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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들에서 기적을 보리라! (요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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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에서 기적을 보리라! (요 6:1~13)

 
한 시대에 국가를 경영했던 대통령들은 세상을 떠날 때 무슨 말을 했는가?  박정희 전대통령은 "나는 괜찮아"하고 가셨습니다.  얼마 전에 노무현 전대통령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는 한 마디를 하고 죽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은 무슨 말을 하고 갔을까?  어떤 분은 아주 유언서를 써서 자신의 묘비에 새겨달라고 한 분도 있습니다.

양을 치던 목동이라는 자리에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다윗은 무슨 말을 하고 갔을까?  "하나님을 가까이 했음이 내게 복이었다."  한 시대의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경영했던 다윗은 이런 위대한 말을 하나 남기고 갔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것, 그것이 내가 한 생애를 살면서 마지막 복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길, 믿음이라는 통로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나니"  믿음은 모든 종류의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믿음은 모든 삶의 미완성을 수용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의 능력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대로 안되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안되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혈기도 내고, 감정도 냅니다.  어떤 때는 절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아직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에 서 있어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삶의 미완성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가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  오늘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모든 성급한 판단을 뒤로 미루고 하나님을 일단 의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자꾸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에 손을 듭니까?  왜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실패하는 겁니까?  혼란 때문에 그렇습니다.  혼돈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그 혼돈과 혼란 앞에서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하고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혼돈과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유한하고 부족한 우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혼란과 혼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적이고 믿음적인 시각에서 보면 혼란과 혼돈은 하나님의 또 다른 질서를 짜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혼란 앞에 기업이 어려울 때, 가정이 어려울 때, 부부가 어려울 때, 자녀가 어려울 때 무너지지 마십시오.  그 때 우리는 미완성을 수용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하나님의 기회라고 하는 믿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혼란과 혼돈은 하나님의 미래의 세계를 짜는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란의 시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많은 책을 보고, 수 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 시대에 선두기업의 주자들은 대부분 혼란의 시대에 출발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잘 되는 기업들도 대부분은 1930년대 경제공황 때에 시작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떠오르는 기업들도 대부분 아무 것도 없는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모두 혼돈과 혼란에 붙잡혀서 안 된다고 했을 때에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란의 시대가 제공하는 하나님의 절호의 찬스를 포착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남들이 다 잘 될 때 하면 그것은 이미 늦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모든 혼란과 혼돈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짜는 또 다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모든 혼란과 혼돈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신이 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혼란이 없으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서 운행하지 않습니다.  혼란이 있을 때에 운행합니다.  그때에 붙들고 매달려야 합니다.  혼란과 혼돈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회의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볼 수 있는 믿음이 열려야 합니다.  오늘 이 믿음을 붙들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란이라고 하는 원어의 뜻은 하나님의 비상구라는 뜻입니다.  혼란 속에 하나님의 비상구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오늘 여러분 삶이 혼돈과 혼란 속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이 시간 예배를 드리다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해서 하나님의 질서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새로운 비상구가 보여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를 위한 선택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함께 공존합니다.  이 선택의 권리를 내가 할 것이냐, 아니면 남에게 줄 것이냐 하는 것은 자기 자유입니다.  자기의 고유 영역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선택을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해서 나를 변화 밖으로 밀어내고 맙니다.  떠내려가면서 끌려가면서 변하느니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스스로 변화하자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축복은 기적이 아닙니다.  축복은 변화의 열매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정말 현실이 살기 싫고, 짜증이 나고 역겹거든 변하면 됩니다.  싫으면 변해라!  변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물고기의 비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썩고 더럽고 오염된 급류 속에서도 물고기들은 생명을 걸고 거슬러서 끝없이 올라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수의 근원을 찾아가면 거기에는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말 못하고, 인간보다 훨씬 연약한 물고기들도 썩고 오염된 물에서는 자기의 새끼를 안 기릅니다.  비상을 하고 뚫고 나가서 거기에 산란을 합니다.  거기에서 새끼를 낳고, 거기에서 종족번식을 일으키려는 무서운 야망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 잡종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음란하고 혼탁한 문화의 오염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후대를 이 오염되고 썩은 문화에서 끌어내서 맑은 물에서 키워보겠다는 거룩한 소망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부모가 혼탁하고 오염된 타락한 물에 빠져 있으면 그 자녀들도 그대로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더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울 것입니까?  아이들에게 아무리 변해라고 해도 아이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모 앞에서 그저 변하는 척 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인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이 혼탁하고 음란한 세상 문화를 몰아내야 합니다.  내가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모습 속에서 자녀들에게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산란을 앞둔 물고기가 어린 생명을 위해 맑은 물을 찾아 비상하듯이 우리도 자녀들을 위해 거룩한 성령의 물줄기를 찾아 비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염된 그 물에서 주저앉아 있지 하지 마십시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계속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엔가 산소 부족으로 호흡이 힘들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 오염된 물에서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자각도 없이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맑은 물줄기를 찾아야 합니다.  내 영혼에 성령의 맑은 공기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강하고 뚜렷하게 들려오는 영혼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생포 당하십시오.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에 붙잡히십시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에 정복당해 보십시오.  이 길만이 여러분이 살고, 오고 오는 우리의 후대가 사는 길입니다.

