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발과 아비가일 (삼상 25:1~8)

  • 잡초 잡초
  • 2260
  • 0

첨부 1


나발과 아비가일 (삼상 25:1~8)


 지난주에 삼상24장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삼상 24:5 절의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우리는 이 구절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적대자인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은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인데 마음이 찔릴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다윗은 ‘마음이 찔린다.’고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거지요. 
보통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겉과 속이 다를 때입니다. 
속에는 악한 마음이 있는데 겉으로 선한 체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리고 속에는 선한 마음이 있는 데 겉으로 악한 일을 저지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왕의 옷자락 벰이 양심의 가책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상해보십시오. 
호위병 하나 없이 홀로 용변을 보는 사울왕의 옷자락을 베는 순간입니다. 
다윗의 뇌리엔 사울왕에게 쫓기던 수없는 나날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불현듯 증오가 치밀었을 것이고, ‘죽여 버리자!’라는 살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도 인간인지라 사울왕에 대하여 그런 감정이 없을 리가 없었겠지요. 
만일 다윗에게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인간이 아닌 천사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구태여 이 사건을 취급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왕에 대한 증오와 살의는 다윗에겐 부정할 수 없는 실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해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울왕에게 손을 대는 것을 극구 피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시각, 그 자리에서 미움, 증오, 살의를 느꼈지만 그 감정을 극복하고 믿음에 따라 처신했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우리가 받은 교훈입니다. 

이런 태도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성숙된 교회이고, 여러분은 성숙된 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예가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을 자주 듣잖아요? 
‘기분 나빠 못 나가겠다.’ ‘상처 받았다.’ ‘재미없다.’ ‘언짢다.’ ‘섭섭하다.’ 
이런 말들을 꿰뚫고 있는 공통분모가 무엇입니까? 
‘감정’이란 단어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감정 때문에 금보다 귀한 믿음을 내팽개치지 마십시오. 
기분 때문에 자기 구원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믿음으로 감정을 극복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하는 중 이런 일을 겪을 때 꼭 다윗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1.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삼상 25장에는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다윗이 아니고 나발과 아비가일입니다. 
촌부에 불과한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44절에 걸쳐 의외로 길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이야기 속에 독자들에게 들려 줄 뭔가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발과 아비가일, 이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한 몸이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그 이름의 뜻만큼이나 깊이가 다른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부부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를 성경에 나온 그대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도피 중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연대기로 말하면, B.C. 1017-101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삼천의 양과 일천의 염소를 소유한 부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기 전에 그가 가진 재물을 먼저 소개하는 것은 그가 재물 외에는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발이었습니다. 
그가 양털을 깎을 때였습니다. 
양을 치는 사람이 양털을 깎는 것은 농민이 추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는 즐겁고 기쁠 때요, 인심이 후할 때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 그동안 수고한 목자들을 위로하고, 이웃과 나그네를 대접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규례를 잘 아는 다윗은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들판에 있을 때 당신의 목자들이 우리 신세를 적지 않게 졌소. 우리가 울타리가 되어 당신의 목자들과 양들을 보호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요. 당신의 목자들에게 물어보면 다 알 것이요. 마침 양털을 깎는다고 하니 내가 부탁 하나 하리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도피 중에 있으니 양식을 보내주면 고맙겠소.” 

이 요청을 들은 나발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 일하기 싫어 빈들거리고 노는 놈들이 많다던데.........음식이 썩어 내다버렸으면 버렸지 그런 놈들에게 줄 것은 없다.” 
이 말은 나발이 다윗을 정말 몰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죽인 다윗을 모른다면 말이 됩니까? 
평소 자신의 양떼를 지켜주던 사람을 모른다면 말이 됩니까? 
그것은 다윗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 말해버렸습니다. 
청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욕을 줬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다윗은 분노하여 부하들을 무장시켜 나발을 보복하기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나발의 종들 중의 하나가 이런 일련의 상황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나발이 다윗이 베푼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모욕을 줬다는 거지요. 
주인인 나발은 원체 완고한 사람이라 통 대화가 되지 않으니 안주인에게 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태가 매우 심각하니 급히 대처방안을 마련하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준비했습니다. 
집안에 보이는 대로, 손에 닿는 대로 급히 주워 모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걸음으로 내달아 저만치 오고 있는 다윗의 무리 앞에 엎드렸습니다. 
갑부의 아내가 돈 있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종이 주인에게 자비를 구할 때처럼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 나발은 원래 그 이름대로 산 사람입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그가 한 일에 대하여 개의치 마옵소서. 이런 일로 큰일을 도모하실 다윗이 손에 피를 묻혀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에 오점을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일에 잘못이 있다면 미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저에게 있습니다. 저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요기를 하실 수 있도록 조금 싸 가지고 왔으니 어서 부하들에게 나눠주십시오.” 

