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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시 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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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시 24:7~10)

(시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1. 금년으로 6.25전쟁(한국전쟁) 59주년을 맞이합니다. 6.25전쟁은 북괴 김일성이 자신의 남침 야욕에 대한 구 소련 스탈린과 중공 모택동의 지원 약속을 받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일으킨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남한 적화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습니다.(북괴 김일성의 남침은 소련 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한국 전쟁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국 사망자가 20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사망자는 100만 명이 넘으며 그 중 85%는 민간인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습니다. 

이후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침을 위해 수없는 땅굴을 팠고, 청와대를 습격하고, 끊임없이 영토, 영해를 침범하여 양민학살 및 납치 만행을 서슴지 않았고, KAL 폭파사건, 미얀마 정부요인 폭파 암살 사건, 월드컵이 한창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 그리고 핵폭격 위협 등 이 모두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이 저지른 만행들이었습니다. 

특히 한심스럽고 우려되는 것은 서해교전 열흘전인 6월 18일 파이낸셜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 대해 “영리하고 솔직한 사람이며 한국과 세계 문제에 정통해 있다. 김정일은 끈질긴 개혁가로 북한을 냉전시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하고 있다.”는 말로 김정일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 서해교전으로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슬픔에 잠겨 오열하고 있을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 이유로 출국한 것입니다. 

일반 개인의 평범한 죽음과 전장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산화한 목숨은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고, 영해를 지키던 국군이 자그마치 6명이나 전사했는데, 영결식장에 일국의 대통령이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 국민들의 정서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모 일간지 사설(정용석, 단국대 교수)에 그릇된 시류(時流)를 바로 잡고자 하는 글이 올라 있습니다. <북한의 관영 언론매체와 권력기관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리명박 역도” “반역자” “살인자” “호전광” “도당”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대신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우익·좌익 할 것 없이 김정일을 언급할 때마다 꼬박꼬박 ‘국방위원장’ 또는 ‘위원장’을 붙인다. 기사 첫머리에서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직책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일 이름이 같은 글에서 반복될 경우 굳이 ‘위원장’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김정일에 대한 이미지가 ‘존경받는 위원장’으로 감정이입(感情移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손에 핵폭탄을 쥐고 남한 적화의 기회만 노리는 김정일에 대한 경계심을 해체하기도 한다. 한국 언론이 북한 관영 매체처럼 ‘김정일 위원장님’으로 ‘섬기게’ 된 데는 필시 까닭이 있다. 지난 10년간 친북좌익 정권에 의한 김정일 미화 작업으로 은연중 학습된 탓이다. 동시에 김정일에게 밉보이면 북한 방문취재를 거부당하거나 테러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작용한 듯싶다. 

북측이 이명박 대통령을 “반역자” “살인자”라고 막가는 판에 우리가 ‘위원장’으로 공손히 머리 숙일 필요는 없다. 상호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우리나라 통일부가 발행하는 ‘월간 북한동향’도 요즘엔 김정일에게 굳이 ‘위원장’을 붙이지 않는다. 북한은 반드시 “살인자” 같은 막말을 거두고 ‘이명박 대통령’으로 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위원장’을 빼고 ‘김정일’ 또는 ‘김’에 그치는 것이 옳다. 북한의 고약한 입버릇을 고쳐주고 통일이 되는 날까지 상호존중하며 공존공생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글을 보면서, 자살한 전직 대통령 분향소에 “리명박 살인자”라는 현수막이 걸린 시대상과 그 저의(底意)를 짐작해봅니다. 북괴 김정일은 한국 정부가 PSI, 즉 대량 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에 참여하면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여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북괴가 언제 다시 전면전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혜서인 전도서 9:11 말씀을 통해 이 나라 민족위에 ‘만군(萬軍, THE LORD ALMIGHTY)의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전 9:11-12) 내가 세상을 살펴보니 빨리 달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경주에서 언제나 일등을 하는 것은 아니며 강하다고 해서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생활비를 많이 버는 것이 아니며 총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부를 얻는 것도 아니고 유능하다고 해서 언제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불행한 일을 당할지 그 때를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이 사람도 갑자기 재앙이 밀어닥치면 거기에 걸리고 만다. 

