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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요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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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요 3:1~5)


(요3:1-5)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1.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소수일지라도 진리 편에 사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민”으로 택하실 때,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7:6-7)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출애굽 후,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모세의 형 아론에게 몰려가서 불평을 터뜨리며 이렇게 압박합니다. ‘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낸 이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소식이 없소’ 아론이 백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자 백성들이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너의 신이다.!’고 외치며 우상숭배에 날뛰기 시작합니다. 

이를 모르실리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급히 내려가거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네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명령한 것을 벌써 저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며 제사를 지내고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너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이제 네가 나를 말릴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내가 분노하여 그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대신 너를 통해 큰 나라를 세우겠다.” 

한 마디로 200만 명이 넘는 백성일지라도 ‘싹 쓸어버리고 대신 모세 너를 통해 새로이 하나님의 성민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 우상숭배로 난장판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설 사람은 내게로 나아오라’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출32: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그래서 레위 사람들은 모세가 명령한 대로 자기 친구이든, 형제이든, 이웃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우상숭배에 가담했던 자들을 가차 없이 도륙해버렸는데 그 날 죽임을 당한 사람은 3,000명 정도였습니다. 

그때 모세가 레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과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여호와께 헌신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하실 것입니다.’(출32:29)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수라고 해서 불의와 불법을 용납하시고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12명을 선정해서 보냈습니다. 이들이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그 곳에 가 보니 정말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람들마다 건장하고 최강의 무기로 훈련된 병력과 성마다 철벽같이 요새화되어 있었습니다.’ 이같은 보고에 백성들이 요동하기 시작하자 갈렙이 나서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자,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용기와 믿음을 가지도록 하자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군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고 반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탐지한 땅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며 이렇게 선동합니다. ‘그 땅에는 전투에 뛰어난 군사가 수두룩하여 그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같이 보이는 형편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12명의 정탐군 중 절대 다수인 10명의 정탐군의 이같은 ‘악평’과 선동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밤새도록 촛불을 켜고 울부짖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여호와가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날에 죽게 하려는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다 잡혀갈 바에야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모세를 탄핵하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선동합니다. 

10명이라는 다수의 정탐군의 이같은 왜곡 선동에 민족 전체가 발칵 뒤집힐 지경이 되는 것을 본 갈렙과 여호수아가 옷을 찢으며 거듭 가나안 땅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보고하며 용기와 믿음을 가지도록 호소하며 격려합니다. ‘우리가 탐지한 땅은 아주 좋은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여 기름지고 비옥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 땅 사람들은 우리 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미 절대 다수에 의해 선동된 군중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마저 돌로 쳐 죽이려고 폭력을 휘두르며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가 성막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이 사람들이 나를 멸시할 작정이냐? 내가 그들 가운데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도 언제까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작정이냐? 내가 무서운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죽이고 너를 통하여 그들보다 더 크고 강한 나라를 세우겠다.’ 

