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살전 1:1~10)

  • 잡초 잡초
  • 245
  • 0

첨부 1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살전 1:1~10)


1982년 8월에 저희 부부가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피아노도 없었고, 마이크도 없었습니다. 의자도 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들이 볼 때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처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많이 바뀌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님을 세워 27년이라는 그 긴 세월을 지내왔는데 어려움도 많았고, 참으로 미약한 사람들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가정마다 축복해 주시어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세워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다 같이 지나온 시간은 역사에 속합니다. 그 역사를 돌이켜 기억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펼쳐가는 밑거름을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 창립 정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출발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어떤 교회가 되어 왔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저는 성경 속의 교회 가운데 한 교회를 모델로 삼고 배워가는 교회가 되어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성경 속에 여러 교회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 가장 모범적인 교회 중의 하나인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귀한 교회를 닮아 가는 교회의 목표를 가지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울이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살전 1:2) 

우리 교회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있을 것입니다. 조금은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각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것이 부족하여 안좋게 보는 시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볼 때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바라볼 때마다 감사가 흘러나올 만큼 대견한 교회였습니다. 

교역자인 바울의 감사 제목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사업에 성공하였기 때문도 아니고, 명예나 지위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니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의 감사 제일 조건입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녀와서 전하여 준 소식을 듣고 바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환난 중에도 신앙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면서 교회를 든든히 섬긴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할 때마다 2절에 보니 "....너희를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기도 할 때에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름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감사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눈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때로는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역시 주의 종 사도 바울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설립 된지 불과 2~3년밖에 지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짧은 연륜 가운데도 대견스럽게, 당당하게 자라가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실한 믿음으로 알차게 자라가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억할 때마다 감사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도했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저를 바라볼 때마다 감사하고, 제가 여러분을 바라볼 때마다 감사하고,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가 저희를 볼 때마다 감사함으로 기억하며 기도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먼저 인정받아야 되겠지만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믿음직스럽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신앙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신앙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요, 
둘째는 사랑의 수고요, 
셋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요, 질적으로 부흥된 교회의 모습인데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모범적인 신앙의 3요소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① 믿음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붙드시고 당신의 역사들을 이루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을 때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셔서 기쁘게 축복하실 만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그 교회에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어 있는 섬기지 않습니다.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지도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산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언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좋을 때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히11장 1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지만 실제로 소유한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지금 몸이 괴롭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 것을 믿고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성도들은 믿음에 있어서는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생긴다고 하십니다.(롬10:17)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에 올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 같아도 또 들어야 합니다. 다 아는 것과 같아도 그 유혹에 넘어 가지 말고 또 들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들어야 합니다. 들어가나 나오나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 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그것을 손목에 매고, 네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철저히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더욱 왜 그래야 하는지를 신6:2에서 말씀하시기를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기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이 장구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죽은 믿음은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약2: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의 힘이 외부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신앙 행위에 대한 열매가 맺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여인이 두 사람이 올라있는데 기생 ‘라합’과 ‘룻’입니다. 그런데 그 라합은 믿음의 여인인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아니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면 그 약속에 합당한 행동을 하여야 하는데 그 행동이 바로 역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늘 걱정이나 하고 있고, 부정적인 소리나 하고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근심케나 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7장에서 믿음의 사람,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바울이 죄수가 되어서 로마로 끌려가게 되는데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배를 타고 뵈닉스에서 출항합니다. 벌써 그전에 바울은 이 출항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주가 선장의 말을 바울 말보다 더 믿음으로 무리한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배가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는데 얼마 가지 못하여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배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는데 그 광풍을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표류하기를 14일 동안 합니다. 이미 사람들은 절망의 그림자가 그 얼굴을 덮었고 살 소망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믿음의 사람 바울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음식도 나누어주면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와 희망을 심어 줍니다. 

"당신들 중에 머리털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행27:33-37)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똑같은 환경입니다.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초죽음이 되어있고, 어떤 분은 눈이 빛나고 있습니다. 무슨 차입니까! 믿음의 차이입니다. 결국 바울의 믿음이 죽어 가는 알렉산드리아의 276명을 살려 내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에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이 어려운 시대에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부정적인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하고 어두운 시대를 더 어둡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믿음이냐 하면 9절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행함 있는 믿음! 역사가 있는 믿음의 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에 모범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고,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와 싸우는 행위가 보이지 않고, 마음속에 탐욕이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같은 우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죽은 믿음일 것입니다.