다윗은 아비가일의 민첩한 행동과, 지혜로운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33-34절입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찌며 또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여러분,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재미있지요? 

2. 그러면 무엇이 나발과 아비가일의 삶을 그토록 차이 나게 만들었습니까? 

본문 3절을 분석해보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A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B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B'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A'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삼상 25장 1절에 이스라엘을 지파동맹체제에서 왕정체제로 이양하는 일을 주도했던 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 사무엘의 사망 기사가 나옵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전환기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도자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암시합니다. 
물론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인물은 다윗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사무엘의 죽음에 뒤이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다윗이 역사의 전면으로 크게 부각될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달리 2절에는 다윗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인물은 먼저 큰 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2절을 읽을 때 새롭게 등장한 이 대단한 부자가 과연 어떤 인물일까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의 활약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독자들의 궁금증은 3절에서 바로 풀립니다. 
3절을 읽은 독자들은 기대는커녕 오히려 큰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인물이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말씀을 놓지 않은 독자들은 짙게 드리운 불안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제 보십시오. 
3절은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란 말로 시작됩니다. 
이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의 많은 재산 목록을 읽으면서 가졌던 기대감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놀랍게도 ‘나발’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발’이라는 말은 ‘시들다’(사 40:7), ‘쇠잔하다’(사 24:4), ‘미련하다’(잠 30:32)란 뜻의 ‘나벨’에서 유래하여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이름을 ‘미련한 자’라고 짓겠습니까? 
나발이란 이름은 그의 인격을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들을 별명을 지어 부르잖아요? 
“저 구두쇠!” “ 저 깡패 같은 놈!” 
‘나발’이 그 사람의 별명이었다면 그는 거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3절은 이어 나발의 아내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아비가일’입니다. 
‘아비가일’은 ‘아버지’(창 19:31)란 뜻의 ‘아브’와 ‘즐거움’(렘 48:33), ‘기쁨’(사 16:10)이란 뜻의 ‘낄’이 결합된 이름으로 ‘즐거움의 아버지’ 또는 ‘기쁨의 원천’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이름을 통하여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암시받게 됩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시대였던 고대 근동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밝혀진 것은 ‘기쁨의 원천’이란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왕 다윗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큰 기쁨을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3절 앞부분에서 남자의 이름이 나왔고, 뒤를 이어 그 남자의 아내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설명부분에서는 남자에 대한 소개가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아비가일에 대한 소개가 먼저 나옵니다. 
즉 성경은 가부장 문화권의 관습대로 가장인 나발을 먼저 소개하였으나, 이제는 인격적으로 우월한 아비가일의 성품과 자질 및 외모를 앞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총명하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뛰어난 지능으로 사태 파악력이 탁월하다는 의미도 있으나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느 8:8).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발의 성품과 행동양식 및 그의 출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아비가일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특히 ‘완고하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칠며 악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발은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게 되고,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은 다윗의 청혼을 받습니다. 

3. 여기에 나발과 아비가일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발은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합니다. 
왜 나발과 아비가일, 이 두 사람은 한 몸이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들일까요? 
왜 이 두 사람은 함께 인생을 살았으면서 그 이름의 뜻만큼이나 깊이가 다른 삶을 살았습니까? 
왜 부부가 한 사람은 망하고 한 사람은 흥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비가일의 태도가 어떠한지 그의 고백을 통하여 알아봅시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습니다. 
26절 “나리께서는 홧김에 기어이 피를 보려고 하시지만 야훼께서 그런 일이 없도록 막아주셔서 나리께서 손수 원수를 갚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28절 “이 계집의 말이 마음에 거슬리더라도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야훼께서 앞장서시는 싸움을 나리께서 싸우셨으니 야훼께서 나리의 집안을 정녕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29절 “나리를 쫓아다니며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나리의 하나님 야훼께서 나리 목숨을 보물처럼 감싸주시고 그 대신 원수의 목숨은 팔맷돌처럼 팽개치실 것입니다.” 
30-31절 “야훼께서 약속하신 온갖 복된 일을 이루시어 나리를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세우실터인데 이런 실수를 해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아비가일은 말끝마다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아비가일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합니다. 
아비가일은 “나는 죽어도 좋으나 다윗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바라보는 아비가일의 영혼을 보십시오. 
저는 삼상25장을 묵상하면서 창공의 별처럼 하나님을 향한 형형한 아비가일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복음성가- 오 신실하신 주 

1)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2)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니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공부를 못한 사람입니까? 
돈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시14: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비가일은 매순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흥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도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