중세시대에 당시 유럽의 사람들은 포르투칼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포르투칼의 수도이지만 한때 스페인령에 속해 있던 리스본이라는 항구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항구 도시의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이다.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1492년 한 사람이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오르면서 함께 한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다."
그가 바로 탐험가 콜롬부스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여정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절망과 좌절을 거부하고 희망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의 세계를 봅니다.  가능의 세계를 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빈 들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기적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없는 인생도 없고, 문제 없는 가정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유일한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때로 좌절합니까?  문제 상황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문제를 만납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걱정하고, 한편으로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정치도 사회도 불안하고, 교육도 경제도 어렵습니다.  미래도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모두가 빈 들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때에 희망을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게 생겼다고 말할 때 오히려 기적을 꿈꿉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은 이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그 이적에는 분명한 어떤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이적 중에 그 네 번째 기록된 소위 오병이어의 이적입니다.  이 표적은 빈 들에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빈 들에서의 기적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이라고 하는 제자가 나옵니다.  허기진 수천 수만의 군중을 보시고 주님께서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없겠느냐?"
이때 빌립이 아주 재빠르게 계산을 해서 대답을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빌립의 이 대답에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가 군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의 어려움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빌립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주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주님만이 능히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우리의 부족한 자원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만 보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를 보지 말고 그 문제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이어진 6절에 보면 분명히 이것은 "시험이었다"고 말합니다.  믿음 테스트였습니다.  이 테스트에 대한 빌립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컴퓨터처럼 머리가 팍팍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아주 대단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대답을 내어놓습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여기에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였습니다.  만약에 2-300만원 월급을 받는다고 하면 대략 한 십만원쯤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백 데나리온은 2천만원 정도 됩니까?  빌립의 이 대답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성의 법칙이요, 세상의 법칙입니다.  이 땅에는 이성의 법칙이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의 법칙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교회 안에 빌립과 같은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빈 들이라고 해서 거기에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틴에는 수많은 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빈 들에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빈 들에서 기적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빈 들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기적을 경험했던 요인들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빈 들에서 기적을 경험하려면 우리의 절대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섬김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린 어린 소년의 헌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보리떡은 당시에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에게 간식으로도 주고, 나귀에게도 먹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물고기라고 번역된 "옵사리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다가 큰 물고기가 잡히면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오지만 작은 물고기는 다시 물 속에 넣어줍니다.  그런데 가져오기에는 너무 작고, 그렇다고 다시 물 속에 넣을 필요가 없는 어중간한 크기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낚시꾼들은 이런 고기를 바닥에 던져둡니다.  그러면 고아나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바닷가에 나가 주워다가 소금에 절여 자기들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이처럼 소금에 절인 조기새끼 같은 물고기가 "옵사리온"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보리떡 다섯 개와 절인 물고기 두 마리가 바쳐진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한 끼 도시락 식사입니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은 어린 소년의 작은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언제나 기적의 씨앗을 요구하십니다.  빈 들에서의 표적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린 소년이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과 초라한 물고기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헌신이 5천배의 이적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 5천배이겠습니까?  남자 장정만 5천명이었다고 했으니까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3만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소년의 작은 헌신이 3만배의 이적을 낳는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은 나누고 섬길수록 배가 된다고 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빈 들에서 이적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빈 들에서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씨앗이 있습니다.  보리떡이나 물고기와 같이 아주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도시락이 있습니다.  사실 이 도시락 하나가 5천명의 군중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주의 손에 바쳐질 때 거기서 5천배, 3만배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려지기를 꺼려함으로 말미암아 허실이 되고 마는 재능과 은사와 달란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노래하는 재능, 가르치는 재능, 봉사하는 재능, 전도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섬기고 접대하는 은사, 긍휼이 여기는 은사, 치유의 은사, 지혜와 지식의 은사, 이웃을 세워주고 위로하는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내가 숨겨두고 움켜쥐고 있으면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치면 기적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년은 가난한 어머니가 싸준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초라하다고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아깝다고 인색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린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그가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빈 들에서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앞에서의 헌신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주 앞에서의 섬김과 봉사를 멀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건강, 물질, 지식, 시간 무엇인가를 기쁜 마음으로 바치기만 하면 주님의 손에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보기에는 너무 작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잡힐 때,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바짝 말라비틀어진 보잘 것 없는 나무막대기였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을 때 홍해를 갈랐습니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릴 때 골리앗 장수를 무너뜨렸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는 삼백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더니 수십만의 미디안 군사를 격퇴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손에 있을 때는 비록 작은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손에서는 큰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큰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소년의 작은 헌신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있는 것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한 숨만 나오시는 분이 계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는 항상 풍부한 자원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 편에 서십시오.  