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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에 빚진 사람들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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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빚진 사람들 (롬 8:12~17)

 
인생은 고난일 수도, 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이 고난이고 괴로움이라고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과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삶이 괴로워지곤 합니다. 낙심과 절망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삶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삶은 기적일 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세상의 파도를 넘는 엄청난 능력이 이미 ‘삶’이라는 말 안에 담겨 있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역경은 넘을 만한 파도입니다. 역경을 넘은 사람들은 삶 그 자체로도 너무 황홀한 순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스스로의 삶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습니다. 살아 약동하는 물고기만이 세상의 파도를 헤치고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다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움 속에서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도 합니다. 삶의 자세는 우리를 두려움과 황홀한 기적, 둘 사이에서 삶을 결정하게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자기의 인생을 소풍에 빗대어 고백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일생이 그리 풍요로웠다거나 평탄한 삶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에서처럼 ‘소풍과 같다’고 말하기에는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스러운 삶을 ‘소풍’이라고, 하늘로 돌아가서는 ‘그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잘 돌아왔다고 말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의 일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저녁 노을빛과 같이 금방 사라질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해가 뜨면 아침 이슬이 증발하는 것처럼, 해가 지면 저녁노을이 소멸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통스러운 인생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의 ‘삶’ 자체가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 자체가 꿈결 같은 소풍이고, 살아있는 기쁨을 주는 현장이라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만큼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그의 가는 길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랑의 빚에 감격했습니다. 그는 역경 앞에 넘어지면 오뚝이처럼 곧 일어났습니다. 고린도후서에는 그가 경험했던 고난과 고통의 목록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의 여정을 따라 성경을 읽으면 그 험난함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산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의 생명을 내 놓은 사람입니다. 또한 교회에 충성하기 위해서 잠 못 이루며 기도하고 헌신한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바울의 삶이 평탄하다거나 순조로웠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험난함도 하나님의 사랑에 메여있는 그를 뗄 수 없었습니다. 험한 인생 한가운데서 그는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서 늘 기뻐하며 감사하라고 말하며 살아야할 이유와 감당해야 할 사명들을 상기시켜 주곤 했습니다. 

두려움과 위기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위기의 상황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또한 쉽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상처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물질적인 궁핍 앞에서 초라해지고, 건강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누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누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인지 선포해야 합니다. 모두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지라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리신 우리의 가치가 다른 누구에 의해서 평가받거나 폄하되지 않을 것이라는 진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의 평가기준은 항상 다른 곳에 두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기준이 자기 밖에 있습니다. ‘누가 나를 인정하는가?’, ‘나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이 소모되고 말 뿐입니다. 

우리가 인정받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옛날에 자존감이 매우 낮은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별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성취감이나 의욕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어느 날 지혜로운 스승을 찾아가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스승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새끼손가락에 끼었던 반지를 젊은 청년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한번 시장터에 나가서 이 반지를 팔아보게나. 그런데 반드시 금 한 냥 이상은 받아야 할 것일세. 그렇지 않으면 팔아서는 안 되네.”

청년은 시장터로 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반지를 보여주며 팔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며 물었습니다.
“도대체 값이 얼마요?” 
“금 한 냥이오.” 
사람들은 금 한 냥 이라는 말에 시큰둥하며 떠났습니다. 그는 실망해서 아무렇게나 반지를 챙겨서 다시 스승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아무도 이런 반지를 금 한 냥에 사려고 하지 않던걸요? 이 반지를 금 한 냥에 파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랬더니 스승이 이 청년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보석상에게 찾아가서 이 반지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오게나. 그러나 반지를 절대 팔아서는 안 되네.” 
그 청년은 보석상한테 가서 이 반지가 얼마인지 물었습니다. 자세히 반지를 살펴보던 보석상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 반지는 금화 60냥 이상은 받을 수 있습니다. 손님께서 천천히 파신다면 70냥까지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급하게 파신다면 제가 60냥에 사지요.” 

청년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반지를 소중하게 챙겨서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오는 청년에게 스승이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마치 이 반지와 같다네, 반지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 반지의 값을 정할 수 있는 법이지. 자네를 아는 분이 자네의 가치를 정하시고 계신다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마음대로 평가하거나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여 사람들의 조롱에 반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시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평가와 관심에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과 인기에서 우리 자신을 풀어놓으면 인생은 조금씩 성숙해 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멋진 인생으로 다듬어져 갈 것이고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인정하는가에 집중해야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은 다수의 나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다시 결정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질타와 시기를 받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드신 분, 나를 귀하게 평가하시는 분, 내 의도와 꿈을 아시는 분, 나에게 소명과 비전을 주시고 나의 길을 붙잡고 계시는 분 앞에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확인받아야 합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길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입니다. 

빚진 마음은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4-15)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종의 영, 억압의 영, 두려움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인정받은,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떠올리며 역경과 시련을 거뜬히 이겨내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바울은 ‘사랑의 빚’, ‘말씀의 빚’, ‘은혜의 빚’이라고 표현합니다. 
빚진다는 말은 그리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은 사회 안에서는 결격사유입니다. 만일 빚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려는 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말리고 싶어 합니다. 빚진다는 말은 피할 수 없는 책무가 많이 엮여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빚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에게는 많은 빚이 있었습니다. 그 빚은 말씀의 빚이요, 은혜의 빚이요, 사랑의 빚이었습니다. 그 빚들은 바울의 삶에 뒤엉켜져서 자기를 넘어뜨리려는 순간마다 강한 힘으로 바울 사도를 사로잡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말씀을 선포하게 하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은혜를 베풀게 했습니다. 또한 차마 사랑할 수 없는 원수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능력’이라고 여기는 사도 바울의 이적과 능력의 말씀은 ‘빚진 사람’의 사로잡힘의 역사였습니다. 

빚진 자의 능력을 설명할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어떤 어머니들이었던가요? 사진으로 처녀시절의 어머니들을 보면 아름답기가 그지없습니다. 가냘프고 여린 것이 무거운 짐 하나 들기 쉽지 않을 것 같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눈이 모진 말씀 한 마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이 결혼하고 나서 아기 엄마가 되면 어느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들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고운 손마디가 굵어지고, 당신들의 어깨와 피부가 상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아기들을 들쳐 업고 싸매며 애쓰십니다. 그 힘은 다만 사랑의 빚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사랑의 빚이 자녀에게 온통 헌신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빚진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우리의 인생의 가치이고,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겸손하게 살아갈 능력이 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우리를 붙들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빚진 마음으로 세상의 고난을 이겨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이 없는 자리는 없습니다. 어쩌면 열심히 살려고 할 때마다 고난과 어려움은 더 빨리 다가올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려고 하면 할수록, 고난과 유혹의 역사가 우리를 더 깊게 몰아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랑에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고난을 더 이상 고난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험한 십자가가 오히려 내게 기쁨이고 찬양입니다. 그 모든 역경의 순간이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앞에 빚진 마음을 털어놓는 예배의 시간으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참으로 어둡습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잊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을 밝히게 해야 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기 삶을 묶어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기 삶을 온전히 드리며 도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늘의 크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놀라운 일들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에 빚진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오더라도 빚진 마음으로 세상의 모진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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