보통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과 행위가 함께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위와 합리화를 추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행여나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될까 두려우니 행하는 역사로 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풍성하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② 사랑의 수고가 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주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 신앙의 참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통하여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받을 때도 기쁘지만 사랑할 때 기쁜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일 때 기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을 위한 수고를 기쁘게 감당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랑함으로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수고의 땀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희생의 피를 흘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기쁘게 사랑의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사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전4:9에서는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사랑에 대하여 칭찬한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었는데 수고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으로 수고하듯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 없이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의 "수고"라고 하는 말은 "고통스러우리만큼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교회와 주를 위하여 어떤 괴롬과 아품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수고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 주님을 위해서 어떤 환난 고통도 참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수고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런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수고를 아끼지 아니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고, 셋째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의 사랑의 형태는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입니다. 고전13:4-7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 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 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 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렇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며, 특히 있는 것으로 나누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시에 많은 압박과 핍박을 통해서 괴로움이 많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고, 한집의 가장이 유배를 당하여 생계가 어려운 가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누가 책임졌습니까! 그 교회의 성도들이 그 수고를 담당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지금 이 시대는 사랑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니라 수고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성도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대선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일할 때 비로소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맡은 일들이 크든 작든 사랑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감당하십시오. 

③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반드시 인내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고, 물고기와 물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농부가 가을에 추수할 소망이 있기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고 말지만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난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 예수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였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다실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릴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어려움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어려움은 더 큰 축복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순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소망으로 기다릴 수 있는 신앙이 복된 신앙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망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롬8:24절에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 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마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보이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요, 허무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요,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헛된 소망에서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주 예수의 강림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전쟁의 위험과 피 흘리는 아픔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승리의 소망 때문일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기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역사와 수고와 인내의 행위들이 외적으로 들어 나야 할 것입니다. 이 열매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윤활유가 될 것입니다.

인내는 다만 참고 견디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더딜지라도 늦지 않게 주님이 오십니다.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주님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빌 4:13).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권능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짐으로 감기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권면할 때 그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남을 위해 기도해줄 때, 남을 위하여 희생할 때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유익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충만한 교인들이 되니 주위에 아름다운 교회라는 소문이 온 누리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살전1: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여러분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소문이 좋아야 합니다. 그것도 믿음의 소문이 좋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소문이 있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전도자를 바로 아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5절 하반 절에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좋은 소문은 교역자와 성도간의 아름다운 소문입니다. 이 관계가 아름답지 못하면 교회가 아름답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먼저 전도자나 교역자를 자로 알아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환난 중에도 기쁨으로 도를 받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라고 하는 말씀을 봅니다. 여기에 관한 기록이 행17:5-10에 나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무렵 대단한 핍박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과 핍박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외적인 고통과 핍박을 말합니다. 복음을 받아 드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받아 드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 시험을 당하게 되고 어려움이 오면 신앙이고, 교회이고 다 자포 자기하기가 쉬운 법입니다. 교회에서 조금 부담스러우면 그 부담이 싫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쁨으로 도를 받아 능히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신앙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③ 주님과 사도들을 본 받는 신앙의 소문이 있었습니다.(6c)

본문 6절 하반 절에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신앙! 사도들을 본받으려고 하는 신앙! 이것이 신앙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희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최후 승리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주님의 능력이 말로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소문이 각처에 권능으로 나타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4.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선교에 힘썼습니까? 전도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만난 그대로를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① 자신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를 증거를 했습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살전 1:9)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에게 어떻게 복음이 들어왔는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너희들에게도 이 위대한 복음이 전달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②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 "(살전 1:9)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까지 간직하여 오던 불의하고 죄악 된 요소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③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이와 같은 선교의 열매로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6-8)

①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②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주님을 확신하며, 모든 성도들이 이 귀한 신앙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금년에 창립 27주년 기념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는 더욱 성숙하고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며,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아름다운 소문을 가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