북괴가 제2차 핵실험을 하고, 폭죽 쏘듯 무더기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그들 스스로 2012년을 시한으로 내걸고 있는 <강성대국> 건설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괴는 김일성 탄생 100주년인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대망의 해로 삼고 있습니다. 북괴가 생각하는 ‘강성대국’은 감히 다른 나라가 넘보지 못할 강한 군사적 힘, 그렇게 해서 그들 스스로 김정일 독재 세습체제를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북괴는 핵을 통해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 가장 싸게 드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사코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김정일의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 26살 아들 김정운에게 안전하게 독재 체제를 세습시켜 설사 강성대국을 이룩한다 해도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언제 뜻하지 않은 불행한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새가 덫에 걸리듯이 갑자기 재앙이 밀어닥쳐 멸망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분’은(전3:1-8)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은 B.C.1000년경,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법궤(언약궤)를 오벧에돔에서 예루살렘에 세운 성막에 들여올 때 찬양대와 백성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함께 불렸던 찬송시입니다.(사무엘하 6장) 그러면 왜 법궤가 그간 다윗 왕궁이나 성막에 안치되지 못하고 일반인 오벧에돔의 집에 있다가 옮기게 되었을까? 이 사건 50년전으로 거슬러 올가갑니다. 

B.C.1050년에 블레셋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군사 4천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모여 패전의 원인을 찾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블레셋 사람에게 패하게 하셨을까?’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여호와의 법궤를 전쟁터로 메고 나가면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분명히 우리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며 패전의 원인을 ‘하나님의 법궤’ 부재에 돌렸습니다. 다시 말해 패전의 원인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죄악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다시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섰지만 무려 3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또 다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패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불레셋 왕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전 안 ‘다곤’ 우상 곁에 두었습니다. 블레셋이 숭배하는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는 상징으로 그같이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다음날 의기양양하게 다곤 신전에 가보니까 놀랍게도 다곤 신상(神像)의 머리와 두 손목, 몸통이 동강나 널부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백성들에게 원인을 알 수없는 악성 종기가 무섭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재앙이었습니다. 이에 불길한 징조를 직감한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가 더 이상 이스라엘 신의 궤를 여기에 둘 수 없다. 이러다가는 우리 신 다곤과 함께 모두 전멸하고 말겠다.’ 며 온통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며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우리가 죽음을 면하자’ 고 결론 맺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다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온 법궤를 다윗이 왕궁으로 옮겨오고자 했는데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웃사가 옮기던 중 즉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를 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레위 족속이어야만 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법에 따르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다윗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더 이상 왕궁으로 옮겨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뒤늦게 다윗 왕은 법궤를 옮기던 웃사가 즉사한 이유를 깨닫고, 성막을 준비하여 레위 족속들로 하여금 법궤를 예루살렘 성막으로 옮기도록 했던 것입니다.(대상13-15장) 그리고 그 하나님의 법궤를 성막으로 옮기면서 찬양을 드리며 고백한 시가 오늘 본문 시편 24편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다윗이 왕에 즉위하고 즉시 하나님의 법궤를 왕궁에 마련된 성막으로 옮기고자 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臨在)와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자신이 받은 축복이 자신의 경건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은혜로운 통치의 결과로 주어진 것임을 확실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삼하5:10) 다윗 왕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대로 자신의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하5: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 왕은 하나님의 작전 지시대로 전승(戰勝)하여 엄청난 병력을 확보했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노획물 가운데 말의 힘줄을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당시 말은 최강의 전력(戰力)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의 힘줄을 모두 끊어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노획한 말로 군사력을 증강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 왕이 말의 힘줄을 끊어버린 것은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시대에 이르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것입니다. 

(신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다윗이 병거를 이끌 말들의 발 힘줄, 오금을 잘라 말을 절름발이로 만든 것은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행위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전쟁에 임했던 덕택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대상18:4-6) 그 병거 일천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메섹 아람 사람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을 죽이고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성도와 이 나라 민족이 되도록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중심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3. 오늘날 복잡한 세계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돈이나 권력 등을 처세(處世)의 제일가는 무기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오늘의 국내외 정세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어 그 판단과 처세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북괴 김정일의 속셈도 ‘철의 장막’에 가리워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계십니다. 

