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 잡초 잡초
  • 646
  • 0

첨부 1


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1992년도부터 우리교단총회는 6월 둘째 주일을 순교자기념주일로 정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순교라는 말이 우리시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시대라고 해서 순교적인 신앙 없이도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과 신앙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가? ‘기독교의 정체성’,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 스데반은 당시 주류였던 유대종교 하에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인 일곱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그를 심문했고, 신성 모독죄로 정죄했습니다. 산헤드린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해 보라는 요구에,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특별히 세 인물—아브라함, 요셉, 그리고 모세를 거명하면서, 유대종교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fms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해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과 유대종교 당국자들, 유대인들이,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악을 고발합니다. 

그 결과 산헤드린 당국자들과 유대종교 지도자들, 유대인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 왜 그들이 마음이 찔렸을까요? 그들의 전통과 신앙과 율법주의가 스데반이 해석하는 것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지요/ 역사관이 달랐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분노합니다. 분노로 끝나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城 밖으로 내친 후에, 돌로 쳐서 죽여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원형적인 그림’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겁니다(本, 옷을 만들 때). 기독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인 됨이 무엇을 말하는지?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가 그 원형적인 그림을 보여줍니다. 본을 대보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세상과는 뚜렷한 대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언해 줍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는, 유대당국인 ‘산헤드린공회’와 ‘스데반’과의 뚜렷한 대조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54절 말씀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스데반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한 설교)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합니다. 그러나 55절을 보면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그러나, de. ]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여기, 산헤드린 당국자와 스데반 사이에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눈에 확 띕니다. 한쪽은, 마음에 찔림을 받지만 회개하기는커녕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차 격분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성령이 충만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를 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보고”(55).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세상과는 언제나 뚜렷한 차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언제나 분명한 차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성과 대조성이, 참 기독교 됨과 참 그리스도인 됨을 말해줍니다. 그 차이성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 차이성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진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큰 차이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세속가치가 교회 안에까지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어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이나, 품격, 행실, 외양까지도 모든 영역의 기준점이 너무 낮아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과 다른 복음의 가치와 복음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을 둔 이방인들의 관심거리를 이야기해야만 호소력이 있고, 매력을 느낍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정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점이 없으니, 세상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왔던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先生이었던(國師)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 12) 당시 유대종교는 하늘의 일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세속화 되어 있었던 겁니다.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할 정도로 타락한 종교였습니다.

저는 세계적인 고봉을 오르는 산을 타는 산악인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죄다 읽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최근 주간조선에 히말라야 14좌 등반 도전에 나선 여성 산악인 오은선 대장 이야기). 해발 8,000m 山은 어떤 세상일까요? 해발 200m 고도(서울)에 사는 우리로서는 고도 8,000m가 어떤 世上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해발 8,000m 고봉에서는 보통, 사람의 생각이 마비돼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손에 음식을 쥐어줘도 입에 넣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훈련된 산악인이라도, 손가락 하나도 들어올리기가 힘들고, 걸음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괴롭고, 숨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의 말에 의하면 해발 5,000m 이상은 신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상에 가서도 올랐다가 바로 내려와야 한다고 합니다(征服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지요).

▶ 2001년도 9월 월간조선에, 세계최고의 험산 K2봉(8,611m)을 등반한 우리나라 등반대원들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 모든 등반대원들이, 한결 같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등반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頂上에 오르는 일입니다(8,611m). 등반대원 어느 한 사람 예외도 없이, 頂上이 확고부동한 동일한 목표였습니다. 저는 그 사실이 사뭇 놀라웠습니다. (2) 8,611m 고봉 K2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그냥 무조건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베이스캠프(5,400m)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정상까지 네 캠프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1C-2C-3C-4C-頂上).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어려운 정상에 기어이 오르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頂點이 없습니다. 정점을 잃어버린 지 이미 너무 오랩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그저 세상사람들처럼 세속적인 복 받고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長成한 分量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분명한 푯대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목표는 첨부터 없습니다. 그저, 베이스캠프에서 맴돌며 정상을 바라다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스도 道의 初步인 베이스캠프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믿음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셨던 분입니다. 유대종교의 율법주의, 외식,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매사에 세상과 더 다르셨던 분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않았습니까? 역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 17).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고, 새로워진 피조물이고, 새 것입니다. 스데반과 산헤드린공회원들과의 차이가 바로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차이이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한 스데반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de. ]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합니다(55절). 공회원들에게는 성령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항상 성령께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육으로 난,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은 󰡔보는 것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언해 줍니다. 똑같은 사물과 동일한 역사와 동일한 사건을 보아도, 뚜렷한 시각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기독교는, 역사와 사건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세상의 시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세상 사람들이 보는 방식과는 뚜렷한 인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종교 당국자들인 산헤드린공회원들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행위, 율법주의가, 하나님 경외함이고, 믿음이고, 정당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와 그들의 신앙과 행위, 유대종교의 불의함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그들과는 역사를 보는 관점이, 신앙을 이해하는 관점이, 삶을이해하는 관점이 완전히 달랐던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각의 차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자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의 세계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보는 것이 달랐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땅의 것을 보고, 한 사람은 하늘을 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지 않습니까? “보라, 하늘이 열리고 人子가 하나님 우편이 서신 것을 보노라”(56). 하늘을 보는 사람과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만 보고 사는 사람은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데반과 같이 하늘의 세계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그 말씀이, 진리이기에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십니까?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고백이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말들이 내 삶을 다스리는 기준이십니까? 

▶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54, 57, 58말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城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산헤드린공회원들이 가진 영은, 육에 속한 영입니다. 성령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포악합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쳐 돌로 쳐 죽입니다. 끔찍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극도로 부당했습니다. 비정했습니다,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은 殺人의 영이었습니다.

“[그러나, 헬. de]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합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뭐라고 부르짖습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9-60).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자비와 긍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問安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異邦人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3-48).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입니다. 독일의 히틀러 나찌즘에 항거하다 순교한 D. Bonhoeffer는 [나를 따르라(The Cost of Discipleship)]는 책에서, 독일교회들에게 호소합니다. 나찌의 박해와 사회적 不意 앞에서도 타협할 줄 모르는 용기 있는 󰡔값비싼 믿음󰡕 가지기를 호소했습니다. 불의 앞에서도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값진 제자의 삶이며, 참 그리스도인 됨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순종 없는 은혜요, 십자가 없는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무시하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값비싼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고, 하나님 나라 복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따름이라 했습니다.

순교신앙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순수 종교적인 순교가 있습니다(주기철 목사님). 종교—정치적인 순교도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인 책임을 강조하면서 신앙고백적인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죽음입니다(D. Bonhoeffer, M. Luther King). 그런가하면, 종교—사회적인 봉사적 순교도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쥬세페 풀리시(Giuseppe Puglisi) 신부 같은 분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교구를 맡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회봉사활동을 합니다. 특히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피아들의 폭력에 굴종하지 않는 저항운동을 이끌다가 마피아가 쏜 총탄에 쓰러져 목숨을 잃습니다.

▶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분당 샘물교회의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 팀과 같은 무모한 선교방식에 인한 억울한 희생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순교자체보다, 순교적인 삶이 더 소중합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신앙과 죽음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차이성에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 속에서 책임적인 존재로서, 순교적인 삶의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제奠祭와 같이 다 쏟아 부어 드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