이에 모세가 간곡하게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횡포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 편에서 믿음과 용기를 가지도록 백성들을 설득했던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 땅을 절대로 보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을 멸시한 자도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결국 모세의 지시를 받아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허위 보고로 백성들을 충동하여 모세를 원망하며 탄핵하려했던 그 10명이 정탐군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받아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살아 남았습니다.(민수기14장) 이를 두고 고린도 전서 10:5-8에서 이렇게 기록하여 거울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고전10:5-8)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민주주의 정치를 다수 여론에 의해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하기 때문에 ‘여론정치’라고 합니다. 여론이란 어떤 공공의 문제에 관한 다수 국민의 공통된 의견이나 요구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참다운 민주정치, 즉 여론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국민에게 널리 전달되어야 하며, 둘째 이러한 정보에 대한 정확한 해설과 자유롭고 책임있는 비판이 이루어져야 하고, 셋째 모든 국민이 정확하게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사회 전체의 복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판단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문·라디오·텔레비전 등언론 매체가 사실을 보도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비평을 하면 문제가 없지만 거짓과 왜곡과 편향된 시각으로 보도하면 잘못된 정보에 의해 잘못된 여론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언론 매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왜곡된 보도나 흥미위주의 선정적 보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사가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국가나 자신이 지지하는 기업이나 단체에 유리한 보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도 주로 언론사가 실시하는데 질문하는 문항의 문체와 의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 있습니다. 결국 언론사의 객관적인 보도, 정부의 불개입과 불간섭, 기업의 언론사에 소유 및 영향력 행사 자제, 국민의 바른 정보 수집과 냉정한 판단, 공정한 여론조사, 정부의 여론에 대한 합리적인 정책 반영이 없이는 바른 여론정치가 실행될 수 없습니다. 사회에 많은 이익집단이 있고, 계층 간 불화도 심각하며, 언론사의 이기주의와 정부의 간섭과 기업의 영향력과 국민의 무관심이 심해 어느 나라에서나 바른 여론이 형성되기는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러나 여론을 너무 의식하면 약체정부를 면치 못하고 중우(衆愚)정치의 위험도 따르기 때문에 여론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부가 정의와 공의에 입각한 정치에 대한 소신을 국민 앞에서 피력하여 여론을 지도하거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 당시 10명의 정탐군처럼 그릇되고 왜곡 보도에 따라 형성된 여론으로 인해 자신과 더불어 민족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거울삼아야 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재판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출23:1-2) 너희는 헛된 소문을 퍼뜨리지 말며 허위 증언을 하여 악한 사람을 돕지 말아라. 너희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고 법정에서 증언할 때 대중의 편이 되어 허위 진술을 하지 말며 소송 문제를 다룰 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아라.

법을 집행하는 기관은 여론의 향배를 살피면서 구속수사 여부를 결정하거나 재판의 형량을 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위 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정해진 법대로 집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론에 의한 정치, 여론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진실과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 진리와 공의가 통하는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Nicodemus)는 그 이름이 ‘민주주의’(democracy)를 뜻하는 ‘데모크라시’와 동의어입니다. 먼저, ‘니고데모’에서 ‘니고’(Nikos)는 ‘승리’, ‘지배’ 등의 뜻입니다. 그리고 ‘데모’(demos)는 ‘국민’, ‘대중’의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백성의 뜻을 받들어, 즉 여론을 받들어 백성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 민중을 주체로 삼아 민중을 등에 업고 백성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민주주의’(民主主義, democracy) 역시 ‘데모스, demos(국민, 시민단)’와 ‘크라투스, kratos(지배,권력)’의 두 낱말이 합친 것으로서 ‘국민의 지배’, 즉 다수 여론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그 이름 뜻이 ‘민주주의’,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유대 사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이름과 같이 이스라엘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열심에서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또한 신자 하나를 얻기 위해 산이나 바다를 다니며 전도하는’ 바리새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치가였으며, 또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가 비록 밤이긴 했지만 사회적인 지위나 가문의 배경이나 어느 모로 보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예수를 찾아와 예수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랍비’, 선생님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할 만큼 나름대로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한 밤 중에 예수께 와서 “(요3:1-2)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선생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라며 감격과 감탄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니고데모에게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에 대한 니고데모의 인식과 평가는 제쳐 놓으시고 ‘네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든 바리새인이든 상관없이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니고데모’, ‘데모크라시’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니고데모의 마음이 청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청결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3)는 말은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죄인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더러운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2:22)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음으로 나의 더러운 죄가 용서되고 깨끗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 사실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1-5)

