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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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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눅 15:11~32)


신학교를 막 졸업한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는 전도사에게 장년 설교를 시키지 않는데 전도사에게 장년 설교를 맡겼습니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전도사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어느 교회에 설교를 잘한다는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는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제까지 안아 보았던 여자 중에 가장 가슴이 따뜻한 여자는 제 아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목사님의 이런 폭탄적인 발언에 성도들은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이 다른 남자의 아내를 안아 보았다고 말하며 그 여자의 가슴이 가장 따뜻했다고 말하니 성도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긴장감이 도는 그 순간 목사님은 ‘그 여자는 바로 나의 어머니였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크게 웃었고 어색하고 긴장되었던 분위기는 밝은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밝은 분위기에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사는 무릎을 치면서 바로 설교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정성껏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설교를 맡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도사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며 서론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제까지 안아 보았던 여자 중에 가슴이 가장 따뜻한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전도사가 자신이 가슴에 안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는 말을 하니 성도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어느 권사님은 저런 사람의 설교를 들을 수 없다고 항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권사님의 행동에 몇 분이 동조하여 예배당 밖으로 함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년 전도사는 당황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웃으면서 밝은 분위기에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황한 전도사는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그 여자가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교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일어나 예배당을 나갔습니다. 담임 목사님도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수습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예배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교역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전도사에게 호통을 치며 물었습니다. 전도사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를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보여 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 전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전도사에게 앞으로 더 잘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주에 설교를 하실 때 전도사의 설교 서론을 그대로 인용하며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지난주에 전도사가 설교를 잘하려고 하다가 긴장해서 실수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전도사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성도들이 그때서야 웃으며 전도사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랑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어에서 like와 love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like는 우리말로 ‘좋아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감정과 행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love는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감정과 행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like와 loved의 차이는 자기를 위한 표현과 다른 사람을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like와 love가 잘못 인식되어 like가 love로 생각 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자녀는 부모들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잔소리로 받아 들입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수긍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들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녀에게 강조하고 강요합니다. 당신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행동하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의 요인이 됩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like가 있는 곳에 내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격은 없습니다. 잘못하면 서운함과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love는 감동과 감격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love는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love는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주변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억지를 부려 재산을 넘겨 받아 아버지를 떠나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결국은 모든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돼지를 치는 농장에서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모든 종들이 배불리 먹는데 집에 돌아가 종의 모습으로라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행여 오늘이나 내일이나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동구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 멀리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20절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만큼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한 눈에 그가 작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뛰어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는 종들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명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큰 아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집에서 큰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들에게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셨는데 주인 어른께서 잔치를 베풀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고 집안을 세웠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지 않으시더니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이렇게 큰 잔치를 베푸느냐고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향해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보면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삶은 love의 삶이 아니라 like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과 동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만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합니다. 떠나고 싶으면 떠납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아픔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삶에서는 감동과 감격이 없습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메마른 삶입니다. 거기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like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삶은 두 아들의 삶과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보다 두 아들의 삶을 더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작은 아들을 무사히 돌아오기를 마음 조이며 기다렸습니다. 작은 아들이 가지고 나간 돈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동생을 품고 격려하기보다 그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큰 아들의 것임을 확인시키며 그를 위로하고 다독거립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픔을 위로 받기보다 두 아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어루만집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의 성품과 행동을 love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은 like가 아니라 love입니다. 

지난주에 다녀온 영성 수련회에서 한 사모님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like적인 삶이 love적인 삶에 의해 변화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모님은 5남매 중에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언니와는 달리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운동회를 준비하면서 무용을 연습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분홍신발을 신었는데 자신만 검정색 신발을 신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잘못 사 오셨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신발 가게 주인은 한번 신었던 신발은 바꿔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자신만 검정색 신발을 신는 것이 부끄러워 아버지에게 분홍 신발을 다시 사 달라고 했지만 심하게 꾸중만 들었습니다. 사모님은 다락에 있는 통에서 돈을 훔쳐 분홍색 신발을 샀습니다. 그 날 저녁에 그것이 들통이나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고는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집에서 쫓겨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새 울었습니다. 무섭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습니다. 장사를 하시고 늦게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 나섰고 새벽녘에서야 어머니를 만나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여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로 지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굳게 닫혔습니다. 성장해서도 아버지와의 대화는 어색했고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같은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혼한 남편은 아버지를 닮아 무능했고 술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더 미웠습니다. 

결혼해서도 직장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과 집의 중간 지점에서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로 집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아이들이 술에 취해 길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집적거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을 혼내 쫓아내고는 길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얼굴이 누군가를 많이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수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인 상태로 보냈습니다. 중풍이 심해 조금이라도 거동 하려면 매우 힘이 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버스로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그것도 혼자 와 본 적이 없는 딸의 집을 찾아오다가 쓰러진 것입니다. 아버지를 집으로 옮겼지만 곧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누워계신 아버지의 옷깃 속에 무엇인가 불룩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그것을 꺼내어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 되어 색이 바랄대로 바란 신문지 뭉치였습니다. 겹겹이 싸인 신문지를 풀고 또 풀었습니다. 겹겹이 쌓인 신문지에서 나온 것은 색이 바래 희미해진 분홍 신발이었습니다. 28년 전의 운동회 때의 분홍신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사모님은 분홍신발을 품에 앉고 아버지의 시신에 엎드려 통곡을 했습니다. 그 색 바랜 분홍신발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분홍신발로 인해 딸을 때린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 일로 마음 아파했던 것입니다. 훗날에 언젠가는 모르지만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고 분홍신발을 샀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며 딸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해 주며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분홍신발을 신문으로 꽁꽁 싸두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아버지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미안함과 사랑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롱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분홍신발을 꺼내어 품에 넣고 아픈 몸을 이끌고 딸의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 딸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담은 분홍신발을 가슴에 품고 딸을 찾아 가다 지쳐서 길거리에 쓰러지고 결국은 돌아가셨습니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love는 결국 아버지를 향한 딸의 like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불만과 불평이 사모님의 마음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색이 바란 분홍신발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감동은 아버지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미움과 아픔이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변화는 그녀의 삶을 변화시켰고 결국은 그의 남편의 인생까지 변화시켰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 관계가 자기중심적인 like로 맺어있다면 나의 감정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게 됩니다. 그 관계에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위한 헌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관계는 감동과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love로 맺어 졌다면 내 감정과 상황을 떠나 서로에게서 생명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 관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like적인 신앙은 상황에 따라 바뀝니다. 변덕을 부립니다. 그러나 love적인 신앙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킵니다. love적인 신앙은 감동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에는 신앙의 성숙한 성장이 따릅니다. 

이 주일 아침에 우리들의 믿음의 눈을 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변함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들의 신앙이 like가 아닌 love로 응답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의 자리가 감동과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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