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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능력 (행 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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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 (행 5:9~16)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역사는 전쟁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처음 싸움이나 전쟁을 할 때 무기는 사람들의 힘이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있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제압하는 속도와 숫자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강인한 사람이 대우를 받았습니다.

청동이 발견되면서부터 전쟁의 무기는 칼이나 창이나 방패나 화살 등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기역시 전쟁의 도구였지만 큰 위협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에 다이너마이트가 발명되면서 이젠 폭탄의 위력으로 대량살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쟁이 지상만이 아니라 하늘까지로 확대되면서 '핵무기'가 온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합니다.  핵무기의 파괴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힘을 가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터진 핵폭탄은 20톤급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30만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있는 메가톤급, 베가톤 급의 핵무기가 등장했습니다.  만약 메가톤급의 핵폭탄이 서울시청에 떨어지면, 200만 명이 순간적으로 흔적도 없이 모두 증발해 버립니다.  3km 이내의 200만 명은 후폭풍으로 고통 받다가 사망합니다.  9km 이내의 300만 명은 2주에서 6개월 이내에 모두 죽습니다.  게다가 서울의 건물 80-90%가 완전 파괴되고, 모든 교통과 통신과 전기와 수도가 일제히 마비가 됩니다.  또한 한반도의 건물과 자연환경에 60%의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1000만 명이 죽습니다.   또한 무역풍을 타고 핵폭탄의 여진이 일본과 중국까지 날아갑니다.  정말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능력이고, 능력하면 우리는 성령을 떠올립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성경 헬라어 단어가 ‘뒤나미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다이나마이트’가 나왔습니다.  지금 세상의 폭발적인 힘을 상징하는 말이 성경에서 말하는 능
력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핵무기와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핵무기보다 더 큰 능력이 있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잠재울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능력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보통 성령의 능력하면, 어떤 신유나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신비한 것을 많이 연상하고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기보다 ‘은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능력은 훨씬 내면적이고, 영적입니다.  과연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죄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5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보기 드문 사건이 나옵니다.  소위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부부인 두 사람이 누구 하나 손을 대지 않았는데 갑자기 죽은 사건입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이들 부부는 재산을 팔아 땅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분만 교회에 내놓았습니다.  사실 바친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칭찬을 받을만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성령을 속인 것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무서운 죄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속인 죄로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평온하던 교회에 적잖은 파문이 된 사건입니다.  성경은 초대교회에 유무상통의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이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성령을 속이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경고해 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성령을 체험한,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것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에
게 능력이 임했는데 바로 죄를 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죄가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지를 분별하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죄를 분별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특징은 분별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위험을 모릅니다.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이는 더러운 것도 모릅니다.  오물을 모르고, 고약한 냄새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나면 이제 분별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
수를 믿기 전에 죄를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아직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살면 죄를 모릅니다.  

