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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본받아서 (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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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본받아서 (롬 15:1~6)


시작하는 말

심리학 이론에‘에니아그램’이라고 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아홉이라는 숫자를‘에니아’라고 합니다. 여기에 무게의 단위인 그램(g)을 붙인 복합어가 에니아그램입니다. 아주 상식화된 이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본성은 순수하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다 꼭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직면하는 냉혹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변하고 또 발전하여 대체로 보아 아홉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는 것이 이 이론의 전제입니다. 

이 이론을 가지고 소위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수행지침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존재로 또는 어떤 인간관계로 살아야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데 이 이론을 적용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생활, 자녀교육,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서 이것을 알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업하는 분들은 인사관리에 있어서, 혹은 조직운영에 있어서 이 이론으로 조정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기관에서 사람을 채용할때 숫제 심리학자를 동원하여 이 유형을 잘 구별해놓고 그에 맞추어 적절하게 안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 아홉 가지 유형이란 대체로 이런 것입니다. 첫째로 개혁자 형입니다. 이 개혁자형은 고도의 윤리성을 지닌 유형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주의를 기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정직하고 성실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런 사람들이 대게 편협합니다. 그게 약점입니다. 자기하나는 정직한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둘째는 협조자 형입니다. 감정이 풍부하고 애끊는 마음이 풍부합니다. 이것은 좋은데 이 사람은 너무 감정적이라서 의지가 약합니다. 때로는 지성적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셋째는 동기부여자 형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야심적이고 최고가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최고가 되겠다는 그런 사람인데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또 힘든 유형입니다. 그리고는 예술가 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직관적이고 동정심이 많고 개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울합니다. 정서적으로 강한 대신에 소위 광기가 있습니다. 그래 예술가하고 살려면 남다른 각오가 필요합니다. 가끔‘엉뚱한 짓’을 하는데 이걸 수용하지 못한다면 예술가와 더불어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천사같고 어떤 때는 악마 같습니다. 

나머지 다섯가지 유형은 생략하겠습니다. 다하면 지루합니다. 아무튼 이‘에니아 그램’이론을 보면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할 완벽한 사람이 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장점이 있는가하면 저런 단점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서로 이해하고 덮어가면서 수용해야만 가정도 사회도 직장도 편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도 자기장점을 극대화할 것이고 단점을 줄이도록 노력할 것이지 결코 무슨 단점이 있다고 해서 나는 쓸모가 없다든가, 나는 교양이 없다든가, 나는 구제불능이라든가, 이렇게 자신을 비하할 것이 없다, 그 말씀입니다. 남편이건 자녀건 나 자신이건 간에 항상 장점을 더 크게 인정을 하고 키워 가고, 단점은‘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잘 교정하고 극소화하도록 힘써나가는 것, 그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몸 말

