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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신앙 생활 (행 8: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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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앙 생활 (행 8:9~25) 
 

1. 한국의 무속신앙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한국의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말하는 '유불선(儒佛仙)' 혹은 '유불도(儒佛道)'라는 '공식'은 잘못이다. 한국 종교의 공식은 토착 신앙인 무교(巫敎)를 포함한 '무불유(巫佛儒)'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최 교수에 따르면 고대 한국인들이 신봉했던 종교는 샤머니즘, 즉 무교였습니다. 

그 예로 단군왕검은 샤머니즘적 사제를 겸한 정치 수장(首長)이었고, 신라 초기 임금을 뜻하는 '차차웅'은 신라 말로 무당을 뜻했습니다. 이후 불교와 유교가 유입되면서 세력은 줄었지만, 무교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각 지역의 ‘마을굿’이나 ‘풍어제(豊漁祭)’ 같은 무교 행사는 이제 國家無形文化財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무속인 단체에 따르면, 등록된 무속인 수는 약 20만 명인데, 회원으로 등록하지 않는 무속인까지 합치면 30만 명 정도가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 무당, 올림픽 메달리스트 무당, 대학 교수 출신 무당, 유명 신문사 기자 출신 무당, 게다가 “未來學者”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무당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무속 종교인은 얼마나 될까요? 무당 1인당 15명에서 20명의 고객이 있다고 쳐도 우리나라 무속 신앙인의 수는 약 500만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무속 신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을까요? 사주궁합, 관상, 날 잡기, 결혼, 출산, 이사, 등 대소사에 깊이 배여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무속 신앙이 교회 안, 성도의 삶에까지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돈을 내고 점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 인구의 38%나 되는데, 그 가운데 30%는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최근의 어느 무속관련 신문에서 발표한 것과도 같은 수치입니다. 서울의 신촌이나 미아리 등지의 점쟁이들은 고객 관리 명단 가운데 ‘기독교인’이라고 적힌 것을 별도로 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가요? 최근 한 무속인이 신문에 삽입한 전단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비밀 절대보장, ○○철학관>. 이렇게 기독교인들만 전문적으로 봐주는 점집도 있다고 하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의 한 여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도 삶의 염려가 많고 걱정이 많아서인지 자주 점을 치려 다녔습니다. 하루는 ‘용하다’하는 점쟁이에게 점을 치려갔더니, 그 점쟁이가 “당신은 점괘가 안 나오니 그냥 가라”고 하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권세와 능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 당신과 함께 있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양반이 그 다음 주일 교회 가서는 자신이 봉사하는 성가대원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다음날 그 점쟁이 집에는 그 교회 성가대원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상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기독교 안의 무속적인 모습에 대해 승려였다가 목사가 된 이력을 가진 서울 대현교회 서재생 목사는 “교회 안에 너무나도 많은 우상숭배, 무속문화, 불교문화가 범람하고 있다”면서, 교회 안에 있는 무속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만남을 ‘인연’이라고 말하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은 나와 결혼할 것입니까?’라고 묻는데, 이것이 무속적인 신앙입니다.” 
“어느 권사님과 집사님이 젊은이들을 서로 소개해준다면서 하는 말이 ‘말띠와 쥐띠는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하는 데 이것이 무속적인 생각이지요.” 
또 “어느 교회 권사님이 젊은 교인에게 ‘올해는 말띠해니까 애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역시 무속적인 생각입니다.” 

“비단 이뿐 아닙니다. 쌍춘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해에 결혼한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또 아이 돌잔치를 할 때 ‘돌잡이’를 하지 않습니까? ‘돌잡이’는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해 일종의 점을 치는 행위인데도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의 ‘폐백’은 또 어떻습니까? 대추를 던지면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합니다. 여기에는 조상을 섬기는 문화가 스며들어 있지요.” 
또 어느 교회 노인 대학을 갔더니 ‘성주풀이’를 가르치더랍니다. “성주는 가택 신앙에서 최고 어른 신(神)인 ‘성주신’을 말하는 건데도 그걸 교회에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불교 염불을 민요로 만든 회심곡(回心曲)을 가르치지 않아 다행이죠.

