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포스드모던한 사람의 신앙 (행 28:1~6)

  • 잡초 잡초
  • 255
  • 0

첨부 1


포스드모던한 사람의 신앙 (행 28:1~6)


며칠 전에 소나기가 쏟아진 적이 있지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늘이 갑자기 새까매지면서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는데 이 근처에 계속해서 번개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전기가 잠깐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천둥이 치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벼락이 우리 건물에 떨어지면 어떡할까, 창가에 가까이 가면 안되겠다, 이 동네에 죄인들이 많은가? 왜 이 동네에만 계속 떨어지나? 저같이 용감한 남자이고 또 현대인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천둥이 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뒤숭숭하고 불안한데 오래전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의 의식수준이 발달하기 전의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 치는 것을 봤을 때 두려움에 거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두렵고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줄 모르니까. 어찌 천둥 번개뿐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현상들은 당시 사람들이 설명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풍랑이 일면 바다의신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병들면 자기의 죗값을 치른다고 생각하고 또 사고가 나도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모든 불안함 ․ 두려움 ․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서 절대적인 존재를 찾고 자기의 죄를 속죄해야 이러한 징벌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신앙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과학이 발달하고 의식수준이 발달하고 우리는 더 이상 바다의 풍랑을 신의 분노라고 보지 않고 천둥이 치는 이유를 알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의 현상을 예측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예방할 수도 있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신앙이 필요 없는 때를 맞이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무지함과 무력함 때문에 종교가 필요했을지라도 지금은 과학이 발달하고 능력이 발달해서 종교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느냐? 종교의 유통기한은 끝났느냐? 그리고 좀 더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도 그렇게 시작했느냐? 그렇게 지속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말씀드리면 첫째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다윗이든 베드로든 바울이든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 아닙니다. 먹는 문제 때문에, 생존하는 문제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한 가지 현저하게 나타나는 패턴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으시고 모세를 찾으시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고 오히려 인간은 숨으려고 했는데 숨어있는 아담을 찾으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의 문제 때문에 사람이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당신을 계시하심으로 이 모든 것이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유지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의 무지함, 사람의 무력함 이것을 빌미로 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그런 식으로 사람을 유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고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유지하시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신앙을 갖게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신앙의 성장과 교육은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한 신앙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성장과 신앙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나 너희는 이방인처럼 염려하지 말라 그 대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먹는 문제 ․ 마시는 문제 ․ 생존의 문제 때문에 기도하고 생존의 문제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이방인과 같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지라도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할 줄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걸 믿지 못하고 여전히 두려움 또 배고픔, 이런 것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맹종한다든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인류의 어떤 문서보다도 더 오래된 작품입니다. 구약성경은 주전 1500년, 2000년까지 올라갑니다. 그때에 다 기록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때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고 거기에서 믿음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유심히 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보다 앞서가는 것이 있었고 지금 이 시대의 우리의 생각보다도 앞서가는 그런 말씀들이 성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십계명 중 제2계명입니다. 제2계명은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그 앞에 절하지 말고 그것을 섬기지 말라’ 우리는 제2계명이 우상을 새기지 말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물속에 있는 것들을 두려워해서 그들을 신격화 하고 그들의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절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있는 것 그것이 날아가는 새든 달이든 별이든 태양이든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신이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물속에 있는 것이든 우주만물, 자연에 있는 어떤 것도 그건 신이 아니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섬기지 말라, 그 말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흑인영가 중에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 주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쥐고 계십니다. He''s Got Sun and Moon In His Hands - 해와 달도 주님이 손에 쥐고 계십니다’라는 곡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둥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는 있지만 천둥이 하나님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풍랑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하나님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서 백성을 회개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원시적인 사고방식과 깨인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은 신앙인의 모습인 것뿐만이 아니고 지극히 깨인 사람의 모습이고 지극히 현대적인 인간의 모습이고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앞서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진짜 기독교인이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본문에 나오는 바울보다는 본문에 나오는 멜리데섬의 원주민과 생각이 비슷합니다. 어떤 일이 생겼느냐면 바울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어요. 그래서 배가 파산해서 이 섬에 겨우 올라왔습니다. 풍랑을 만났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 원주민들은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바다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을 시쳇말로 재수 없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죄가 많으면 풍랑을 만날까.