여기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은 바로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일편 단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의 마음을 가지고 일편단심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지며 정죄할 수 있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결한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 그의 성품으로 거듭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인격,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보여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으며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 최고의 신분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청렴결백하다거나 율법적으로 꺼릴 것이 없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의 기준으로 의롭다는 것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구원받을 수 없는 불행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환한 대낮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대낮에 찾아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고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다는 것은, 그가 아직은 예수보다 대중(大衆)의 평가에 더 예민하다는 증거이고, 혹시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하는 정치가적인 기질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여론을 의식하는 거듭나지 못한 정치인이며 바리새인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론 정치의 대가로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아니했다면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의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는 말씀 외에는 달리 해주실 말씀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여러 기적들과 능력들을 볼 때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신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런 정도의 능력이라면 백성들의 원하는 바를 능히 채워줄 수 있으며, 만약 그러한 예수께서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나 후원자가 된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그만큼 더 넓어지지 않겠냐는 복안(腹案)에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일종의 기적과 능력을 두루 갖추신 예수께 대해 정치적 흥정을 숨기고 토해낸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깊은 곳, 마음 중심을 정확히 보시는 예수께서 쓸데없는 권모술수(權謀術數)를 피우지 말고 ‘거듭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거듭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분명히 말해두지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육체에서 난 것은 육체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너는 다시 나야 한다는 내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와 같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바로 변화에 있음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한 마디로 무가치한 인생입니다. 예수께서 ‘거듭나는 방법’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세례’를 말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은 말씀으로 된 것.”(벧전1:23) 이라고 증거했습니다.(엡5:26,약1:18) 

또한 이렇게 말씀으로 거듭나게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흑암과 혼돈 가운데 빛을 창조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은 지금도 죄와 죽음의 흑암가운데 혼돈된 삶을 사는 인생들을 재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나라와 민족의 생명은 경제나 정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부강한 나라일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나라는 영적 생명이 없는 죄인들의 나라일 뿐입니다.

 예수 없는 나라 민족은 죽은 민족이요 죽은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부요하지 않은 경제는 아무리 많아도 가난한 경제일 뿐입니다. 예수 진리가 없는 정치, 제도는 아무리 개선해볼지라도 변화의 생명력이 없습니다. 예수 진리가 없는 사랑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어서 변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개인이든 나라 민족이든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 당시 권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해서 온갖 수단방법과 협박으로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되시는 예수에게서 어떠한 죄목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민중을 선동해서 반란을 꾀하고, 납세를 거부토록 선동했으며, 자신을 왕으로 내세웠다는 등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터무니없이 정치적으로 날조, 왜곡시켜 로마 당국에 고소했습니다. 로마 당국자도 예수를 심문했지만 전혀 죄라고 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그야말로 무죄석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당국으로부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군중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도 살인범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선동한 것입니다. 

(막15:11-15)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결국 ‘여론의 덫’에 걸린 군중들과 빌라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여론 정치가 승리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론에 등 떠밀려 예수를 십자가에 내준 빌라도는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나 비참한 말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여론 정치로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무리들은 결국 A.D.70년 로마 디도 장군의 침공으로 나라 민족이 함께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론에 밀려 끝장 나는듯 했던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하고 있습니다. 여론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 사울이 다윗과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다윗을 정적(政敵)으로 몰아 죽이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살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왕이 된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생활로 승승장구, 점점 강해지는 축복을 받아 형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거듭나라’는 말씀을 들었던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장에 등장합니다.(요19:39)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유향 섞은 것100근을 가지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행동은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한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는 공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따랐던 그 수많은 무리들은 어디로 갔으며 그의 능력으로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갔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소리없이 뿔뿔히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자기의 장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공개하는 행동으로 예수님의 장례식장에 니고데모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으로 니고데모의 삶에 역사한 것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니고데모의 심령에 역사하여 그 ‘데모크라시’, 정치인 니고데모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할 수 없어 그 귀한 몰약과 유향을 준비해서 장례식에 공개적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변화된 모습이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예수 믿고 성령과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며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니고데모>들이 성령과 말씀으로 하나님께 좋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니고데모>들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갈1:10) 이 나라 민족이 ‘예수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니고데모>들로 충만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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