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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 119: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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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 119:71~72)


본문은 시편 119편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그리고 시편에서도 197절이나 되는 가장 긴 시에 해당합니다. 본 시는 시편 중에서 문체가 찬란하고 빛나는 명구들이 많다 해서 시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시편입니다. 본 시편이 지어진 시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윗이 지었다고도 하고 내용과 어휘로 보아서 다윗 이후 시대에 다니엘이나 에스라가 지었다고도 말합니다. 이 같은 주장들은 다만 설 뿐입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본 시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널리 기억하라는 뜻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 시편의 주제가 “여호와의 율법”입니다. 이 시편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의 법이나 율법 그리고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두절 말씀은 시편 119편 중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보면 숱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고 경험하다 보면 그 고난들을 통해서 깊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은 바로 그 점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좋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참 어렵고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고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고난을 해석하는 기준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고난은 또 다른 교훈과 깨달음을 갖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일주일 동안 심방을 하고 보고를 받아 보면 성도들의 가정에 숫한 사고들, 어려움들, 고난들, 각종 병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사에는 이런 고난의 삶이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살아가는데 이런 고난들, 사고들, 아픔들, 실패들이 많으냐 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무덤에 가면 조용해 질 것입니다. 고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타인 때문에 주어진 고난 

이것은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은 타인 때문에 무서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자기와 무관했습니다. 주변 환경 때문에 그리고 타인들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종살이를 합니다. 이것은 요셉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아서 감옥에 갔는데 그것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표현은 없지만 그때 요셉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결코 무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요셉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재발견하고 만나고 엄청난 은혜를 입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고난은 타인으로부터 주어진 고난이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어진 고난도 결국은 하나님은 합동해서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택한 고난 

이 경우는 사도바울의 경우입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도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극심한 가난과 고난과 핍박과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고난을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스스로 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어느 젊은 집사님이 부주의 하는 동안 어린 아이가 포도를 먹다가 기도가 막혀 끝내 숨졌습니다. 그 후 이 젊은 부부는 말할 수 없는 자책감에 빠지고 고뇌에 찬 생활을 하다가 원망에 빠지게 됩니다. 실의의 날을 보내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이 부부는 깊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 선교사로 자원해서 선교지로 갔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자책을 보상해 보려고 말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택한 고난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말입니다.   

알 수 없는 고난 

그런가 하면 알 수 없는 고난에 빠지기도 합니다. 욥의 경우입니다. 욥의 고난은 까닭 없이 당한 고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식들이 하루아침에 같은 장소에서 집이 무너져 죽고 몸에 병이 들고 마침내 아내가 저주하고 집을 나갈 정도의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이 와서 죄를 회개하라고 말 합니다. 네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이런 재앙이 오겠느냐고 윽박지릅니다. 

욥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이 감히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런 중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욥 10:1-7). 욥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더욱 고난이 컸습니다. 그런데 욥이 고난당하게 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이 있었고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욥과 그의 친구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더욱 탄식이 커지고 고통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이 세상에는 알 수 없고 까닭 모를 고난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까닭 없이, 이해 못할 고난이 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이 그리고 삶이 답답한 것입니다. 고난 중에는 이렇게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남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 

예수님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100% 남의 죄 때문에 주어진 고난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주어진 고난이었습니다.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해 주시려고 스스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제물도 그냥 제물이 아니고 철저하게 피를 쏟고 십자가에서 죽는 고난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위험이 다가오는데도 철로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구하고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해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전철이 다가오는데 누군가 아래로 뛰어들거나 떨어졌습니다. 순간 누군가가 뛰어들어 구합니다. 하마터면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익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도를 하다가 순교하는 전도자들도 역사를 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두 남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들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고난들이 나에게서 나타나고 내 이웃에게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남들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스스로 만든 고난 

