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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알의 밀알 (요 1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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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알 (요 12:23~26)
  

성지순례를 위해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전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총 들고 있는 군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늘 긴장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출입이 통제되는 곳도 있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해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아랍 자치지구 그리고 유대인 관할지역이 있습니다. 

그 지역을 지나가려면 검문을 받아야 합니다. 
가방을 다 열어 보여주어야 합니다. 
혹시 불순한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방을 놓고 화장실에 다녀온 분이 있었는데, 자기 가방에 손을 못 대게 합니다. 
주인 없는 가방은 일단 폭발물이 들어있는 것으로 의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왜들 이러는가?” 깊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혹시나 누가 우리를 죽이지나 않을까? 우리의 재산을 빼앗지나 않을까? 
우리가 사는 땅을 빼앗고 우리를 내 쫓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다 나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어느 누가 가만히 당하기만 하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며, 
다른 면에서 보면, 비겁하고 용기 없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더 든든한 성을 쌓기도 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지금 북한이 핵 개발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 살겠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 건드리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겁니다.

자, 이와 같은 무한한 생존경쟁과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모두가 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무엇이 가장 안전한 길일까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은 내가 죽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음이 영광일 수 있습니까?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이 영광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예수님의 죽음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 대속적인 죽음입니다. 
그냥 나이가 들어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입니다. 
남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은 것입니다. 
온갖 희롱과 조롱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으로 맞으셨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셨으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탈진하여 쓰러지셨으며, 발길로 채임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결국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으며,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기도 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의 죽음보다도 더 비참하게,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 십자가 고통 당하사 버림받고 외면 당하셨네. 
짓밟힌 장미꽃처럼 나를 위해 죽으셨네. 나의 주.(ⅹ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예수님은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그러나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천군 천사를 대동하여 그들을 박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그런 힘을 발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대책도 없이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피 흘리며 쓰러지십니다. 
그 십자가를 묵상하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우리 맘 같으면 속 시원하게 그들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저들이 몰라서 저럽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무엇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닙니다. 어리석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죄를 짊어지셔야 하기에,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하기에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억울한 죽음이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왜 이 죽음이 영광일까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밀알의 비유입니다. 

24-2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더욱 더 무장해야 하고, 철옹성을 쌓아야 합니다. 
나를 위협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하고, 인정사정 볼 것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겁에 질려 벌벌 떨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는 나를 공격할 꿈도 꾸지 못하도록 기를 꺾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속적인 힘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모두가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망하는 길입니다. 가장 비참하게 되는 길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어야 모두가 사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루살렘에서 서로 총을 들고 경계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왜 십자가이어야 하는지 보다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 외에는 이 갈등을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자 하면 모두가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죽지 않고 나만 살려고 하면 결국은 모두가 죽게 되는 겁니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지면 죽어야 싹이 나고 잎이 나며 꽃을 피게 됩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있으면 언제까지나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3천년이나 된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이라에는 씨앗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그 오랜 세월동안 보존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이 오래된 씨앗을 심으면 과연 싹이 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그 씨앗을 심었을 때, 싹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 속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3천 년 전에 땅에 심어졌더라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3천 년 동안이나 그 씨앗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수많은 열매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일들은 모두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희생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희생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눈물과 인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에게나 희생이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 희생을 치를 때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이 영광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생을 외면합니다.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이제 우리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위하여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영혼이 구원을 받으며, 공동체에 변화가 일어나며, 
역사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 아무런 희생도 치르려 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죽을 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인 무장공비를 아들로 삼으신 분입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죽은 아들이 생각났을 텐데 그것을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세상에 이렇게도 바보스러운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원수를 사랑으로 품다니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손양원 목사님은 바보가 아니라 우리의 영광입니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우리 기독교인의 모범입니다. 
저는 손양원 목사님을 기념하는 애양원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그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저를 멈추게 했던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당시 한센병 즉 문둥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았는데
한 어린이의 발에서 흐르는 고름을 제거하기 위해서 
손 목사님이 입으로 빨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저는 숨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원수를 아들로 삼은 것은 한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평소 무한한 사랑을 실천했던 그분의 삶의 스타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이 사신 사람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 사람은 바로 자기희생의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역사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의 희생적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희생을 결단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십시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섬기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섬겨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진정한 영광은 바로 희생 그 자체에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몸무게가 채 40Kg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체구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몸으로 시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시작은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을 모셨습니다. 
그분의 소대변까지 다 받아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래서 그 시댁의 종중에서 효부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구청에서도 그 소식을 듣고 효부상을 주었습니다. 
그 권사님에게는 지체장애를 안고 있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 아이 하나를 키우는 일도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 있는 시설을 다니면서 봉사를 합니다. 
구청으로부터 3천 시간인가 자원봉사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 권사님은 교인들 심방 가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교회에서 전화만 오면, 김치를 하다가도 놓고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쓰시겠다는데 오라할 때 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초상이 나면 그분은 거의 언제나 나타납니다. 
그냥 조문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장례식에 참석하고 장지까지 따라갑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거의 가장 늦게까지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기도의 용사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똑같지는 않겠지만 
이런 충성스런 일꾼들이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분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봉사가 오늘 우리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번 찬양제가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한 찬양제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전화를 돌리고, 음식을 준비했던 
각지회의 회장님들과 헌신한 일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회장님과 총회 임원들의 기도와 헌신도 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모든 아름다운 일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낙심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전쟁에서 한 병사가 총에 맞아 참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우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일이 있겠니?” “없어. 난 죽어가고 있는 걸.”
“그러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누군가에게 전해 줄 말이 있니?”
“그래 이 주소의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해 줘. 
나의 마지막 순간에 어렸을 때, 
그분이 나에게 가르쳐주셨던 것들이 나의 죽음을 도와주었다고 전해 줘.”
그 사람은 죽어가는 병사의 옛날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 말이 그 교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아무런 보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몇 년 전에 주일학교 교사는 그만두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여러분!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가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보여지고 
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희생은 위대한 일을 이루는 밑거름입니다. 

한 번 살고 가는 인생! 
정말 멋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누가 우리교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제가 우리교회를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이 교회를 위한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을 제가 피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 돌을 맞아야 한다면 제가 맞겠습니다.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한다면 제가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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