그분께 당신이 가진 기적의 씨앗을 바치십시요.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십시오.  하나님이 그 문제를 움켜쥐시고 내 편이 되어 주시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쓸모도 없었던 옵사리온 같은 물고기,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못났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온전히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일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옵사리온 보다 못한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나라와 몸된 교회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드려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보리떡 같고 물고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섬김과 헌신을 받으셔서 이 땅을 살리고 이 민족과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바로 그 교회를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빈 들에서 기적을 경험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믿음의 눈으로가 아니라 이성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 이전에 인간적인 판단과 경험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달랐습니다.  주어진 문제를 자기 이성으로 풀어본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왔습니다.  도시락 하나를 가진 소년을 예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9절에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9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소년이 가지고 있는 도시락은 분명히 보잘 것 없는 아주 미약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이시라면 이 작은 것으로도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안드레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이 소년의 도시락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십시오.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주님께서 보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빈 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빈 들은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빈 들은 삭막하기 때문입니다.  빈 들에는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빈 들은 말 그대로 빈 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빈 들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면 빈 들을 푸른 초장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소낙비를 보았습니다.  작은 것에서 거대한 숲을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싣고 와서도 "조금씩만 먹게 한다고 할지라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인간의 계산으로, 인간의 자원만으로 살다보면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타령이나 하고 '부족하다'만 노래하다 끝이 납니다.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원대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씩 주는 것과 원대로 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가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빌립의 방법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방법은 언제나 넉넉하고 남습니다.
"원대로 주라.  배부르게 먹으라.  그리고도 남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 당신이 만든 답을 가지고 나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십시오.  그 다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기적은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 위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이적은 믿음의 그릇만큼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인생 여정에서 빈 들에 서 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붙들고 그 빈 들에서 당당하게 일어나 꿈과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빈 들에서 기적을 경험하려면 그곳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당시에 많은 빈 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빈 들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계시는 그 빈 들에서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예수 없는 사업은 성공 같되 실패요
예수 있는 생활은 만사유익합니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옵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어느 화가가 무서운 풍랑을 만난 배 한 척을 그렸습니다.  풍랑은 금방이라도 배와 선객들을 삼킬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두려워 떨기는커녕 모두가 여유 있고,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키를 잡고 항해하는 선장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풍랑의 높이를 계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키를 잡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고통 중에 계신 여러분!  왜 지금 곧 예수를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분은 지금 당신을 도와주시고자 합니다.  눈의 초점을 달리 하십시오.  당신의 인생의 핸들을 붙들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문제를 바라보던 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야맹증에 걸린 사람은 눈의 초점이 흐려져서 밤에 길을 걸을 때 자꾸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시궁창에 빠지기도 하고 전봇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초점을 제대로 잘 맞추어야 합니다.  공중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는 앞만 바라보고 그 줄을 똑바로 걸어야지 술렁이는 군중들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면 줄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절망과 어두움을 바라보는 인생살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과 소망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부정적인 안경을 벗어 던지고 긍정적인 안경을 끼고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부정적인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신앙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예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빈 들에서도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인생의 빈 들에서 힘들다고 몸부림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생의 빈 들에서 서서 원망하고 절망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그 빈 들에서도 헌신과 섬김을 내려놓지 마십시오.  그 빈 들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과 함께 이 빈 들을 지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기적의 현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기적을 일으킬 주인공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는 기적의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결코 섬김과 헌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꿈꾸십시오.  지금 상황이 빈 들이라고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문제를 보고 서 있지 마십시오.  빈 들에서 이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신실하심을 믿고 더 헌신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더 크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감에 지금 감동되십시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힘을 얻어 불평을 중단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평화의 행진을 시작하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한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를 향한 섬김과 헌신으로 내 발이 가는 곳에, 내 손이 닿는 곳에, 이제부터 내 몸이 가는 곳에 하늘의 표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주 앞에 선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말씀만은 꼭 들으십시오.
섬김과 헌신으로 주를 향함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빈 들에 서 있을지라도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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