우리들이 받고 있는 오늘의 고난은 대부분 우리들 스스로가 만든 고난입니다. 판단을 잘못 했거나 과정이나 생각이 잘못 되어서 주어진 고난들입니다. 아니면 탐욕 때문에 그리고 부주의 하거나 과욕 때문에 발생한 고난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틀림없을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어느 여자 대학생이 학자금이 없어 막막하고 마감일은 다가오니까 사채 300여만 원을 얻어 학자금을 냈습니다. 단순히 며칠 후에 갚을 줄 알고 사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빌린 것입니다. 그런데 제때 갚지를 못하자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갚을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채업자는 몸이라도 팔아서 갚으라 하며 서비스 업자에 팔아버리고 대신 꾸어준 돈을 받아갔습니다. 이 여학생은 빚을 갚기 위해 서비스업에서 일했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후에 알고 고민하다가 딸을 찾아가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 고난이 말하자면 자신이 스스로 만든 고난입니다.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피라미드 계에 빠져서 재산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만 재산을 잃으면 괜찮은데 남의 돈까지 끌어들이고 남들까지 끌어들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습니다. 판단 잘못으로 자신이 만든 고난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는 고난들은 대부분 자신이 저지른 것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들입니다. 누구 탓할 일 아닙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는 그런 기도를 할 염치도 없는 고난들입니다.  

야곱이 처가에서 20년 동안 종살이를 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주어진 고난입니다. 순전히 탐욕 때문에 주어진 고난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도피해 처가로 가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그것은 노예생활이었습니다. 야곱은 거기서도 또 속였고 또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연속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까. 

후에 애굽에 가서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하고 물었을 때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게 된 것은 모두 자기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그는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큰 문제들을 푸는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야곱은 그 문제를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함으로서 해결합니다. 그 말은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 방법은 방법이나 수단이나 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얍복강 방법으로 즉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난을 두고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것도 아닙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저지른 죄 때문이고 탐욕 때문이고 부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풀어야 합니다. 무슨 방법으로 풀어야 하는가 하면 얍복강 방법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매달리고 내 잘못을 고하고 내 탐욕을 탓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였음을 회개하고 야곱이 죽도록 매달려 푼 것처럼 매달림으로 풀어야 합니다. 야곱은 기왕 고난을 받았고 내가 만들었든 속였든 그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들을 합동해서 유익하도록 방향을 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은 그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변화를 받았고 마침내는 탐욕의 사람인 야곱이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4명의 아내를 얻었고 4배의 복을 받았고 12아들을 얻어 나중에는 12지파를 형성하여 이스라엘의 뼈대를 이루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인간의 실수를 하나님은 그것도 활용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실수를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다윗왕은 밧세바를 추행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 여인으로부터 임신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그 남편을 전쟁터에 내 보내 무참하게 죽게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소행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자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이십니다. 죄에 대한 보응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무섭게 보응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그 여인의 몸에서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전무후무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분입니다. 베드로는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가룟 유다 못지않은 죄를 저지릅니다. 회복 불능수준으로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수를 통해서 강력한 베드로를 만드십니다. 

베드로는 그 실수를 통해서 성숙하게 되고 거듭나게 되고 마침내는 말 그대로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성숙해진 베드로가 마침내 벧전 4:장에서 담대하게 증언하기를 “예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불같은 시험을 걱정하지 말라,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때 주의 영이 함께 하시리라“고 메시지를 줍니다. 베드로가 이런 고난의 신학을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는 예수님께 너무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은 그렇게까지 악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악했던 사울이 마침내 주님을 만납니다. 만나서 알고 보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그 길로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침묵하며 자신을 연단시킵니다. 그리고 나오면서 외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딤전1:15)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전력 때문에 더 충성했고 그래서 그의 사역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은 살아가다가 실수하고 역부족을 느끼고 실패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역부족이나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도 일을 열어 가십니다. 오늘 우리의 부족이나 못생김 그리고 무능이나 무지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조차도 장점이고 하나님이 활용하시는 자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대로가 좋습니다”하고 늘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면 자꾸만 불만하게 되고 원망하고 세상을 살면서 부족한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불신앙의 삶입니다.  

송명희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시인은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온 몸이 흉할 만큼 뒤틀린 채 살아갑니다. 여성으로서 생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분이 너무 안타까워서 “미국에 가서 한번 치료를 받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 그 시인은 주저 없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대답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의 속에 들어있는 영이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하기도 해서 너무나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난관에 직면해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 때문인가를. 다 여러분 자신들이 저지른 고난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두 내가 저지른 고난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기대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왕 주어진 이런 실수나 내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나 욕망 때문에 저지른 고난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고난들조차도 결국에는 유익하게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하나님을 재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고 깊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고 알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좋습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에 마음 깊이 우리의 영을 흔들어 주시는 감동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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