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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4가지 소리 (창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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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소리 (창 3:1~11) 

  
사람은 20-20,000데시벨 정도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더 커도 들을 수 없고, 더 작아도 들을 수 없다. 소리는 1초에 340m를 간다. 이를 마하라 하는데, 공기와 충돌이 생겨서, 쾅하는 소리가 난다.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가 빠르기에, 소리가 엄청나게 크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는 마하1.4정도다. 

지구상에 나와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 정도의 속도다. 지구가 공전하는 속도는, 마하 88정도 된다. 그러니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얼마나 클까? 상상할 수 없는 큰소리다. 너무 크기에, 들리지 않는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 개미가 다니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너무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으면, 사람들은 미치고 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있다. 자연에 의해 들려오는 바람소리, 천둥소리, 온갖 종류의 새 소리와, 짐승들의 소리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낸 자동차소리, TV소리, 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있다.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살기 위해, 아우성치는 소리도 있다. 이처럼 많은 종류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하다. 에덴동산에는 4가지 소리가 있었다. 

  (1) 마귀의 소리 (2) 자연의 환경소리 (3) 욕망과 양심의 소리 (4)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들이 있었다. 에덴동산에 있던 소리가, 오늘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온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선택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소리를 분별해야만 한다. 

1. 전혀 믿을 수 없는 마귀의 소리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곳에도, 마귀가 있었다. 마귀는 뱀의 모양으로 나타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공격했다. 

  마귀의 공격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예수님까지, 마귀의 공격 대상이었다. 마귀는 하와에게 말했다.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비틀어 질문했다. 하와가 대답했다. (2-3)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마귀의 질문은, 처음부터 거부해야 한다. 그런데 하와가 뱀의 질문에 대꾸했다. 이미 뱀의 작전에 말려드는 모습이다. 하와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꿨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히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말씀을 두리 뭉실 알면, 사탄이 틈탄다. 하나님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때 마귀가 말했다. (4-5)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제는 전부 엉터리로 말하게 된다. 

  마귀가 정면으로, 하와를 한방 먹였다.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왔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귀의 목적은 동일하다. 예전에는 진화론자를 내세워,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했지만, 최근에는 과학 우상주의를 내세워 그 짓을 한다. 

  요즘은 ‘뉴에이지’라는 문화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시킨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부인할 수 없으니, 하나님 말씀의 본래 의도를, 왜곡시키는 수법을 쓴다. 사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같은 인격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돌려서, 비교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하나님이 마치 아담과 하와를 시기하여, 하나님처럼 될까봐, 주지 않는 것처럼, 거짓말 한 것처럼 꾸며댄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킴은, 마치 우리의 살아있는 세포를, 변질시키는 것과 같다. 변질된 세포가 곧 암세포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다. 먹자마자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몇 시간 지나서 알지 않고, 즉각적으로 알았다. 마귀는 하와에게,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의심하도록 유도했다. 

  마귀의 질문은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질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매우 진지한 인생에 대한 질문처럼, 가장하는 특징이 있다. 사탄은 위장술의 명수다. 뱀의 성품은 간교하다. 지금도 사탄은 간교하게, 우리를 꼬여서,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게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존재이기에, 마귀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결론은 파멸이다. 절대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마귀의 소리이다.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기에, 분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잘 구별해야만 한다. 


2. 조금 믿을 수 있는 환경의 소리 

마귀소리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소리이지만, 환경의 소리는 믿을 수 있는 소리도 있고, 믿을 수 없는 소리도 있다. 아담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 바람이 불 때,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거니셨다. 바람이 불 때는, 원문에 ‘영을 위한 그때’(םוֹ󰖼󰕘 󰖙וּ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왜냐하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는 분명히, 평소와 다른 환경이었다고 생각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도, 보통 때와는 다른 환경이었다. (출19:17-19)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아담이 선악과 먹고 나서, 이상하게 변하는 환경의 소리를 아담은 들었다. 아담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이유는, 물론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환경이 말하는 소리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믿지 못할 환경의 소리도 있다. 

  아담과 하와가 보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먹으면 지혜가 임할 것 같아 보였다. 환경이 욕망의 소리와 연합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귀의 소리와 더불어, 자기 욕망의 소리가 연합된 소리를 들었다. 이처럼 환경의 소리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자기만 먹을 일이지, 왜 또 남편은 주는가? 이처럼 죄는 전염성이 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먹지 않을 수 있는가? 따라서 환경을 따라 움직이면, 실수할 수도 있다. 

  환경을 보고 행동하다가, 낭패한 사람들이 성경에 얼마나 많은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에도 기근이 있다. 그 이유는 기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음이 강해지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기근의 때에,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내 방법과 내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애굽으로 가면, 식량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가족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모압 지방으로 떠난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원수인데, 모압으로 떠났다. 하지만 모압에 가서 약간의 떡을 얻었지만,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먼저 죽는, 비극을 맞았다. 환경의 소리는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상하리만큼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생겼다. 

  그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길이 막혔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길을 막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이 밤에 환상가운데서, 마게도냐 사람 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이 바울에게 외친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행16:9). 