하지만 성숙한 믿음의 사람일수록 죄를 알아갑니다.  죄의 무서움을 깨닫습니다.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식별합니다.  그래서 믿기 전보다, 믿은 후에 더 내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때론 눈물로 통곡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믿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이 회개합니다.  보이지 않던 죄가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모를 때는 자기 멋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죄가 보입니까?   내 마음 구석구석 남은 죄가 있음을 압니까?  죄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십니까?   나의 죄를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또한 민족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무엇이 죄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너무 격분하고 흥분하여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프랑스 학자 ‘르네 지라르’라는 사람이 지은 저서가운데 ‘폭력과 성스러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의 혼란한 현대사회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비극적 갈등의 평형 상태가 자리 잡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정의니 부정이니 하는 말이 틈입할 여지가 없는 법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 이르렀을 때 ‘서로 화합하십시오, 아니면 서로 벌하십시오’라는 말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어쩌면 비극적 갈등의 평형 상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민족의 한이 고통과 슬픔으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정의니, 부정이니 하는 말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격한 감정과 첨예한 대립 속에 진정 바르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살아야 할 인간으로서,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자체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때 믿는 자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죄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해결할 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차분하고, 침착하게 우리는 자신을 보고, 민족을 보아야 합니다.   민족의 죄를 알고, 분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칭송을 받는 능력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에게 나타난 반응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물론 13절에 상종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나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당시 불신자나 기득권을 가진 소수의 종교지도자라고 여겨집니다.  이들은 사도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성도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칭송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권력과 힘을 이용해 핍박과 고통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민심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소수의 종교지도자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는 자를 칭송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니까 내적으로 든든해지고, 외적으로 성장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주변의 사람들, 마을과 도시의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여기 ‘칭송’이라는 말은 ‘인정을 받다, 칭찬을 받다, 존중히 여김을 받다’는 것과 함께 ‘무시하지 못했다, 
영향이 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성도에게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들을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떤 권력이나 힘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입니까?  칭송을 받는 자, 칭찬을 받는 자여야 합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칭찬하고, 혹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이라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삶의 현장에서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고, 결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성향이 맞지 않으면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고, 싫고를 떠나서 무시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때론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능력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렵게 해야 하고, 교회를 무시하지 않게 하고, 주님과 성도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1888년에 한국교회에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 고작 25명이었습니다.  당시에 선교사들의 기도제목은 세례교인 30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에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으로 1922년까지 세례자는 25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식민지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백만 명이 되었고, 1985년에는 드디어 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바닷물의 염도가 3%정도지만 그것으로도 썩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이 인구의 25%인데도 한국 사회는 부패하고,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소금인데 소금이 아니요, 빛인데 밝히지를 못합니다.  성령은 임했지만,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나오고, 신앙은 있지만,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이 먹히지 않고, 행동은 비겁하고, 삶의 모습은 불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급기야 이젠 칭송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런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인정과 칭송을 받고,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썩고 부패하고 흔들리는 국가와 사회에 중심을 잡는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 성령의 사람, 능력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살리는 능력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사람을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 말씀을 보면 마치 베드로의 신비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또한 그의 그림자라도 놀라운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려는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가 기적을 행했다는 것에도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16절 마지막에 ‘다 나음을 얻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상처받고 아픈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때론 기적이 있고, 병고침과 은사가 그림자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의 심장에는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곳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특히 3장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모두 자기문제, 자기기도, 자기예배,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아무도 불쌍한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를 준 것입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적이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고,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을 어떻게든 살리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 그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세우기가 쉽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엄두를 못 내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에게 사람들은 때론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자기가 잘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그들이 오히려 방해였습니다.  그래서 말로 행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에게 오면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혈우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에도, 베드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기테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내 영혼이 귀한 것처럼 사람의 영혼도 귀하고, 내가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아픔도 큰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귀한 존재임을 알았고, 내가 사는 것처럼 모두가 살아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충만한 베드로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방언을 하고, 사람을 고치고, 신비로운 예언을 한다고 해도 사람을 살리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고, 살리는 것입니
다.  지금 이 시대를 보면서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나아갈 방향입니다.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지금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육신적으로 죽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영적으로도 피폐하며 맥없이 쓰러져 갑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죽고, 죽은 사람도 더 죽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격려와 위로가 점점 사라지는 세상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정의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혜는 없습니다.  그래서 삭막하고, 답답하고, 때론 무섭게도 느껴집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육체를 살리고, 영혼도 살려야 합니다.  

필립 얀시라는 사람이 지은 저서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은혜가 없는 세상에 은혜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그는 책의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수년 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화를 축하하기 위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공연은 대부분 록밴드로 진행되는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였습니다.  그런데 제작진은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오페라 가수 제시 노만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날 드디어 마지막 차례가 되었습니다.  기품 있는 흑인 여인 노만이 무대 위를 걸어 나갑니다.  악단도 없고, 악기도 없습니다.  객석에서는 누군가가 야유를 보냅니다.  오페라 가수 말고 다른 가수 나오라는 것입니다.  제시 노만은 눈을 감고 아카펠라고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날 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열광적으로 외치던 칠만 명 팬들이 노만이 부르는 은혜의 아리아 앞에 돌연 침묵에 잠긴 것입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노래가 2절에 이르자 군중은 완전히 제시 노만의 손안에 들어왔습니다.  3절을 부를 때 사람들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잊혀진 가사를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따라 불렀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그날 모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진한 감동의 피날레로 감동적인 공연을 마쳤습니다.

필립 얀시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시 노만은 후에 그날 밤 웸블리 스타디움에 무슨 권능이 임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알거 같다.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다. 은혜가 임할때 세상은 그 앞에서 침묵에 잠긴다.”

여러분,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면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은 죄를 분별하는 능력이고, 칭송을 받는 능력이며,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한주간도 이런 능력이 우리와 민족 위에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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