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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좋아하는 일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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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일 (눅 10:38~42) 
 
 
❚신앙적인 우상(?)

제가 그림 하나를 보여 드리지요. 어떤 그림인지 맞춰보세요. (그림을 보여준다) 어린아이들에게 사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보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이렇게 그렸어요. 참 잘 그렸지요? 그런데 한 번 보세요. 아이들의 생각 속에 사탄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머리에 뿔이 나고 꼬리가 달린 시커먼 괴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이 이런 식으로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탄이 정말 이런 식으로 생겼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탄을 다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사탄임이 단박에 탄로 나서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가거나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럼 사탄이 어떻게 생겼느냐? 저도 잘 몰라요. 사탄은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유혹하고, 때로는 우리가 가장 약한 것, 혹은 좋아하는 것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사탄이 신앙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신앙의 모습을 가장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 천사의 모습으로, 성령님의 모습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모습으로까지 가장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이 부처를 만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부처는 나쁜 요괴가 부처의 모습으로 둔갑한 것이었습니다. 깜빡 속아 넘어갈 뻔 했지요. 마찬가지로 사탄은 얼마든지 신앙적인 모습으로 가장하고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속아 넘어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단 사이비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기독교를 가장해서 다가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하나님을 가장한, 기독교를 가장한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지만 우리 주변에 신앙의 모습을 가장한 우상이 참 많습니다. 이것이 지난주부터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상 같지 않은 우상”입니다. 분명히 우상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차지하는 무서운 우상인데 겉보기에는 너무도 멀쩡한 신앙인 것처럼, 아주 훌륭한 믿음인 것처럼 가장해서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자칫 “저 사람, 참 믿음 좋다”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만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막고, 우리 신앙이 바로 자라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우상입니다. 그런데도 얼핏 보기에는 좋은 신앙인 것처럼 가장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나눌 마르다의 우상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선택

어느 날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가셨는데 그 곳에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라고 하는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리신 나사로가 이 집의 큰오빠고 그 여동생이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들 가족은 예수님과 참 가까웠나 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요 11:35), 베다니에 오셨을 때 특별히 이 3남매 집에 심방하시는 것을 보면 이 집이 예수님과 특별한 사이요 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남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들이 사는 마을인 베다니에 오셨을 때 당연히 예수님을 환대하며 집으로 모셔 들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일입니까?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목회자 한 번 식사 대접하면 너무 기뻐하고 감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쁜 분인데 모시고 대접하게 되니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하물며 그 귀하신 예수님, 그 바쁘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대접하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잘 모시고 극진히 대접하려고 애를 씁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안 나와 있지만 추측은 가능하지요? 여러분 대심방 할 때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목사님 심방 온다니까 안 치우던 집안도 깨끗이 치우고 맛있는 음식도 정성스럽게 준비합니다. 어떤 집에 심방을 가니까 남편분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아휴, 목사님 매일 심방 오시면 좋겠습니다.” “아니, 왜요?” “저희 집사람이 평생 집도 잘 안 치우고 정리도 잘 안 하는데 목사님 오신다니까 하루 전부터 얼마나 열심히 집 치우고 정리하는지 말입니다. 게다가 목사님 대접한다고 평소 못 먹어보는 음식도 준비하니 매일 오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목회자 모시니까 집도 치우고 음식도 마련하고 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얼마나 기특하고 예쁜 마음입니까? 마르다도 그랬던 것입니다. 너무도 예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일한 것입니다. 집도 치우고, 음식도 정성껏 마련하고 하느라 정말 정신없이 분주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주기는커녕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속상하고 얄미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 너무하시네요. 제가 예수님 대접하려고 이렇게 분주하게 일하는 것을 뻔히 보시면서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는 제 동생 마리아에게 ‘너도 가서 언니 좀 도와주렴’ 하고 말씀 한 마디 안 하세요? 지금이라도 한 마디 좀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언니 마르다는 성격이 쾌활하고 아주 적극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데도 그렇고 주저 없이 예수님께 불평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상당히 적극적이고 쾌활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에서 봉사도 잘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교회 일을 합니다. 참 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교회 일이나 봉사에 적극적이지 않은 분들에 비하면 참 훌륭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 교회 일과 봉사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분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어요. 그 함정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41절과 42절을 함께 읽습니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이렇게 교회 일 열심히 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우상에 대한 경고가 들어있습니다.