이제 이러한 것들을 염두해 두고 신앙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를 왜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한 가지로 말한다면 우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완전한 인간이 된 것입니까. 완전한 인간입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 다음 단계로 끊임없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의 모습은 어떤가하면 신학에서 예수의 사역을 세가지의 상징적인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예수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왕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제사장의 역할을 한 분이다. 그는 우리를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자기 피로써 제사를 드리어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적 기능을 이루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치관에 대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가르치시는 분인 동시에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십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왕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본문은 두 번째 문제인 선지자의 문제를 생각하려고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로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이십니다. 그래서 감리교 신앙고백에 보면‘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되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그것까지 가르치십니다.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절대로 비참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행복의 길이요, 이것이 잘사는 길이요, 이것이 가치 있게 사는 길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모본을 보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생의 패러다임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 우리의 인간됨의 모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하고 말씀합니다. 중생하고 나면 이제 성화의 과정은 일생을 가는 것입니다. 꾸준히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닮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고치고, 예수님처럼 서른세 살에 죽어야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한다, 하는 형식적인 문제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인간됨입니다. 그 사람됨을 우리가 본받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요약해서 몇가지 말씀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1절에 보면“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이렇게 말씀합니다. “담당하고”-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강한 자”가 어떤 자입니까. 권력자, 정치가, 돈 많은 사람, 씨름선수…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정신적으로 강한 자, 인격적으로, 성품이 강한 자- 어떤 자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해봅니다. 먼저는 이해에 있어서 강한 자입니다. 내가 넉넉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이런 환경도 저런 것도 다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저 조그마한 일에 걸려 넘어지고 오해되고 원수 맺고 울고짜고 절망하고 한다면 약한 것입니다. 도량이‘벤댕이 속’같다면 약한 것입니다. 약해서 민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사에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게 약자입니다. 강한 사람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놀랄 것 없고, 호들갑떨 것 없습니다. 좋은 사람도 사랑하고 못된 사람하고도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또 역사의 의미도 이해하고, 환경이 말해주는 방향도 이해합니다. 그 이해, understanding mind가 넉넉합니다. 이것이 진정 강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라면 깨달은바 진리를 자기생활 속에 구체화할 줄 압니다. 이게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바로‘아, 그렇다. 그런고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돌아서면, 삶의 자리로 가면 말씀과 전혀 관계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말씀과는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행위는 행위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되어 사는 사람. 이것이 약한 사람입니다. 강한 사람은 한마디든 두 마디든 배우는 대로 생활 속에 실천 적응해나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내게 주시는 말씀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적용되고 실천되어지는 그런 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한 사람이라면 또한 실천지구력이 있습니다. 실천을 한 번 두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것을 이룰 때까지 지구력이 있게 실천해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기는 하는데 행하지를 못하고, 사랑해야 될 줄 알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해야 될 줄 알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했다가도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다시 원점으로 휘청휘청 돌아가버린다면 이는 약한 것입니다. 강한 사람은 한번 시작했다하면 끝을 봅니다. 요새 예배에 빠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가야 할 데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도 교인은 줄지 않고 헌금도 줄지 않는것 같은데, 주일 예배 참석 인원이 몇 년 전보다 4,5년 전보다 한 30명 내지 50명이 줄었습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가보아야 할 일도 많고, 해야할 일도 많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내가 일생을 걸고 한 맹세를 여기서 굽힐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한 약속인데 우리가 한 약속 그것을 못 지켜서야 쓰겠습니까. 실천의지,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보면 한국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박사공부 하는 것,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립니다. 오륙년 수고해서 마지막에 논문을 쓰는데 이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드니까 목사에게 물어봅니다.“계속할까요, 말까요? 박사 해봤댔자 별로인 것도 같은데, 취직도 못하는 것같은데, 할까요, 말까요? 박사라 해도 요사이는 50%가 취직하기 어렵습니다.”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그건 그렇다. 박사란 게 별거냐? 하지만 시작했으니 끝내라.