  그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저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줄 깨닫고,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접고, 배를 타고 마게도냐, 즉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래서 배를 타고 건너간 곳이 빌립보였다. 그곳에서 강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루디아를 만난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신다. 결국 그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고, 그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된다. 또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어서, 주인이 고소하는 바람에 감옥에 간다. 감옥 안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가족이 모두 믿게 된다. 

  그때 바울이 말한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행16:31)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말 그대로 되었다. 그가 예수님을 믿어,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결국 온가족이 구원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온 유럽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욱 분별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사건들이, 하나님이 주신 환경인지, 마귀가 주는 환경인지, 구별할 수 있는 영안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환경은 어느 정도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못 믿을 환경의 인도하심도 있기 때문이다. 


3.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양심의 소리 

임마누엘 칸트는 “저 하늘에게는 반짝이는 별이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는,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하나님 몰래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은,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 (8)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이 뭐라 하시지 않았는데, 양심은 아프게 채찍질하자, 아담과 하와는 몰래 숨었다. 그들은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 2007년 8월 한국철도공사 경북북부지사에, 10만원이 든 편지 1통이 배달됐다. 30년 전 당시, 가난 때문에 기차를 무임승차한 죄를, 신앙양심상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원주시에서 목회를 하는, 강문구 목사이다. 이처럼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미국 백악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가운데 인기를 끄는 것은,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보낸 편지와 1불짜리 돈이라고 한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통령 할아버지! 우리 집에 온 편지에 우표에 도장이 찍히지 않았기에, 떼어서 사용하였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어, 우표 값을 보냅니다.” 백악관을 이것을 미국의 양심이라고 자랑하며, 전시하고 있다. 양심은 언제나 참된 것을 증거 한다. 양심은 선한 마음인데,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 했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였기에, 다시 살아나지 않는 양심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우리 주변을 보면, 실종된 양심이 얼마나 많은가? 양심이 바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화인 맞은 양심이다.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불로 몸을 지지면, 그 곳은 감각이 없어진다. 이처럼 양심을 잃으면,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고도, 전혀 잘못인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이미 인간으로 살기는 어렵다. 

  지존파 대원들은 사람 죽이고, 처리할 수 있는 화장터를 만들어 놓고, 고급승용차를 탄 사람들을 붙들어 죽이다가가 붙잡혔다.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돈 많은 것들은 더 죽이지 못하고, 붙잡혀서 억울하다”라고 했다. 이 정도면 인간으로서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화인 맞은 양심이다.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양심은 깨끗해질 수 있다. 양심은 살아날 수 있다. 어떻게 회복될 수 있나요? 하나님 앞에 나와 설 때, 가능하다. 

  양심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양심은 헬라어로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εσις)인데 (συν,함께) + 에이도(εἴδω, 보다, 알다)에서 왔다. 하나님과 더불어 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양심은 반드시, 하나님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볼 때, 회개가 시작된다. 

  우리는 늘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라고, 100% 신뢰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양심을 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말하기에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양심이 살아나면, 영감이 넘쳐난다. 

(1) 영적 감동(마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베드로는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마16:16). 

(2) 영적 인도(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소원을 두고, 무엇을 하도록 촉구하신다(빌2:13). 

(3) 영적 매임(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우리의 영을 그곳에 매어 두시어, 그 장소나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하신다. 

(4) 영적 평안(고후2: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심령이 편치 못한 일이면, 하지 마라.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 없는 상태는, 대게 안 된다는 말씀이다.
 

4. 절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소리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도 들었다. 하나님의 소리는, 절대 신뢰할 수 있는 소리이다. 양심의 소리도 아니요, 환경의 소리도 아닌,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9)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야 한다. 

  (행9:4-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바울은 이 음성을 듣고 인생이 달라졌다. 바울에게는 결정적인 소리였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가 더 필요하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치려는 순간,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었다. 이삭을 죽이지 말라는 음성이었다. 이 음성을 듣고, 이삭을 살릴 수가 있었다.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가시떨기 앞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길을 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야 행복하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바울은 (살전2:13) “우리가 너희에게 전할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고 하였다. 말씀을 들을 때, 말로 듣지 말고, 말씀으로 들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바울의 소리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살리시는 말씀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는 은혜가 있기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인생이 변한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소리를 받아드리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생명을 살리는 음성이다. 

  행8장에서는 빌립이 주의 사자의 명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로 내려간다.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그곳에 가니 에티오피아 내시 한 사람이, 병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두루마리 성경을 읽으면서 가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말하신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29). 성령님께서 요구하시자, 사도 바울은 순종하였다. 그래서 빌립은 순종했다. 그에게 다가가 ‘이사야의 긁을 읽음을 알고, 읽는 것을 깨닫느냐?’ 내시는 말하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없이, 내가 어떻게 깨닫겠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빌립은 병거에 올라타, 길을 같이 가면서, 이사야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결국 내시는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까지 받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하시면, 꼭 순종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곳마다, 양심의 소리, 환경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 에덴동산에는 네 가지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변에도, 언제나 4가지 소리가 들리게 되어 있다. 구별할 줄 아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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