시에는 정확하게 몰랐을 겁니다.  단지 죽을 뻔하다가 웬 젊은 청년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살아났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의 말에는 뭔가는 다른 힘이 느껴졌을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던 내용과는 달랐거든요.  그러면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는 그의 당부가 너무나 지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는 거죠.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 여자도 그 밑에서 지켜 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 그 십자가가 자신에게 용서를 베풀기 위해 그 분이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죽을 뻔하던 그 때, 꿈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그 때를 떠올려 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마지막 그분의 말이 너무나 애처롭게 다가옵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놓고는 자기가 대신해서 죽었구나.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이 여인이 쉽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혀 밑에 있는 그 사탕을 여전히 즐기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입에 그렇게 달콤하던 그 사탕이 얼마나 쓰게 느껴졌을까요?  상상력을 조금 가미한다면, 그 달콤하던 맛이 피 맛으로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은 ‘하지 마라’로 가득찬 금법이 아니라는 말씀을 자주 드립니다.  그 율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돌에 새기는 정도로는 완악한 우리의 마음이 혀 밑에 넣어둔 그 사탕을 쉽게 뱉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눈 속임만으로 겉으로만 그 가르침을 지키는 척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들을 기만했거든요.  오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돌에 새겨진 가르침을 너무나 잘 지킨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가르침을, ‘서로 사랑하라’는 그 본 뜻을 바닥에, 결국은 십자가에 다시 새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피로 새기신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려서 나의 허물을 덮으신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수치와 죽음을 대신 당하신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혀 밑에 숨겨 놓은 사탕을 억지로 입을 벌려서 뺏어내지 않으십니다.  그 보다 더 좋은 것을 보여주시면서 그것을 뱉어 내게 하시는 거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는 너무도 엄숙하고 눈물 겨운 것이지만, 너무나 황송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림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다시금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때문에 그 혀 밑의 사탕맛이 피맛으로 여겨지면서 깜짝 놀라 뱉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또 하나의 의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치와 죽음의 자리에 있던 나를, 자신을 버려서 덮으신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 같이 일어서셔서 찬송가 359장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이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하루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손가락질을, 수치를, 죽음을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다짐합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 시던 그분의 피 값으로 지불하신 가르침대로 딴 길로 가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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