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

  • 잡초 잡초
  • 262
  • 0

첨부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하셨는데, 무엇을 요청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대상과 어떤 관계 속에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씀을 봅시다. ‘하늘’하면 구름이 떠있는 창공(sky)이나 대기권 너머 우주공간(space)부터 생각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늘(heaven)은 피조물의 거주 공간인 ‘땅’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전도서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하고 엄위하시고 영광스러운 위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식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하게 뛰어나시다는 비교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분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나시다는 최상급 표현조차 가당치 않는 분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인 단절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방할 수 없고 모델로 삼을 수 없는 분이시지요. 어떤 형상이나 화상으로도 그분을 올바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자존하는 분이시며, 불변하는 분이시며, 무한하신 분이시며 통일성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초월성’을 인식할 때 사람은 그분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건설한 느브갓네살 왕은 자기 능력과 권세와 위엄과 영광에 도취되었다가 7년을 미치광이로 살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후 그는 초월자 하나님을 찬송하며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낮추시는 그분을 경배하게 되었지요.(단 4:30, 31, 37). 반면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항상 자기를 다스리는 초월자가 계심을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늘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걸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한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초월성’을 생각지 않는 기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잃기 쉽습니다. 함부로 입을 열어 하나님을 마치 자기 소원을 이루어줄 마술 램프의 거인처럼 대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초월성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감히 창조주께 피조물의 뜻대로 하시기를 강요하고 몰아붙이는 태도로 기도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때 마치 주인이 종을 나무라듯 하나님께 따지는 자세라면, 기도자가 기도의 대상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광신적 태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의 유혹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였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심습니다. 인간은 잠재력이 무한하므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조종하면서 살 수 있는 상태를 갈망하게 만들지요. 기도할수록 하나님을 나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면 사단의 역사가 개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최우선에 두시며 무엇보다 자기 이름을 위하는 분이심을 더욱 의식해가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 대신에 곧잘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습니다. 복종해야하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감수해야 하는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즐겁게 해주고 만족시켜 주는 하나님이 편하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계시하는 “하늘에 계신” 초월자를 떠날 때 기독교는 세속화됩니다. 신앙의 근본 토대가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위한 신앙은 이교도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배교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든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선언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아버지”라는 말씀을 봅시다. 초월자이신 하나님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내게는 너무나 먼 당신님’처럼 느껴집니다. 기도라는 것이 예배당 천장을 뚫고 우주공간을 넘어 아득히 떨어져 계신 그분께 도달되어야할 어떤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요. 하지만 시편에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고 했습니다(시 25:14). 아버지는 그분을 경외하는 자녀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의 생명과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아들의 보호자요 인도자요 공급자가 되십니다.

한국사회는 무능한 아버지, 폭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은 자식들이 많습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그대로 닮아가고 또다시 자식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자 교주 때문이겠지만 ‘하나님 어머니’를 홍보하는 이단은 한국인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한껏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돼지 똥이 잔뜩 묻었을 탕자를 향해 달려 나가 포옹하며 키스를 퍼부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입니다. 도저히 아들로 여길 수 없는 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아들로서의 모든 특권을 회복시켜 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눅 15:20-22).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첫 생명을 부여받은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이후 모두가 불순종의 아들이요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 2:2-3). 더러운 죄에 오염된 비참한 존재였지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대적자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구원받기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이요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도 없었고 그분의 언약을 멸시하며 주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자식처럼 행했지요.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무지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친밀히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피 흘림을 통해 구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오물을 뒤집어쓴 죄인이지만 대신 고난당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를 통해 의인으로 선언하시고 양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 11:41b-42a)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도 항상 아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성도의 기도 응답 확신은 이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께서는 성도에게 “의로움”이 되셨다고 합니다(고전 1:30).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는 성도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니다. 이것은 성도의 기도가 예수님을 통해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와 동일한 것으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수준이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정죄 당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성숙한 아들의 기도뿐만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아들의 옹알이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날카로운 칼을 요청하는 어린아이의 요구를 그대로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당신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않는 기도를 할 때에는 응답하시는 시기와 방법을 달리 하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당신님의 자녀가 기도를 통해 당신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성숙해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아는 성도로서는 전심전력하여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늘 중요합니다. 하늘과 땅 어느 한쪽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붙들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사는 초월성의 극단과 내재성의 극단 사이를 진자처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초월성만 부각되면 신비주의가 내재성만 부각되면 합리주의가 득세했습니다. 하늘이 무시되면 교회 안에 이 세상이 넘쳐났고 땅이 무시되면 교회가 험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로 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탄 받는 것은 프로그램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엄위하신 하나님보다 친구 같은 하나님만 지나치게 강조되므로 교회 안에 세상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내재성의 지나친 추구 현상은 하나님의 친밀히 하심을 언약의 말씀만으로 신뢰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초월적 위치에 두지 못하고 말초신경의 자극을 통해 감각적으로 강렬하게 느끼기를 원합니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몹시 진노하셨고 그 백성들을 치셨습니다(출 32장).

오늘날도 하나님의 친밀히 하심을 각종 음향효과 속에서 오감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언약하신 말씀을 통해 신뢰하기보다 강렬한 체험을 원합니다. 한번 체험하면 체험을 말씀보다 우위에 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체험에 맛들이면 점점 더 강렬한 체험을 갈구하게 현상도 생깁니다. 말씀만으로 밋밋하여 그분의 친밀히 하심을 도무지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체험으로 말씀을 진단하지 않고 말씀으로 체험을 분별해야 옳습니다. 감성으로 느껴지면 그대로 좋고, 느낌이 없을지라도 말씀만으로도 신뢰하고 경외합니다. 그래서 친밀함을 누리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게 되지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해서 잘 생각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므로 다른 형제자매들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서도 권면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