B.C. 845년경 아람 군대가 북 이스라엘을 침공하고자 했습니다. 아람 왕은 게릴라 부대를 미리 밀파시켜 곳곳에 배치하고 기습공격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그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번번히 노출되어 작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왕은 참모진들 중에 첩자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모든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반역자가 누구냐? 이스라엘 왕에게 우리 작전 계획을 알려 준 자가 누군지 말하라.’며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때 지휘관 중 한 사람이 ‘왕이시여,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말하는 것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모두 일러바치고 있습니다.’ 하고 상황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엘리사가 도단에 있는 것을 정보입수하고 엘리사를 생포하기 위해 그 밤으로 모든 병력을 급파하여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최강의 무기로 무장한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환은 엘리사에게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하고 두려워 외쳤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는데 그가 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아람 군대가 공격해 올 때 엘리사가 ‘여호와여. 저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눈먼 아람 군대를 생포하여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으로 유도하여 생포했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성에 들어갔을 때 엘리사가 ‘여호와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이 사마리아성 안에 생포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아람 군대를 보고 엘리사에게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하고 묻자 엘리사가 ‘그건 안 됩니다. 칼과 활로 생포한 전쟁 포로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그들의 왕에게 돌려보내십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자 그들은 실컷 먹고 마신 다음 자기들의 왕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선지자 엘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왕하6:8-23) 

이 땅에 있는 예수 믿는 성도들이 모두 엘리사와 같은 의인들이 되어 이 나라 민족의 “병거와 마병”(왕하13:14)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시는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는 군대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군대를 의지하기 보다는 이들보다 더 강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이 나라 민족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다윗 왕은 그래서 “(시3: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정책이나 사상이나 이념으로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베풀어지는 선으로 악을 갚게 될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33:10-22에서 이렇게 고백,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세상 나라들이 계획한 것을 좌절시키시고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열방의 도모를 폐하시고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그러나 여호와의 계획은 변함이 없고 그의 목적은 어느 세대에나 한결 같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가 복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이 복이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살펴 전 인류를 보시며 그의 처소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피신다. 여호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만드시고 그들이 행하는 일을 일일이 지켜보고 계신다. 군사가 많다고 해서 왕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며 용사가 힘이 세다고 해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승패가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아무리 그 힘이 강해도 그것으로 이길 수는 없다. 

여호와는 자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자들을 살피셔서 그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며 흉년에도 그들을 살리신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은 그가 우리의 도움이요 방패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희망을 둔 대로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고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 백성이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방패로 삼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나라 백성과 지도자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피시고 행하는 일을 일일이 지켜보고 계시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는 복된 나라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신28:1-7)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복잡한 세계 정세 속에,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통치가 말씀을 통해 나라 백성들과 자신의 삶에 이루어져 모든 대적들이 한 길로 치러 왔다가 패하여 일곱 길로 도망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라 백성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마지막으로,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나라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다윗 왕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피길에 올랐습니다. 도피하는 중 반란군에 이스라엘 최고의 전략가인 아히도벨이 가담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압살롬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도록 하기 위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고 그 보다 못한 후새의 모략을 택하도록 작정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하감하사 마음을 지으시며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시33:13-15)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삼하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결국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파기된 것을 보고, 분명히 다윗 정권 전복을 위한 반란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신변을 정리하고 자살해버렸습니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면 처형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살해버린 것입니다.

(삼하17:23)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고 후새의 모략을 선택한 반란군은 오래가지 않고 곧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다시금 왕위를 회복하여 이전보다 더욱 더 강력한 정권을 이룩하여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으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고 부국강병의 대국을 이룩했습니다. 다윗 왕은 일찍이 성전과 하나님의 법궤를 통치의 구심점으로 삼아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받았었습니다. 

“그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 주리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리라. 왕권을 영원히 견고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7:1-16)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다윗이었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받은 자손의 기도는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의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B.C. 853년경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남유다를 침략하려하자 여호사밧 왕이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대하20:6-12)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 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여호사밧 왕의 기도는 즉각 이렇게 응답되었습니다.

(대하20:15-17)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사밧은 응답된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찬양대만 최전선에 앞세워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는 찬양만 계속했습니다. 이 노래와 찬양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서로 공격하게 만들어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여호사밧 군대는 칼 한 번 휘두르지 아니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노획물만 거두는데 무려 사흘씩이나 걸릴만큼 엄청난 경제적인 축복까지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대하20:21-26) 

여호사밧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에게 약속된 축복이 기도를 통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입니다. 영육간에 모든 싸움에서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응답만 받으면 반드시 대승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한과 북한이 전쟁한다 해도 그 전쟁이 남한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나라 민족을 전복시키고자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압살롬” 같은 무리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삼하15:6)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그러나 아무리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반란을 꾀한다 해도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있다면 오히려 나라 민족은 이전보다 더욱 더 안정되고 부국강병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는 나라 민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나라 민족이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 점점 강성해지는 축복이 여러분과 나라 민족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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