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계 6:9~11)

  • 잡초 잡초
  • 241
  • 0

첨부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계 6:9~11) 
 
 
가슴에 한을 품고도 이를 풀지 못할 때 병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한 맺힌 사연을 안고 죽으면 원혼(冤魂)이 되어 구천(九天)을 떠돈다는 미신(迷信)적인 말을 하곤 합니다. 개인적인 원한도 문제이지만 한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서 한꺼번에 결집될 경우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맙니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유사한 증후군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인데도 어떤 이슈나 빌미가 생기게 되면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며 군중의 힘으로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먼저 개인이나 집단에 한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고, 또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지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성경에도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그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 한이 맺히는 이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사로운 원한도 있지만 사회적 통념이나 문화적인 배경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1) 억울함을 당했을 때입니다.

세상에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힘이 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억눌리고 권리를 유린당하는 경우는 어느 사회에나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권력자가 전횡을 일삼으며 민초들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게 될 때, 거기 희생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억울함과 분노로 한을 품게 됩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못다 푼 한은 죽어서까지 원한이 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자기들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2) 원통한 일을 당했을 경우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가슴에 한으로 남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잃고 혼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자식의 죽음이나 불행을 겪은 사람도 그 안타까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갑니다. 이런 일을 겪는 동안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를 실감하면서 가슴속에 응어리와 맺힌 한이 병이 되어 남게 됩니다.

3) 꿈이 좌절되거나 믿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이를 이루고자 거기에 전력투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희망이 무산될 때 좌절과 낙망을 하게 되며 그것이 한으로 남게 됩니다. 또 가족 간에 갈등과 반목이 빚어지거나 태산같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했을 때도 그 충격의 여파로 많은 후유증을 앓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되면 신체적인 장애까지 앓곤 합니다.

2. 한을 푸는 방법

이교 사회에서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거나 원혼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진혼(鎭魂)굿을 하는 등 무속(巫俗)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역사에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해한(解恨)을 시도하였습니다.

1)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전과정을 보면 어디에서나 원한과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져 왔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세계에서 칼잡이들이 벌이는 활극들은 대부분 한 맺힌 복수의 장면을 연출하였고, 중국의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복수를 위하여 태어나서 원수 갚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신화는 죽은 다음에 원귀(寃鬼)가 되어 생전의 한을 푼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2) 체념하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분노나 원통한 사연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쏟아 내거나 풀지 못하면 병이 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고민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기에 이릅니다. 옛날에는 결혼하자마자 소박을 맞거나 청상과부가 되는 경우, 여인의 팔자 탓을 하면서 소복을 입고 수절을 해야 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질 경우 스스로 목을 매거나 은장도로 자결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명망 있는 가문이 자랑으로 여기는 홍살문의 내역도 따지고 보면 여인의 한을 미화시키는 잘못된 풍습의 유적들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살 증후군이 만연하는 것도 체념과 도피의 현상일 것입니다.

3) 예술이나 작품으로 미화시킵니다.

비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불행과 한을 발판으로 하여 예술과 문학작품으로 발전시킨 예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마다 특정인의 한 맺힌 설화나 전설을 형상화하여 문화상품으로 개발하기도 합니다. 90년대 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대종상 6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대단한 흥행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소리꾼 주인공은 딸의 멀쩡한 눈을 실명시키고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앞을 못 보는 장님의 한을 소리에 담아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비록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현실성이 없는 내용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거나 이를 이용하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3. 한에 대한 성경적 교훈

성경에는 억울하고 원통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생래적으로 기독교인은 의를 추구하다가 핍박을 당하거나 죄가 없어도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마 5:10-12). 그렇지만 하나님 백성들은 이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다스려야 됩니다.

1) 보복(報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에게 잡혀갔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려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6:52). 보복은 다른 보복을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날뛰는 사울왕을 목전에 두고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직접 보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보복하지 아니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무엘상 26:10에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원한을 가진 사람이 밤낮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눅 18:7-9). 

2)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인 무한한 박애(博愛)사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마 5:43-44). 로마서 12:20-21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은 요셉입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였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보복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 자기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해 주었습니다(창 50:21).

3)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나온 여인은 다섯 번이나 남의 남자를 가로챈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그대로 안고 있으면서 오직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순식간에 모든 한이 다 풀어졌습니다(요 4:25-26). 유대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빙자하여 모두가 돌로 여인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모인 사람들은 하나, 둘 돌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습니다(요 8:1-9). 

그들도 그 여인이상으로 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애꿎은 여인 한 사람을 돌로 친다고 그 한이 풀릴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돌을 던지는 악순환만 거듭되었을 것입니다. 모압으로 이사 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이 몰락한 후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한 많은 인간의 표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 묘사되는 보아스를 만남으로서 축복의 신기원을 이루었습니다(룻 4:13-22).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나서 인생관이 새로워 졌습니다. 그것은 최상의 가치인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도 그 마음에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빌 3:5-9).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