”시작한 걸 끝내지 못하면 한평생 그것 때문에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아.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지 이제와서 무슨 딴소리냐. 지금까지 6년 동안 수고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마저 해버려.”이렇게 말해주었더니 고민에 빠지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게 약한 것입니다. 이게 일반적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강한 자가 이해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고 꾸준하게 끌고나가지도 못하는 약한 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 담당한다고 하는 표현, 표준새번역에서는 돌보아준다. 영어성경에서는 caring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저는 오늘 이 개역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담당한다라고 하는 표현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싶습니다. 나아가서는 내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담당한다는 헬라말로‘바스타제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짐을 진다, 라는 뜻입니다. 그의 짐을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여러분 잘 외는 말씀이 있지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내가 맞을 것을 그가 대신 맞습니다. 내가 받을 비방을 그가 받습니다. 그 성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담당하는 마음입니다.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한번 한 것으로 기억하는 감동적인 실화를 다시 하겠습니다. 의사로 분주하게 일하는 부인이 있는데 남편이 밖으로 돌다가 에이즈에 걸려 들어왔습니다. 기가막힌 나머지 남편을 앞에 앉혀놓고 이 부인 하는 말이 이러했습니다. “내가 의사라서 바삐 돌아가느라고 아내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당신이 밖으로 돌다가 이렇게 됐으니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당신이 이대로 죽어가면 당신을 죽인 내가 어찌 평안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나도 같이 에이즈 걸려 당신과 같이 죽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좋겠습니다.”10년 동안 별거하다시피하던 사이가 다시 합쳤습니다. 에이즈환자하고 다시 부부생활을 한 것입니다, 죽기를 결심하고 다시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서 두 사람이 다 건강해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인가- 모든 문제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나 책임다했다, 밥을 안줬냐, 옷을 안줬냐, 학비를 안줬냐, 너는 너 할 일이나 해라- 가족간에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잘못된 거, 가출한 거, 공부 못하는 거, 내 책임이다- 담당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하는 거 내책임이다- 내가 담당하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아도 내가 받습니다.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내 책임까지 남에게 돌리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그가 담당하십니다. 우리의 약점을 다 담당하십니다. 다 당신 책임으로 돌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성품 자체가 약한 자의 약점을 비판하시지 않고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담당하시는 것- 바로 예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3절에서 말씀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 자기중심적인 마음, 이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 중심으로 살았으니, 이젠 나이도 한 쉰이 됐으니, 이제부터는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 없이 살아보겠다고 한번 확 뒤집어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나’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내 명예, 내 지위, 내 뜻, 내 고집,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면 여러분, 신비로운 기쁨을,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이웃을 기쁘게”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강한 의무입니다. 모든 일에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남의 이름을 높이는 것, 그것이 행복의 근본입니다. 수학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졌던, 일본학자 기꾸찌 교수는 옥스퍼드대학에 다닐 때도 역시 수학의 천재라 항상 1등만 하였습니다. 영국백인들이 기분이 안좋았습니다. 이 동양사람한테 우리 영국사람이 지다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브라운이라는 영국사람이 항상 2등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넘어서지를 못합니다. 이런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마침 기꾸찌가 독감에 걸려서 몇주간 동안 학교에 못나왔습니다. 다들 ‘옳지! 이번 학기는 브라운이, 백인이 1등 할 것이다’생각을 했는데 웬걸 또 기꾸찌가 1등을 하였습니다. 

알고보니 브라운이 매일같이 강의 들은 노트를 가지고 가서 친구 기꾸찌에게 전달강의를 한 것입니다. 왜요? ‘당신이 감기로 인하여 1등에서 내려앉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이것입니다. 얼마나 깨끗한 마음입니까. 남을 밀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것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요즈음은 IQ보다 EQ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EQ라는 것은 내 감정상태를 나 스스로가 알아내는 지수입니다. 아이들 보면 어떤 때 입이 삐쭉 나옵니다.“너 삐졌냐?”하면 “나 삐졌다”합니다. 그거 EQ가 괜찮은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잘못되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모르는 게 멍청한 것입니다. 내 감정을 내가 알고, 그 다음에는 내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줄 알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바르게 표현할 줄 알고, 그 다음에는 이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의 감정을 내가 잘 수용할 줄 알고, 그리고 모든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나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EQ가 높은’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 엄청난 일로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씩 하나씩 본받아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리스도를 닮게 되어있습니다. 왜 여러분, 학교다닐 때 특히 여학생들 좋아하는 선생님 많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 좋아하는 선생님을 자기도 모르게 닮아갑니다. 저도 서른살 때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있을 때,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이 여고생이 선생님을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좋아하게 되면 선생님의 심지어 나쁜 버릇들, 옛날에 칠판에 글을 많이 썼었는데 어느 선생님이 글씨를 참 못써서 삐뚤빼뚤 썼는데, 그 글씨까지 닮아갑니다. 좋아하면 닮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부부가 앉아 있는 분 서로 쳐다 보십시오. 서로 닮았나. 부부가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나요. 닮아간다고 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거에요. 

사랑하면 닮아가는게, 본 받아 가는게 정상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쉽게 닮아가는거에요. 예수를 본받는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앙망하면 나도 예수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쉽죠잉~ 쉽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예수를 본 받아서 그의 길을 따라 우리도 행복하고 그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꿋꿋이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본 받아 오늘 성경의 제일 마지막 표현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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