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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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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 (창 45:1~8) 
   
 
  
한 글 영 문 어릴 때 많이 읽었던 동화 가운데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개미는 무더운 여름동안에 열심히 일을 하여 추운 겨울동안 먹을 양식을 많이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노래만 부르면서 여름을 지냈고, 겨울이 되었을 때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개미에게로 가서 구걸을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기독교적으로 패러디한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개미는 무더운 여름동안에 너무 일을 해서 허리 디스크에 걸렸습니다. 디스크를 치료하기 위해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 보고, 디스크에 좋다고 하는 약은 다 먹어 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모아 놓았던 재산만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던 개미에게 친구가 찾아와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허리 디스크도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양식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여름을 지낸 베짱이는 그 해 가을에 음반을 내었는데, 이것이 대박이 난 것입니다. 앨범이 천만장 이상 팔렸고, 미국 빌보드차트, 일본 오리콘차트, 영국 UK차트 등에서 1위에 오르는 세계적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그의 마음은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술과 마약에 중독 되어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으며, 부와 명성도 점점 잃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짱이는 개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갔고, 개미의 전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지만, 실제로 개미와 베짱이 같은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일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고, 그 어떤 일도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모든 것들을 은혜의 눈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내 공로와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죄 많은 삭개오, 허물 많은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 공로 없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달렸던 강도도 주님의 은혜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는 복을 약속받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삼십 팔년 된 병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 열 명의 나병환자들 모두 다 주님의 은혜로 나음을 얻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위로받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우리가 이 세상을 건강하고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나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도 ‘오직 은혜’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 물질, 과학, 도덕 등이나 인간의 노력에 의지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더욱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어찌 우리의 힘으로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수성가’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공허해질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참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삶을 살았던 분들이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도 하나님의 은혜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시간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은 삶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창세기 37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50장까지 나옵니다. 그 가운데 본문 말씀은 요셉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노예로 팔아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들의 앞에 앉아 있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들끼리만 비밀로 지켜왔던 일이 이제 다 드러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한탄스러워겠습니까? 그들은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하면서 근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모습을 보세요. 형들을 만난 기쁨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고 했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구덩이에 던졌던 일, 미디안 상인들에게 자신을 은 이십에 노예로 팔았던 일을 요셉이 다 잊어버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기억 속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요셉이 과거에 매여 있었다면,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웃었겠지요. 그것도 크게 말입니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그 동안 내가 받은 고통과 치욕을 반드시 갚겠다고 벼르고 있었을 것인데, 형들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설사 복수심까지는 아니라도, 형들에 의해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가운데 있다가, 형들을 만났을 때 그 상처가 다시 곪아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집니다. “형님들, 그 때 왜 그러셨어요? 왜 저를 죽이려고 했으며, 왜 저를 노예로 팔았나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요셉은 과거에 얽매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셉이 과거에 매어 있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 말씀을 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또 8절을 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되어진 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는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 과거에 얽매어 있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과거에 매여 있는 요셉의 형들을 보세요. 창세기 50장에서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요셉을 찾아옵니다. 찾아온 이유는 요셉이 혹시 형들을 미워하여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이라 하면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 50:17) 그러면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창 50:18)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 내려와 산지 1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요셉이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형들이 얼마나 측은히 여겨졌겠습니까? 그래서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받은 과거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때 왜 그랬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은 과거가 있는 분도 계십니까? 사실 저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묻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묻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43장 18~19절에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은혜의 쟁기를 잡고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얽매어 있던 삶에서 벗어나 내 삶 가운데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은 현재에 충실한 삶입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세겜에서 양들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있는지 찾아가 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형들보다 더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셉도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겜으로 형들을 찾아갑니다. 세겜은 야곱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던 헤브론 골짜기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지점에 있는 곳입니다. 세겜에 도착해 보니 형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간 뒤였습니다. 그러면 그냥 집으로 돌아와도 될 터인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수소문 해보니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약 30km를 더 가야 하는 곳입니다. 또 다시 요셉은 도단으로 갔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한 요셉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뿐 아니라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실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팔려온 비참한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집 생각만 하다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자기가 맡은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였고, 이로 인해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가정 총무가 됩니다.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9장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요셉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에 신실했고 충실했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형통한 은혜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의 이러한 믿음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서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로 인해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요셉의 믿음과 신실한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9장 21절에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에게는 삶의 형편이나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현재 주어진 일에 충실할 때,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우리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 7~8절에서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내가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가정에서 충실하십시오. 직장에서도 충실하십시오. 또한 교회에서도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은 미래를 소망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꿈꾸는 자였습니다. 그가 꾼 꿈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그는 형들에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이 어릴 때 꾸었던 꿈은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의 꿈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50장 24절의 말씀을 보면, 요셉이 죽기 전에 형제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면서 25절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이장할 것을 유언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 왕 다음으로 모든 권한을 가진 총리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을 살았지만, 그는 결코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유언은 이 약속의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2절에서도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실로 요셉은 애굽에서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이 소망은 400년간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속에서도 ‘가나안 언약’을 잊지 않고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냈던 이스라엘의 민족정신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가나안’,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씀하는 것 같이 우리는 불쌍한 인생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래를 소망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삶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 비유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고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 부리지 마십시오. 

제가 어릴 때 놀던 놀이 가운데 땅따먹기 놀이가 있습니다.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많은 땅을 차지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면 엄마가 부르십니다. 그러면 다 내버려두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다 내버려두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거듭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한 초등학교 도덕(슬기로운 생활)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났습니다.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한 아이가 이렇게 답을 썼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현재의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나온 인생을 뒤돌아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 땅에서의 남은 삶 가운데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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