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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주신 지혜 (약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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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지혜 (약 3:13~18)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책사 오성 이항복의 이야기입니다. 이항복이 열세 살이 되던 늦가을이었습니다. 감나무에 홍시가 먹음직스럽게 매달려 있는데 많은 가지들이 옆집 담 너머로 뻗어있었습니다. 하인을 시켜 따오게 했으나 옆집의 권참의 나리댁 하인들에게 매만 맞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항복은 세도 높은 권참의 댁 하인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로 마음먹고 찾아갔습니다. 이 항복이 집안에 들어서서 권참의 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돌연 팔을 뻗어 문창호지를 뚫고 주먹을 방안으로 들이 밀었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권참의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때 이항복이 "지금 창호지를 뚫고 방안으로 들어간 주먹은 누구의 주먹인지요?" "그야 네팔에 달려 있으니 네놈의 주먹이 아니냐!" "그렇다면 권참의 댁 담 너머로 뻗어있는 감은 누구의 것인가요?" 

그제 서야 권 참의는 눈치를 채고 어린 오성의 지혜에 굴복하며 "그야 물론 너희 집 감이지" 라고 인정하더랍니다. 그리고 훗날 이 이항복을 사위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해결해 할 문제들이 생깁니다. 이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 더욱 풍성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그 문제 때문에 큰 곤욕을 치릅니다. 낭패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지혜를 가졌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지혜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두 종류의 지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내려오지 않은 지혜 곧 세상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북한의 핵문제로 온 세계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핵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할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은 주변 여러 나라를 힘들게 합니다. 물론 자신들도 핵을 만들고 실험하느라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 핵 때문에 모두가 힘든데 단 하나 김정일과 공산당만 권력을 유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핵이 있습니다. 그 핵으로 발전하고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산화탄소와 같은 환경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며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주변 여러 나라에도 좋고 우리나라에도 좋습니다. 같은 핵인데도 어떤 핵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가 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지혜인데도 세상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는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라고 다 같은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라고 아무 지혜나 구하면 안됩니다. 지혜라고 아무 지혜나 사용하면 안됩니다. 북한의 핵처럼 그 지혜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피해야 할 지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지혜

본문 15절을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 가운데 위로부터 내려오지 않은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저마다 지혜를 타고 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하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서 지혜를 전수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 중에 태어나기 때문에 타고난 그 지혜가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죄악이 관영한 곳이기 때문에 그들이 터득하고 전수받은 지혜 역시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이렇게 온전하지 못한 세상의 지혜의 특성을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세속적입니다. 15절에 “땅 위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원어로 “에피게이오스”(Epigei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로 세상에만 집착하여 사는 세속주의적인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무관한 지혜를 말합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요 세상 한 복판에 만들어진 지혜입니다. 그래서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광을 나타내려하고, 인간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심하면 저 바벨탑을 쌓던 자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그 지혜를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피해야 합니다.

둘째, 정욕적입니다. 15절을 보면 “정욕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원어로 “프쉬키케”(Psykike)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성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합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피해야 합니다.

셋째, 마귀적입니다. 15절을 보면 “귀신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원어로 “다이모니오데스”(Daimoniode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귀 또는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의 특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마귀에 의해 그 행동과 생각이 지배받고 선동되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피해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지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자신의 사악한 욕망만을 부추기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혜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지혜는 무엇입니까? 

위로부터 난 지혜

본문 17절을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다른 지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혜의 특징은 그 출처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출처가 “위로부터”라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약 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말씀은 그대로 약속입니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면 주십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로 받는 것입니다. 고전 1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성령의 은사 가운데 첫 번째 거명된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가 성령의 은사로 사역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로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지혜로 역사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는 어떨까요? 세상의 지혜와 어떤 면에서 구별이 될까요? 이점은 우리가 지혜를 분별할 때와 지혜를 사용할 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깨끗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첫째 성결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우선적인 특징은 바로 성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결이라는 말은 원어로 “하그네”(Hagne)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순수한”, “정결한”, “책망할 것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더럽거나 불의하거나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행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기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바나바처럼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교인들의 존경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재산이 아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판 값 일부를 아무도 몰래 숨겼습니다.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한 것이니다.

성령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 사실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책망케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아나니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마음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또 다른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깨끗합니다. 오직 한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마음 하나뿐입니다. 거기에 다른 마음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출 28:36절을 보면 제사장의 복식 가운데 모자 부분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머리에 쓴 관 위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전면에 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패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머리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자를 항상 붙여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잔꾀를 부리면 안됩니다.

둘째,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편견이 없다”라는 말은 원어로 “아디아크리토스”(Adia -krit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혜를 발휘할 때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거짓이 없다”라는 말은 “아뉘포크리토스” (Anupokri -t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남들은 몰라도 진실되지 못하게 행할 때 양심에 거리낌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혜를 발휘할 때 진실해야 합니다.

미국 뉴욕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뉴욕 항 입구 리버티 섬이라는 섬에 세워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신상은 늘 먼발치에서나 보게 됩니다. 이 여신상을 자세히 보려면 배를 타고 이 섬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섬에 올라가도 그 높이가 무려 46미터나 되기 때문에 머리 부분은 밑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머리 부분이 매우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있답니다. 처음 이 상을 세울 때 사람들이 농담처럼 비웃었답니다. 어차피 머리 부분은 사람들은 볼 수 없고 다만 갈매기들만이 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공을 들여 조각할 필요가 있는가? 조각을 담당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것이 예술가의 양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봅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내가 압니다. 그래서 내 양심이 발동합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내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여기에 여러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화평”입니다. 원어로 “에이레니케”(Eirenike)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를 가져오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관용”입니다. 원어로 “에피에이케스”(Epieike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같게 여기는”, “관대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상대방을 나와 같게 여기는 마음으로 관대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양순”입니다. 원어로 “유페이데스”(Eupeide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순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고 유순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긍휼”입니다. 원어로 “엘레우스”(Eleu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불쌍히 여김”, “동정심”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한 열매”입니다. 원어로 “카르폰 아가돈”(Karpon Agadon)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선한 행위가 열매처럼 밖으로 나타나 보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다섯 가지 단어를 종합해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덕을 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대통령 재임 중에 권총 저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왼쪽 옆구리에 가벼운 총상만 입고 쓰러졌습니다. 구급차가 급히 달려오고 간호사들이 응급조치를 하기 위해 그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간호사들에게 “우리 낸시한테 허락받았습니까?”는 조크를 던졌습니다. 물론 간호사들은 “네! 이미 낸시 여사님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도착한 레이건은 수술 준비를 서두르던 의사들에게 “당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공화당입니까, 아니면 민주당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의사가 “각하! 오늘부터 열성적인 공화당원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위급한 상황 속에 대통령을 치료한다는 무거운 부담감 속에 긴장하고 있던 의료진을 위해 조크를 던진 레이건과 또한 조크로 응수하여 마음을 편안케 했던 의료진들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때 모두를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살아갈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지혜가 아닌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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