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을 바라보라 (민 21:4~9)

  • 잡초 잡초
  • 494
  • 0

첨부 1


예수님을 바라보라 (민 21:4~9)


사람은 누구나 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잠들기까지 많은 것들을 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여 지는 것을 통해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 행동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행동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통해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하게 된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 말씀에“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눈으로 봄으로 인해 탐심이 일어났고, 그 탐심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저주는 자자손손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5절~26절에 말씀하시기를“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고 했습니다. 눈이 볼 것을 올바로 볼 때, 살아가는 길이 평탄하며, 그 길이 든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 말씀에“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인 민수기 21장 4절~9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건의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면 만사형통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되는 고난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이들이 원망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길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직선 코스로 간다면 금방 들어갈 수 있는 길인데, 시나이 반도를 빙 돌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먹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싱싱한 식물은 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뿐이었습니다. 왜 이런 것만 먹어야 하느냐는 불평이었습니다. 셋째는, 마실 물이 귀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인지라 물이 매우 귀했습니다. 그들은 목이 마를 때마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러한 불평과 원망은 마침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로 살지라도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이 더 낫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모세를 죽이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뱀을 땅에 보내어 사람들을 물어 죽게 했습니다. 

광야의 뱀은 독이 많아 더욱 무섭습니다. 독사라 할지라도 햇빛을 받지 못하면 독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 뱀들은 그늘이 없는 광야 사막인지라 햇빛을 많이 받으므로 독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여름을 지난 가을철 뱀은 독이 많아 위험합니다. 그 까닭은 긴 여름 햇빛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모두 다 즉사했습니다. 이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기들을 살려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인 민수기 21장 8절인“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그것을 보면 살리라”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달고, 이 불뱀을 쳐다보는 자는 누구나 살아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라는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이 말을 믿고 쳐다보는 자마다 살았습니다. 뱀을 보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 뱀에게서 어떤 마술적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놋뱀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에 보면“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 것을 부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와서야 이 놋뱀 우상을 부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놋뱀의 형상을 사용하는 곳이 있습니다. 군대 의사인 군의관의 마크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의 형상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유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지난날의 역사를 들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뱀은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장대위에 달린 놋뱀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믿음을 의미하며,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가 나음을 입은 것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불뱀에 물려 죽어간 사람들은 뱀의 독을 없이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발달했던 애굽의 약도 써보았을 것이고, 칼로 상처를 내고 상처속의 독을 빨아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뱀의 독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사탄의 상징인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그것은 곧 사탄의 미혹으로 범한 죄악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악은 무엇으로도 깨끗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합니다. 이처럼 기독교 진리는 단순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음이 생기게 되며,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로마서10:13~16).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구원 얻는 계기가 무엇입니까?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처럼 범죄한 인간들이 구원 얻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생명의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들으려면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 등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고유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 역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생명입니다. 오늘날 유전공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것으로 개량하거나 변형하는 것일 뿐 창조는 아닙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자들을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풀 한포기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을 뿐,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선행이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 밖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선행이나 어떤 공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미국에 무디 목사가 어느 날 탄광촌에 전도를 하러 나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을 얻어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무디의 전도를 받은 광부들은, 아무 노력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무디 목사가 물었습니다. “여러분들, 석탄을 지하 몇 미터에서 캡니까?” “백여 미터가 되지요.” “그 깊은 지하 갱도를 힘들어 어떻게 오르내립니까?” “그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니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도 사람이 특별히 할 일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둔 엘리베이터를 타면 높고 낮은 곳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놓으신 그 공로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는 데에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천국 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므로 불뱀의 재앙을 만나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장대위의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살아났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9절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수기 21:9)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보듯,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14~15 에“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二. 풍랑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와 병고침 받기를 원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운집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허기진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무리의 수가 오 천 명이 넘었습니다.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비로운 기적을 행하신 후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은 산 속에 가셔서 밤이 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밤 4경(3시~6시 사이)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난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어두운 바다 위를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어부들에게는 풍랑 이는 바다위에 유령이 나타나면 그 배는 침몰할 징조로 여기는 것이 고금의 속설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고자 찾아온 저승사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 가까이 오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27)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태복음 14:28)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오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자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소리 지르며 건져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건져주시며 말씀하시기를“믿음이 없는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상상 밖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바다 위를 걸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물위로 걸어오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의 눈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 그만 무서움이 밀려왔고 그는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바다였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했으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물위를 걷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베드로 한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대단히 소중한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을“고해(苦海)”라고 말합니다. 바다에는 항상 풍파가 있듯, 이 세상 역시 항상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고난의 풍랑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이 거친 세파를 이기는 방법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친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의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풍파를 이길 수 있습니다. 파도와 바람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풍파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인들이 받는 유격 훈련 가운데, 깊은 계곡을 외줄 하나를 의지하여 건너는 것이 있습니다. 수십 미터 계곡 아래에는 험한 바위와 깊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현기증이 나서 누구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너편 언덕을 바라볼 때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그 환경에 짓밟히는 실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세상을 이긴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풍파만 바라보며 살아갔습니다. 실패하고 승리하는 것이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시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2차 대전 때 유럽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병명이 있었습니다.“가시 철망 병”이란 것입니다. 이는 극도로 우울해지고, 먹어도 살이 안되고, 전신이 쇠약해져 누워만 있으려는 증세였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방법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철망 속에 갇혀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온 병이라 하여“가시 철망 병(Barbed-wire sickness)”이라는 병명을 붙여 불렀습니다. 