❚분주함의 우상(비즈니스 우상)

그 첫 번째는 바로 “분주함의 우상”입니다. 40절에 보면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했습니다. 바로 이 때 마르다는 ‘분주함의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놀랍게도 여기서 준비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봉사를 바로 디아코니아라고 부릅니다. 마르다는 마치 오늘날 열심 있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위해,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잘못이냐? 아닙니다. 남들보다 열심히 교회 일 하는 것이 문제냐? 이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준비하는 일, 봉사(디아코니아) 때문에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했다는 점입니다. 

이 ‘분주했다’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 뉘앙스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페스스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냥 바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바빠서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를 뜻합니다. 왜 있잖아요. 어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정신이 없고,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다 보면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이런 뉘앙스를 살려 킹 제임스 버전(KJV=흠정역)에서는 ‘cumber’라는 낱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cumber’라는 낱말은 어떤 사람이나 일 때문에 괴로운 것을 뜻합니다. 또 다른 영어성경인 NIV에서는 ‘distract’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이 말은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정신이 혼란스러워져 괴로운 지경’을 뜻합니다. 

심지어 ‘너무 정신이 혼란스러워 미치게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자, 이쯤 되면 왜 문제가 되는지 아시겠지요?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한다는 이유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하고, 이런 저런 맛있는 음식들 요리도 하고 하도 이 일 저 일 정신없게 하다 보니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혼란스러워 괴로운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짜증도 났습니다. 게다가 동생 마리아는 이렇게 바쁜데 도와주지도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으니 더 화가 났습니다. 이것은 분주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일에 치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을 겁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또 집안 일 하면서 너무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니까 정신도 없고, 너무 바빠서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아내나 남편에게 아이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막 짜증도 내고 화도 냅니다. 그러면 뭔가 잘못 된 것 아닙니까? 처음에 그 일을 시작한 이유가 뭔지 잊어버린 것이지요. 처음에 직장 일을 시작한 것은 가족들 잘 먹여 살리고 잘 살아보려고 한 일인데 나중에 일에 치어서 가족한테 짜증내게 됩니다. 남편에게, 자녀에게 맛있는 음식 해주려고 시작한 일인데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 도리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짜증을 냅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유도 잊어버리고 그 일을 안 하니만 못한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교회 일을 하고 봉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 섬기고 교회 섬기려고 시작하잖아요? 목회자 섬기고 다른 성도들 섬기려고 시작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점점 일이 많아져서 정신이 없고 지치고 힘이 들게 되면 나중에는 오히려 교회 일이고 뭐고 다 싫어지고 다른 성도나 목회자에게 짜증을 내고 피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나의 열심이 오히려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교회의 덕을 해치기도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르다가 빠진 ‘분주함의 우상’입니다. 분주하고 바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분주함이 나를 지배하고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부리게 되고 일에 치어서 나중에는 왜 그 일을 하는지 이유조차 잊어버린 채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분주함을 넘어서 우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일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일 때문에 더 지치고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 일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는 분 계십니까? 참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교회는 다니지만 봉사 전혀 안 하시는 분 계십니까? 가능하다면 꼭 봉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봉사를 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신앙도 자랍니다. 그런데 봉사를 하더라도 이것 하나는 꼭 기억하십시오. 봉사를 하면서, 교회 일을 하면서 늘 점검을 해보아야 합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데 기쁨이 있나? 봉사를 하면 힘이 나고 믿음이 자라는 것을 느끼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 열심히 봉사는 하는데, 열심히 교회 일은 하는데 기쁨도 없고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치고 힘들고 힘이 빠진다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봉사가 아닌 분주함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봉사가 아닌 ‘일’ 수준으로 간 것입니다.

비즈니스(busines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 사무, 업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busy(바쁘다)의 명사형입니다. 즉 일은 ‘바쁜 것’이라는 뜻이지요. 세상에 진짜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에 치어서, 일에 쫓기며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 심지어는 뭘 위해 일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일을 위한 일’을 맹목적으로 하며 살아가는 일 중독자들 말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 직업조차도 비즈니스(business)가 아닌 해피니스(happiness)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도록 일하다 죽는 사람’이랍니다. 한평생 무엇 때문인지 바쁘게 일만 죽어라고 하다가 그렇게 죽는 허무하고 불쌍한 인생 말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바쁜 것’이 아니라 ‘행복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召命)이라 생각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심지어 교회봉사조차도 ‘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봉사가 비즈니스가 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열심히 믿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앙을 일처럼, 바쁜 것으로만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뭐가 그리 급하고 바쁜지, 일을 위한 일을 하며 정신없이 삽니다. 주님 안에서 참 안식과 평안도 누리지 못하고 말입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죽어라고 일하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도 일을 합니다. ‘신앙 업무’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회 봉사도 비즈니스(business)가 아닌 해피니스(happiness)가 되어야 합니다. 일이 아니라 행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교회를 섬기면서, 또 교회 일을 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냐는 말입니다. 나아가 예수 믿는 것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가 말입니다. 이게 아니라면 이미 여러분은 일의 우상, 분주함의 우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겉보기에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훌륭한 성도처럼 보이지만 실제 속으로는 아무 기쁨도 행복도 능력도 없고,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을 위한 일, 내 성취감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분주함의 우상’ 말입니다.

