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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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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오늘 본문의 무대는, 이방 땅인 두로 지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생애 최초로 유대 나라의 경계를 벗어나서 이방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리로 가신 목적은,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두로는 이방 지역이므로 그곳까지 찾아올 유대인들이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빛이 자신을 숨길 수 없듯이, 이방 지역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서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여자의 절박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께서 이 가련한 여자의 호소를 외면하시다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보기에 딱했던지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곧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냉정한 태도입니까? 그 때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에게 개라고 하셨으니, 이 보다 더한 모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여자였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 여자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라도 마음이 상할만한 상황에서 이 여자가 보여준 반응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시로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이 시간, 저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면 주 예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이 여자는 이방인입니다. 이방 여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알았을까요? 당시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주변의 이방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고, 이방인들 가운데도 적은 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자기 하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호소했던 백부장이나, 천사의 지시를 받아 사도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했던 백부장 고넬료도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께서 오시면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0절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했습니다. 만민은 선민과 이방인을 다 포함하고, 열방은 이방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메시아는 유대인으로 오시지만 그로 인한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두루 미치게 된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9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하신 부탁이 “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이방 여자는 누군가로부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듣지도 못한 이를 믿을 수 없으며,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전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겔 2:7). 그뿐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딤후 4:2). 

우리는 사람 차별하지 말고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특히 인생에 어려움을 만난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곤고한 문제를 만난 사람들은 그 마음이 낮아져서 복음을 잘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삶의 문제는 그 사람에게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기회요 새로운 삶을 위한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 여자의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산 벌말 해변에 만 이천 평 넓이의 염전을 하는 강경환 권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강 권사님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여자만 권사로 세우지만, 감리교에서는 남자도 권사로 세웁니다. 강 권사님은 사고로 양 손목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변에서 신기한 물건을 주웠는데, 그것이 발목지뢰인 줄 알지 못하고 돌로 치며 놀다가 그만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양손을 잃었습니다. 

양손이 없으니 혼자서는 먹고 입는 것도 할 수 없고, 학교도 갈 수 없었습니다. 바깥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여러 번 농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으나 죽지 못했습니다. 10대 후반부터는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침 10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밤 12시가 넘어야 집으로 갔습니다. 아무하고나 시비를 하고 싸움질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렇게 절망 가운데 살던 강 권사의 인생이 바뀐 것은 교회에서 나누어준 ‘그루터기’라는 신앙잡지를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그가 본 글은 두 팔과 다리 하나가 없는 여자 분이 교회에서 강의도 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 때 강 권사님은 생각하기를 ‘이런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한번 믿어보자’ 그리고는 교회에 등록하고 주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불우한 자기의 처지를 탓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 권사님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두 손을 잃은 것은 이 손으로 나쁜 일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인 거 같아요. 만약 저에게 두 손이 있었다면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는 불량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환경에 너무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만약에 손이 지금보다 더 잘렸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전 정말 절망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글도 쓸 수 있고 혼자 밥도 먹을 수 있게, 정상인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강 권사님은 그 넓은 염전을 혼자서 다 관리할 뿐 아니라, 수입의 일부를 장애인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합니다. 두 손을 잃어버린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강 권사님은 그로 인해 하나님을 믿고 새 삶을 살게 되어 감사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 권사님처럼 인생의 위기를 만나서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 인생의 위기와 문제는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인 역할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를 만난 사람들이 다 주님께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면 예수님께로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지 못한 사람은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할 일은 주의 이름을 듣지 못해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절망에 빠져서 헤쳐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서 자살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도 가도 못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세상 즐거움이 아닙니다. 가나안 여자처럼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할 때 주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보고서 소리 질러 자기의 딱한 사정을 고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처럼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면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구할 수 있지만, 그래서는 주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이르기를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해야 응답 받지, 의심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 기도하는 것은 독백과 같습니다. 독백은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데는 아무 소용이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의 간구를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이 여자가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호칭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2장에 보면 
“1)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에도 공의를 베푸실 것입니다. 또한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했는데, 이 섬들은 지중해 연안의 이방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메시아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가나안 여자가 메시아에 대한 이 같은 예언을 알지 못했다면 감히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십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으므로 그 앞에 나아와 간구할 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무엇이 필요하면 제 부모에게 요구하지, 남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옆집 사람을 보고 떼를 쓰지 않고, 제 부모에게 떼를 씁니다. 떼를 쓰는 것은 제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하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매달리지 못합니다. 더구나 믿는 일로 시험이 다가오면 쉬 낙심하고 물러갑니다. 

주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을 때, 아마 그 여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일 이 분이 참으로 메시아라면, 도움을 구하러 나온 나를 이처럼 냉대하실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이 들만도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자는 그 힘든 순간에도,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주님의 말씀을 일단 긍정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자, 그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는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응답을 받기 원하시거든, 가나안 여자처럼 주님을 온전히 믿는 가운데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위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2)…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 21:)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5장에 보면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응답을 받은 것은 그가 우리보다 탁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주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선량한 사람인지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를 보시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십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소망의 메시지를 찾아내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여자가 믿음이 없었다면 주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낙심하고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개만도 못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면 제 딸이 온전케 될 것을 믿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낮춥니다. 창세기 18장 2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기 25장 6절에 보니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긍휼을 구할 때,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일거에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시험을 통과할 때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알고 찾아왔지만, 주님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그 여자가 소리 질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애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침묵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상대할 가치가 없을 때 침묵합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 욥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찌라도 신원함이 없구나”(욥 19:7)라고 탄식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침묵을 대하는 가나안 여자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자가 하도 끈질기에 하소연하자, 제자들이 나와서 “주여, 저 여자를 어떻게든 돌려보내시지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여자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애원했으나, 여자에게 돌아온 대답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언행을 대하면서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진심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금증은 곧 해소됩니다. 여자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시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방금 전까지의 냉정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없이 인자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대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일부러 여자를 시험하시기 위해 그같이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여자가 시험을 통과하자, 흉악히 귀신 들렸던 딸이 즉시 나았습니다. 주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을 때, 귀신이 그 딸에게서 쫓겨나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주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시험을 통해서 우리 믿음이 진실함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이 되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게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심각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불러 이르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독자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한 가지,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하듯이, 인신제물을 요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도 말하지 않고, 아침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뽑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하늘로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그 수양을 가져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창 22:16-18)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과해서 선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는 비결은 단 하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시험이 다가올 때 시험에 들지 않고 너끈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긍정적인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했을 때, 주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심으로 그 여자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즉시, 귀신이 떠나가고 그의 딸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삶의 문제를 만나서 기도하나 응답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이 되십니까? 점점 더 사정이 나빠져 갑니까? 당면한 문제에 집착하지 마시고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지만, 먼저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은혜를 부어주셔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끝까지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는 주님의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신 대로 모든 문제에 복된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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