이 환자들의 행동을 정신 분석학적으로 면밀히 분석해본 결과 그들은 모든 일에 하루 종일 불평과 불만과 원망으로 매일 매일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 불평불만 증후군을 보이는 정신병인 셈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자기를 감옥에 가두고, 희망을 빼앗아가고, 감사할 여유를 박탈해간 수용소의 가시 철망만을 바라보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용소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조사해본 결과, 그들은 똑같은 환경이지만 들국화도 바라보고,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도 쳐다보고,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각하고, 더욱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을 때 무엇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모세가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때에, 열두 정탐꾼들을 보내며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같은 땅을 같은 기간 동안 살펴보고 돌아왔는데, 그 시각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민수기 13장 22절~23절에 보면 열 명의 정탐꾼들은 말하기를“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도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장 9절에 말하기를“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한편 무리는“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고 했으며, 한 편 무리는“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정 반대의 견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보고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을 하나님께서 낱낱이 다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보시고 민수기 14장 28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들 보기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고 말한 사람들은 메뚜기처럼 아무 힘없이 광야에서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말처럼 그들을 밥 먹듯 삼키고 그 땅을 점령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에는 블레셋 나라가 골리앗 장군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략한 전쟁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리앗을 바라본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형들을 면회하러 간 소년 다윗은 이 광경을 보고 말한 것을 사무엘상 17장 46절-47절 기록하기를“너는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말한 대로 골리앗은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매 돌에 맞아 죽고,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똑 같은 상황이었으나 사울 왕은 블레셋 군대와 골리앗을 보았고,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이라는 사람은 세계적인 역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불란서 대 혁명사>의 원고를 탈고했습니다. 칼라일은 더없이 기뻐하며 머리를 식힐 겸 잠시 외출을 했습니다. 칼라일이 잠시 외출한 사이 그 집의 하녀가 방 청소를 하고 난로 불을 피우려고 쏘시개를 찾다가 누렇게 퇴색된 원고뭉치를 못 쓰는 휴지로 착각하고 그것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칼라일이 7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불란서 대 혁명사>는 삽시간에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밖에서 돌아온 칼라일은 이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칼라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 다시 더 좋은 작품을 쓰자”이렇게 다짐한 그는 다시 7년이란 긴 시간을 전성을 들여 불후의 명저 <불란서 대 혁명사>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험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누구에게나 풍파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도 염려도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주검들이 있는 무덤입니다. 풍랑이 내 삶을 엄습해올 때 풍파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처럼 무서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 목자가 되심을 믿고,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서 풍랑을 밟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三.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35절에“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과 사마리아 지역을 통행하셨습니다. 이곳을 지나시면서“수가”라는 동네 우물곁에서 피곤한 몸을 쉬시기 위해 잠시 앉으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동네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혼자 우물곁에 계시는데,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을 들은 이 여인은 기뻐하면서 동네로 달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와 보라 이는 그라스도가 아니냐!”(요한복음 4장 29절)하고 전했습니다. 이 여인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음식을 구하려갔던 제자들이 와서 음식을 내어 놓으면서“랍비여 잡수소서.”(요한복음 4장 31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여한복음 4:32)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누가 주님께 잡수실 음식을 드렸는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4)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말씀인데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을 생각했기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란 예수님의 관심을 양식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점심식사를 하기 전이었음으로 시장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들어가서 먹을 음식을 구해왔습니다. 그러므로 허기를 면하기 위해 얼른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자신이 메시야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구원시키신 주님의 마음의 만족은 허기진 사람이 배불리 먹은 후의 만족과 같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요환복음4:32)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건강과 장수입니까?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우선 예수님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우리 성령님의 관심사는 오직 영혼구원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주께 돌아와서 구원 얻게 되기를, 굶주림 사람이 먹을 음식을 찾듯, 오직 영혼구원을 위해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시며 이 시간도 일하고 계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요환복음4:32)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5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 때가 된 밭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이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자 곧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이 광경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농사의 파종은 10월 중순경에 하여 4월 중순경에 추수를 하게 됩니다. 아마 이 때가 12월 중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온 들판에는 푸른 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보리밭 사이로 여자의 증거를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로 달려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갈망하는 무리들을 보신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희다고 하신 것은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보리밭 사이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보시고 하신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에게 증거된 복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환복음 4장 39절에“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먼저 구원하신 후 그 사람을 통해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쓰셨습니다. 영혼구원의 이 귀한 일을 천사를 통해 하지 않으시고 먼저 믿은 우리들을 통해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복음증거를 통한 영혼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가능한 모든 시간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삶의 본분이며, 지혜입니다. 이것이 복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복음증거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받을 축복에 대해 요한복음 15장 2절에 말씀하시기를“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는 더 맺게 하시고자 잘 돌보며 가꾸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특히 세 가지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구원을 받기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 험한 세상 이기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나로 인해 또 다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추수를 기다리는 무르익은 곡식처럼 구원을 바라는 수많은 불신 영혼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삶의 승리가 있고, 삶의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