❚우선순위의 우상

마르다가 빠진 두 번째 우상은 ‘우선순위의 우상’입니다. 제가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을 참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우선순위란 무엇이냐? 여러 가지 일이 생길 때 그 가운데 뭐가 가장 중요한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선택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익이 되는 일을 가장 먼저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은 급한 일부터 먼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먼저 합니까? 그런데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원칙을 하나 말해줍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하는 사람들은 보통 7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세 번째 습관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고 그 우선순위에 입각하여 시간 관리를 잘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스티븐 코비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합니다. 세상에는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중에 주로 급한 일을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공하려면 반드시 ‘급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 ‘소중한 일’부터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만 이런 훌륭한 원리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스티븐 코비가 성경에서 발견한 원리입니다.

이런 원리를 가장 잘 알려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마르다와 마리아의 선택입니다. 마르다는 급한 일부터 한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접대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가 불평하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더 쉽게 이해가시지요? 결국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 가장 필요한 일이 뭔지 아느냐? 그것은 나를 대접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말씀을 듣는 일이다. 마리아는 바로 그것을 택했으니 참 잘했고 너는 그것을 택하지 못했구나”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소원 딱 한 가지만 무조건 들어주마” 하시면 뭘 말씀드리겠습니까? 참 어려울 거예요. 소원을 한 세 개쯤 말하라시면 좋겠는데 딱 하나만 들어주시겠다면 참 고민 될 겁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한 가지 소원인데 “지금 돈 10만원이 필요하니 10만원만 주세요.”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쁜 옷 한 벌만 주세요”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가장 소중한 소원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낭비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주님도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신 셈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하나만 택해라.”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택한 것이고 언니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을 택한 것입니다. 누가 제대로 선택한 것입니까? 주님을 대접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고 귀한 일이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급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중요한 일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을 택해야 합니다. 목회가 참 바쁘고 일이 많습니다. 설교준비도 많은데, 교회행사도 많고, 심방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너무 바빠서 기도를 못 한다? 이런 일에 너무 바빠서 말씀을 못 본다? 하나님 만날 시간도 못 가진다? 그렇다면 뭔가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목회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정말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다른 것에 매달리는 함정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봉사에 너무 바빠서, 교회 일에 너무 바빠서 기도를 못 한다? 성경을 못 본다? 하나님 만날 시간을 못 가진다? 이건 뭔가 앞뒤가 바뀐 심각한 상황입니다.

제가 심방을 가면 이런 일이 가끔 생깁니다. 예배 끝나고 저에게 맛있는 것 대접하려고 준비합니다. 그런데 한창 제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아니면 기도하고 있는데 음식이 끓어요. 주인이 황급히 가서 불을 끄고 국을 저어주고 준비를 합니다. 저는 참 안타깝습니다. 물론 부족한 종을 대접하려는 그 마음이 참 귀합니다. 어떻게든 기다리게 하지 않고 예배 후 바로 식사하게 하려는 그 마음도 참 가상합니다. 하지만 순서가 잘못 되었습니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예배 끝나고 음식 준비하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제가 짜증을 내겠습니까? 우리는 더 중요한 일을 택해야 합니다. 세상에 내가 구원 받는 일만큼 중요하고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생명 구원하는 일만큼 귀한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일은 뒤로 제쳐두어도 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는 일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찬송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밥 대접하는 일보다, 그 어떤 일보다 그냥 주님 만나서 그 발치에 앉아 말씀 듣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일보다 다른 것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런 경우를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보다, 주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먼저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숭배라는 것이 그리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한 우상숭배보다 우상처럼 안 보이는, 우상 같지 않은 우상이 더 많습니다. 때로는 오늘 마르다의 경우처럼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일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우상숭배인 경우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우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선으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일에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상 같지 않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아닌 참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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