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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파는 자 (눅 2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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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파는 자 (눅 22:21~23)
 
 
지금 온 세계는 거대한 시장입니다. 시장은 물건을 팔거나 사는 곳입니다. 매매의 기능이 곳 시장의 기능입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물건에 대한 가격이 흥정되면 매매가 성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매매가 되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습니다. 인신매매, 양심매매, 신앙매매, 성령 매매와 같은 것들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은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팔 것이 있고 팔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길 때 천륜과 인륜을 버린 사람 취급을 받게 됩니다. 사람은 아무리 분이나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아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옛말에 農夫餓死枕厥種子(농부아사침궐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부는 끼니가 떨어져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종자는 배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농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종자에 쓸 씨앗을 먹어버리거나 팔아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흉년이 되어서 먹을 것이 없어도 종자는 베고 죽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팔아서 더 좋은 것을 사야 할 경우는 망서리지 말고 팔아치워야 합니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사람이 손에 무엇을 들고 있으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사다리를 올라갈 때는 손에 든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신적이 있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겉옷이란 가장 중요한 재산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겉옷은 인간의 모든 치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옷은 세월과 함께 낡아지는 것이며 유행과 함께 바꾸어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이면서 거지인 바디메오가 예수 앞에 달려 나아갈 때에 겉옷을 벗어던져버리고 예수께 달려나갔습니다. 그는 겉옷을 팔아 복음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것을 거꾸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을 팔아 겉옷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철이 되면 주일을 팔아 일을 사고, 명절이 되면 말씀의 검을 팔아 체면을 사고, 성령의 검을 팔아 삐까번쩍한 허세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 한마리 끌고나가서 썩은 사과 한 상자 바꿔가지고 돌아온 어렷을적 교과서에 나온 어리석은 할아버지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은 아시아 일곱교회 중에 라오디아 교회를 향하여 계3:18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하셨습니다.  
  
그동안 교회와 성서학자들은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첫이유를 다른 제자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의 결과로 생각하기도합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파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는 그만의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같은 것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보면 사도 요한과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가룟 유다를 강도와 도적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히 않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이 생기거든 마음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뽑아내버리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의 능력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꾸짖어 내 쫓아버려야 합니다. 

둘째는 물질 제일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로 생각합니다. 
가롯유다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어드리는 것을 보고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리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흠쳐감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죄로 인도하기 때문에 십계명중에 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탐욕과 관계가 있는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탐욕스러우면 부모공경 어럽습니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간음하고 탐욕때문에 살인하는 경우가 많고 탐욕으로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도 하게 되고 남의 재산을 탐내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탐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민, 형사 사건의 90% 이상이 돈에 얽힌, 그러니까 돈과 직, 간접적으로 관계를 가진 사건들입니다. 범행의 동기를 묻게 될 때에 서슴없이 "돈 때문"이라는 대답을 많이 듣습니다. 
  
셋째로 실망감을 들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자기 스승과 적대자들 사이에 서서 양다리를 걸치고 어느 쪽에 붙어야 유리한가를  저울질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세상의 것, 곧 이 세상의 재물과 자신의 육신의 영달 따위에 모든 관심을 둔 자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이적을 행하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섬겨도 그러한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자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도 자신의 이상과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는 실망감을 느끼기 시작한 반면 적대자들로부터는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를 따르는데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보다는 세속왕국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더 소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께로 나올 때는 세속적인 이유로 나왔을지라도 예수를 바로 알고부터는 세속적인 이유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이러한 이유들은 사단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본질적으로 악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하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닙니다(참조, 요 8:44;벧전 5:8).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도  시험한  자입니다(참조,  마 4:1-11). 

이와같이 사단은 모든 가능성과 기회를 포착하여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입니다. 가룟 유다는 평소에도 남의 것을 훔치는 죄를 지음으로 사단이 기회를 얻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그 결과 그는 사단이 자기를 주관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참조,  눅22:3;요 13:27).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주관할 가능성과 기회를 가지지 못하도록, 틈을 만들지 말아야 하며,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겠습니다(참조, 살전 5:22).

예수는 그 어떤 것으로 바꾸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며 길이며 진리며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파는 자에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화에 직면한 존재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보화를 산 농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던져서 사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찬송가 102장

시기와 미움으로도 물질 때문에도 실망감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을 파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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