제가 오래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열흘 입원한 적이 있는데 예수 안믿는 분은 안 그러는데 예수 믿는 분들은 거의 하나같이 왜 사고가 났을까 하나님이 뭘 말씀하시려고 그러시나. 그런데 그 사고가 왜 났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날 오토바이를 배워서 제대로 타는 법도 모르고 교통법규를 어기고 고속도로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묘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사고를 낸 게 아니고 제가 부주의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은 사고를 내게 한 게 아니고 죽을뻔한 저를 살려준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하나님이 사고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교회 다니는 분들이 ‘아, 이걸 통해서 뭘 배울 수 있을까’ 아주 철학적으로 이런 것을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제가 부주의해서 사고를 냈다고 하면 사람들이 실망할 것 같았어요. 여기에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얘기를 해야 사람들이 ‘역시 목사는 ~’ 이러지. 정말 얼마나 부주의한 일입니까. 오토바이를 처음 배워서 오토바이가 가서는 안되는 올림픽대로에 들어갔으니까. 살아남은 것만도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하나님이 하신 것은 저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이지 그 사고를 낸 것은 접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방식이 사도바울보다는 본문에 나오는 멜리데섬의 원주민과 비슷해요.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토인들이에요. 아주 전형적인 인간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풍랑을 만난 것에 대해서도 이들이 삐딱하게 보는데 게다가 뱀이 그의 손을 물었으니 오죽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정말 살인한 사람이로다 바다에서 겨우 구원을 받았으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그들의 생각은 철학적이고 인과응보 적이고 뱀이 물든 풍랑이 일어나는 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사도바울이에요. 

사도바울이 풍랑을 만난 이유는 풍랑이 원래 많은 겨울에 사도바울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부주의함과 교만으로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강행했기 때문이고 뱀이 문 것은 나뭇가지를 불속에 던져서 뱀이 뜨거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아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유입니다. 성경도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에 ‘바울이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해석해서 사람이 믿음이 뜨거워지면 뜨거움 때문에 마귀가 그 사람을 괴롭힌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분도 있지만 그건 영적인 해석이고 왜 뱀이 바울의 손을 물었느냐? 원래 뱀은 물어요. 그게 뱀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그리고 그 뱀을 불에 떨궈버리고 아무 해를 입지 않았고 이제 멜리데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몸이 퉁퉁 붓거나 갑자기 넘어져 죽을 줄로 생각하는데 멀쩡하게 있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이는 신이다’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모습과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뱀이 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이 멜리데 사람처럼 내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치시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죄를 벌하시려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걸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만일 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요, 자기의 정죄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요, 이런 사람은 뱀을 담대하게 떨쳐버리지도 못하고 해를 입지 않는 담대함을 얻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지적하실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최소한의 평강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지 예수님을 믿으면서 여전히 자신의 죄 때문에 자책하는 사람은 자신도 믿음이 없는 것이고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자책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이방인처럼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는데 믿음이 없으면 당연히 능력도 없고 담대함도 없고 자유하지 못합니다. 

제가 한번 예전에 성도님 한 분이 입원을 해서 심방을 요청해서 병원에 갔더니 그분이 대뜸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저를 징계하시나봐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세요. 그럼 왜 나를 불렀습니까. 그럼 왜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하나님이 징계하기 위해서 이 병을 주셨으면 그 병을 앓고 죽어야지 왜 병원에 와서 고치려고 애를 쓰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시나봐요. 그건 자기의 말과 행실이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거면 나으려고 하면 안되지요. 그냥 죽어야지요. 왜 목사를 부릅니까. 

목사가 징계를 막아줄 것으로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으셨다고 믿는다면 예수 안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 사랑으로부터 나를 끊을 자가 없다는 것을 믿고 이 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신다고 생각하면 그 병에서 낫게 해달라고 구할 수도 없고 그런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그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늘 본문의 이 원주민들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의가 그를 살려두지 않는도다 그들의 생각이 더 철학적이고 더 종교적으로 옳은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그런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뱀을 떨쳐버리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행실로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그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나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뱀에게 물렸어도 해를 받지 않았어요.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를 믿는 자에게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저들이 손으로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얼마나 담대하며 자유합니까. 이것은 말로 설명하는 신앙이 아니고 자신의 삶의 결과로 증거하는 신앙입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현대인들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이러한 역경이든 뱀이든 독이든 시험이든 이런 것을 당해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