이처럼 수 천 년을 이어온 무속 신앙이 기독교 신앙인 것처럼 떡 버티고 있는 것들이 많으니, 여러분의 생각과 삶에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와 이 땅에서 무속 신앙을 몰아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무속적인 신앙과 바른 신앙이 어떻게 다른 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과 거리적으로 아주 가까우면서도 마음으로는 너무나 멀었던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일이고, 그 중심에는 시몬이라는 사마리아 사람과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분인 전도자 빌립이 있었습니다. 

2. 두려움, 종교심, 그리고 무속신앙

❶ 사람은 누구나 宗敎心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이 염려스럽고 미래는 불안하기에 연약한 인간은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사마리아를 사로잡고 있던 것, 사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바로 이 마술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이 마술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술법, 또는 여러 가지 도구나 손재주로 사람의 눈을 속이는 술법’입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마술에 대하여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외부의 신비로운 힘에 접근함으로써 인간이나 자연현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의식이나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마술에 대한 두 가지의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술을 교묘한 조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술사나 요술사를 ‘눈속임을 위해서 사람들의 심리와 손재주를 교묘하게 결합시키는 배우’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쇼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주장은 인류학자나 종교 역사가들의 주장인데, 이들은 마술을 종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며 외부의 신비로운 힘이 인간 존재에 미치는 영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결론적으로 마술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도구나 손재주로 사람을 속이는 일종의 쇼이기도 하고, 인간이 아닌 신비로운 힘이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가지고 있었던 마술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술은 눈속임만이 아니라 외부의 힘을 입어 능력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무당이 작두를 타고, 깨진 유리 위를 걷는 것이 눈속임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시몬 역시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람들 앞에서 행했을 것이고, 기적과 치료와 투시와 저주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도 있었겠지요. 그러했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몬을 향하여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10). 시몬은 이렇게 마술적인 능력으로 사마리아 市의 남녀노소들로부터 신이나 신의 대리자로 존경을 받았고, 스스로를 “큰 자”라고 부를 정도로 교만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시몬이 이러한 능력을 행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마술과 술수로서 사마리아 시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즉 마술로서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시몬은 그것으로 돈도 벌었습니다. 그가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한 것을 보면 상당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몬이 마술로서 권력과 돈을 얻으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한 것이 시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술적인 능력 배후에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있듯이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을 높이는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적 존재는 누구이겠습니까? 사단이고, 사단을 따르는 악한 영이지요. 결국 시몬의 정체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할 위대한 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사마리아 성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며, 사마리아를 사단의 세상으로 만드는 데 사용된 악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몬의 정체가 드러난 일련의 사건들이 사마리아에 벌어졌습니다. 사마리아에 시몬과는 전혀 다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으며, 표적과 큰 능력을 행하여 귀신들린 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등을 고쳤습니다. 

그는 시몬처럼 사람을 속이거나,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악마적인 힘, 어둠의 능력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밝고 맑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능력을 행하는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지금까지 시몬이 행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지요. 그래서 시몬은 자신과는 전혀 다르면서 더 능력이 많은 이 도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를 믿겠다고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마술에 두려움으로 복종했듯이 그 역시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과 그가 말하는 예수라는 분에게 복종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마치 동물들이 뿔의 크기를 견주어 보고는 큰 놈에게 굴복하듯이, 주먹 세계에서 힘 있는 자에게 약한 자가 굴복하듯이 시몬은 자기보다 더 능력 있고 신비한 힘을 가진 자에게 굴복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몬이 비록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다녔지만, 그의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❷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이런 것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혼동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비한 能力과 표적적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미래와 일신상의 문제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는 미래에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보험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경우는 어렴풋이 신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믿지 않았다가는 혼이 날 것 같아서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신앙, 참되고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헌신할꼬?’ 하는데 관심이 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에게도, 복음에도, 교회의 영광과 기쁨에도, 주님의 나라에도 가 있지를 않습니다. 이 땅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 있었을 뿐입니다. 

