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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눈을 열어주소서 (시 119: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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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열어주소서 (시 119:18~18)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시편 56편 4절에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고 했습니다. 시편에 나타난 율법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다는 것과 병행해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율법 즉 말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시 119:7, 12, 18, 34). 율법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시 119:5, 10, 29). 율법은 사람을 소생시킨다고 했습니다(시 119:50, 93).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시 119:14, 24, 62, 70, 162, 174). 
마침내 시편기자는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Ⅰ. 하나님은 인간에게 눈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보고 감탄하는 눈입니다(肉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보는 것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초목군생(草木群生)을 보고 감탄하는 눈입니다. 지구의 한대와 열대 지방과 온대 지방의 4계절의 변화를 보고 감탄하는 눈입니다. 색깔을 분별하고 원근과 명암을 구별할 줄 아는 육안(肉眼)을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이성의 눈입니다((理性眼).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성의 눈을 주신 것은 인간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①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벨은 전화를 발명하게 되었고 오늘의 화상전화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② 에디슨은 달빛을 보고, 번갯불을 보고, 밤을 밝힐 수 있는 전등을 만들었습니다. 
③ 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④ 난로에 얹어 놓은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증기의 힘으로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스티븐슨은 증기 기관차를 만들었습니다. 
⑤ 뉴턴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오늘의 우주 개발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의 거북이를 보고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자연 속에 짐승들과 곤충들의 보호색(Protective coloring)을 보고 군인들이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위장하는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는 탈옥죄수를 연상하면서 저 유명한 장발장을 썼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 음악가, 예술가, 과학자들은 이성의 눈으로 하여금 각자 자기 분야에서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이성의 눈이 열린 개인과 가정과 국가는 잘되고 부강합니다. 반대로 이성의 눈이 열리지 않은 개인이나 국가는 가난하고 불행합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성의 눈을 열기 위하여 살인적인 노력을 마다하지 아니합니다. 

3)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고 믿고 섬기는 눈입니다(靈眼).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 가지 눈을 주셨습니다. 지으신 만물을 볼 수 있는 육안과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이성안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온전한 눈이 됩니다. 이른바 이것을 문화적인 눈이라고 합니다. 
영안이 있어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의 존재의의와 목적을 알게 됩니다. 영안은 곧 신앙의 눈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영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감탄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시편 19편 1-4절에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영안이 있어야 인간 자신의 존재의의와 목적을 알게 됩니다. 신앙의 눈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눈입니다. 반대로 마귀의 눈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눈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마귀가 준 거짓된 눈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만물은 로마서 11장 36절에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입니다. 
워필드(worfield)는 "칼빈주의 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자."라고 했습니다. 

Ⅱ. 이 눈이 열려서 보아야 합니다. 

본문 119편 18절에 『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1) 눈이 열려야 생명샘물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19절에 『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고 했습니다. 
사라의 몸에서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이 출생한 후에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사라의 소생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사라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알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번민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난 하갈은 가죽부대에 물이 다했으나 물을 구할 수 없어서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고 방성대곡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샘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육안으로는 찾기 힘든 샘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사막 가운데서 물을 얻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22장 17절에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샘입니다. 

2) 눈이 열려야 임마누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에 『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고 했습니다. 
아람왕은 엘리사의 예언 때문에 이스라엘을 함부로 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람왕은 엘리사를 체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에워쌌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 일찍 이 소식을 엘리사에게 전했습니다(왕하 6:15). 엘리사는 겁에 질린 사환을 안심시키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6장 16절에 『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눈이 열린 사환이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왕하 6:17). 

3) 눈이 열려야 하나님의 진노를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2장 31절에 『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라고 했습니다. 
복술의 예물에 눈이 어두워진 발람 선지자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나귀의 예기치 아니한 행동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들고 발람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민수기 22장 23절에 『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을 꾸짖는 데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발람은 짐승과 더불어 쟁론하는 축상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22장 28-30절에 『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혔습니다(민 22:31). 

다윗의 인구조사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의지하는 인본주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다윗의 인본주의를 징벌했습니다. 
역대상 21장 14절에 『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사자에게 이 재앙이 족하다고 하시고 재앙을 거두라고 했습니다(대상 21:15). 
여호와의 사자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서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눈을 들어 본 다윗은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대상 21:9-17). 

Ⅲ. 눈이 열려 본다는 실제적 의미입니다. 

영안을 가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본다는 말입니다. 곧 성경의 세계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5절에 『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눈을 연다는 말과 마음을 연다는 말의 해석상 차이는 미미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에 『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의 모토 중에 하나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로마교가 너무 전통을 중요시 하고 당시 신비주의자들은 주관적인 계시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객관적인 표준을 설정한 것입니다. Sola Scriptura라는 '오직 성경'은 주격이 아닙니다. 물론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주격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탈격으로 '오직 성경을 통해서', '오직 성경과 더불어', '오직 성경에 의해서'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오직 성경과 더불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는 보편적으로 말씀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권적으로 주인이 되어서 성경을 가지고 친히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말은 결코 성령을 제외하고 성경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할 수 없습니다. 항상 성경과 성령은 병행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의 원리를 세우려면 성경과 성령이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지성주의나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그 실례가 종교개혁 이후에 지성주의는 계몽사조를 통해 합리주의 형태로 교회 안에 들어 왔습니다. 
이 합리주의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라이프 니치를 통해 등장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내적 지식을 중요시 하고 생각하는 자체와 존재를 일치시켰습니다. 
그러나 개혁사상은 이 원리를 허락하지 아니했습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 사상은 늘 합리주의를 경계해왔습니다. 
18세기 계몽사조의 원리는 이성이었고 이성이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사상은 이성이 왕이 되어서 모든 문화와 심지어 신학교에까지 침투했습니다. 

20세기의 칼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의 출현은 신학의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변증법이라는 것은 형식적 논리학을 초월하여 이성에 의한 판단이나 삼단논법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당한 판단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칼바르트 신학은 성령이 없는 신학입니다. 
신학의 원리는 계시의존신앙입니다. 신학의 원리에도 외적 원리인 일반계시와 내적 원리인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성경은 내적 원리를 더 요구하는데 그것이 결국 성령입니다. 따라서 신학의 내적 원리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믿음입니다. 즉 계시의존신앙(啓示依存信仰)입니다. 

이 신앙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성경만으로 충족하게 되고 성경만으로 능력이 나타나고 성경을 바로 이해하게 합니다. 
요한 1서 2장 20절에 『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 1서 2장 27절에도 『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고 했습니다. 

신학의 객관적 원리는 성경이고 신학의 주관적 원리는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성경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요 1:1).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의 모든 인격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서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육안이 열리고, 이성의 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라는 말은 먼저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깨달은 성경을 믿고 따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영의 눈을 열어 보게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사환의 눈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성경으로 인도하여 눈을 열어 성경을 보게 합니다. 
그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 성경은 곧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30-31절에 『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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