혹시 이러한 시몬의 잔재가 오늘 여러분 가운데도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사55:7). 
또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8:34). 
즉 생각이나 어떤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길” 즉 그렇게 살아온 지난 삶을 전적으로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 자기를 주장하는 마음, 이 땅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려지지 않은 채 하나님을 믿으니까 신앙과 성령이 육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과거,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여러분의 전부를 주님께 내려놓고 오직 주와 말씀으로 충만하신가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시몬과 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성령께서 …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 있던 사도들은 빌립이 전도한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지요. 유대와 사마리아는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그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을 않는 등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갔으며,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기는 했지만, 아직 성령께서 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성경 전체를 볼 때는 신자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성령께서 임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었는데, 바로 사마리아가 그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성도들은 왜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성령을 받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❶ 만약 그들이 믿을 때 곧바로 성령이 임하셨다면, 사마리아 교회는 독자적으로 교회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하나 되기에는 너무나 멀었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마리아 복음화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되게 하시고, 사도들이 공식적인 파견과 안수의 과정을 거쳐 성령이 임하도록 하심으로서 교회의 분열을 막으셨습니다. 

❷ 또 만약 그들이 믿을 때 바로 성령이 임하셨다면, 교회의 질서와 권위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모태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의미가 없어지고, 주님이 세우신 사도들의 권위가 무시되는 것이죠. 이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런 시간의 차이를 두신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 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교회의 공식적인 파견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기도함으로서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믿음의 능력과 신앙생활의 즐거움, 그리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처럼, 사마리아 교회도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동일한 주님의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령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사도들 곁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본 시몬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주는 이 신기한 기술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몬에게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신앙과 바른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른 신앙은 능력이나 기적이나 어떤 특별함보다는 예수가 누구시며,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가 먼저입니다. 시몬이 왜 잘못되었습니까? 예수보다, 복음보다, 교회보다, 다른 사람보다 기적과 능력이 먼저이고, 그것으로 자기 이익을 얻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성령 받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그 인격이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몬이 보기는 잘 본 것이죠. 

성령을 받은 신자야말로 정말 마술이나 그 어떠한 요술로도 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생활이 바뀌었으며, 그의 성격이나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 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했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먼저 경험해야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변화가 우선임을 몰랐던 것이 시몬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시몬과 달리 사도들이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할 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능력이나 다른 이익을 얻고자 할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뿐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요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4. 세상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한 신자들

안타까운 것은 오늘 교회 안에도 시몬처럼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그 임하심의 현상들이 나타나자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청하기를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습니다(19). 

마술이 시몬에게 일종의 기술이었듯이,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도 그에게는 새로운 기술, 신기술로 여겨졌고, 그래서 이 기술을 돈으로 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망할지어다.” 라면서 그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빨리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볼 때 시몬은 나쁜 성격과 불의에 매여 있었습니다. 영적인 것을 상업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하고, 하나님의 것을 돈으로 살려고 하고, 교회 직분을 돈으로 살려고 하는 시도를 꾸짖은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세상의 원리, 세상의 방법이 그대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책망은 계속 됩니다. 

23절,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시몬 안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마술에 대한 집착을 보았습니다. 또한 시몬으로 하여금 마술을 행하게 하여 이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악한 영의 역사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책망한 것이죠.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성령의 임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지난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마치 새 빌딩을 짓기 위해서 낡은 집을 헐어버려야 하듯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우리 주님의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주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게 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이요, 구습과 옛 신앙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5. 바른 신앙, 바른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몬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잘못된 의도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되고 바른 신앙과 관계없는 옛 신앙과 옛 사상에 젖은 채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잘못된 원리와 방법으로 신앙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주님의 복음, 그리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 이것보다 자신의 축복, 명예, 돈 되는 방법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시몬을 보십시오! 그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자기보다는 더 큰 힘을 만났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보다는 다른 것에, 소위 ‘젯밥’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상의 것을 벗어버리고 교회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교회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며 악한 것입니다. 왜 점 치는 한국인 가운데 30%가 기독교인일까요? 이 땅에서의 성공이 목적이고, 이 땅에서 잘 살고 문제없이 사는 것, 불안에 떨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 바른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 생각과 사상, 생활태도 등,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 그의 손에 붙들려 죽으라하면 죽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이며, 여러분이 신앙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의 나라, 오직 복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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