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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의 꿈 (사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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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꿈 (사 11:1~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 역사는 진보하는가?

아무리 시절이 수상해도 시간은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벌써 6월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뭔가로 달아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식식거리며 혼자 화를 내거나, 비죽거리며 비웃는 이들을 보면서 저는 우리 시대의 불행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절에 자꾸 떠오르는 것은 어느 히브리 시인의 노래입니다. 그는 아들딸들이 씩씩하고 우아하게 자라고, 곳간에 곡식이 넘치고, 기르는 육축들이 늘어나는 세상을 꿈꾸면서,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시144:14)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는 이런 백성이 주의 복을 받은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복을 누릴 수 없는 백성인 모양입니다.

요즘 경찰들의 행태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방영된 에서 보여진 경찰/전경들의 모습을 보며 저들이 국민들을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함부로 욕하고, 방패와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액을 분사하고,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반해서, 위로부터의 명령 때문에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들이 경험하게 될 자기 배반의 경험은 어떠한 형태로든 내적 상처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위에서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저 젊은이들을 그런 내적 곤경으로 내모는 이 세상이 참 안타깝습니다.

남북 관계도 파탄지경입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북한은 핵실험을 재개했고, 단거리 및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서해안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통일의 밑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개성공단이 존폐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이미 장비를 철수하기 시작한 기업들이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국가정보원은 26살의 김정운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정보를 흘리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의도가 무엇이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북한은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마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합니다. 역사의 진보란 몽상가들의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런 꿈은 허망한 것인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한 사람

이사야가 활동하던 8세기 말엽 유다는 강대국인 아시리아의 팽창정책과 그에 맞서는 애굽과 블레셋 동맹의 틈바구니에서 고초를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 편을 들더라도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민중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강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유린되는 약자들의 아픔을 깊이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 밝은 예언자로서 그는 강자들의 폭력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절망의 심연에 떨어진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들려줍니다.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에 주목합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부어집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는 강자들과 언론에 의해 왜곡된 현실에 현혹되지 않고, 실체적 진실에 입각해서 판단합니다. 마음을 낮은 데 두기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잔인한 자를 단죄합니다. 그는 아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암5:24) 하는 분입니다.

주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은 역사 속에, 그리고 이웃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깃발은 축 늘어지지만, 바람이 불면 펄럭입니다.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던 피에르 신부는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바람과 돛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배를 앞으로 몰아가기 위해 돛을 펼쳤다 해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람이 불더라도 돛이 펴져 있지 않다면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키를 잡고 돛을 폅니다. 그제야 성령께서 그를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그레그 모텐슨과 데이비드 올리버 렐린의 <<세 잔의 차>>는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험준하다는 히말라야의 K2 봉을 등정하려다가 실패한 모텐슨이라는 미국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하산하는 중에 길을 잃어 코르페라는 오지 마을에 들어가게 됩니다. 현지인들의 환대 속에서 기력을 회복한 그는, 마을 아이들이 건물조차 없는 노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학교를 세워주겠다는 꿈을 품습니다. 무일푼인 사람이었지만 그의 꿈은 결국 결실을 맺었고, 그는 지금까지 80여 곳이 넘는 오지 마을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K2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K2보다 더 높고 큰 산 곧 사람들의 편견과 무지의 산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이해와 소통과 사랑의 씨를 심었습니다. 저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을 옮기는 믿음이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도록 방치된 아이들에 대한 마음 아픔이었습니다. 마음 아픔이 그에게 꿈을 품게 만들었고, 그의 소박한 꿈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꿈을 품은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이 땅에서 실현하십니다. 

• 진주 같은 꿈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품은 이가 없다면 역사는 인간의 욕망의 진창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세상의 꿈, 그것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될 꿈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시가 가슴 저리게 다가옵니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부분

모세는 애굽의 전제정치 아래서 억압당하고 있던 히브리들의 마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꿈을 불어넣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의 힘으로 세상의 무력을 이겨내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眞理把持)의 꿈을 세계인들의 가슴에 일깨웠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아이들과 백인 아이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평화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새 세상의 꿈을 미국인들의 가슴에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백향목처럼 우뚝 솟은 이들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의 꿈을 인류의 가슴에 새겨 넣으셨습니다. 이 모든 꿈을 이미지로 그려 보인 것이 오늘 이사야의 본문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 암소와 곰이 벗이 되는 세상,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는 세상…이사야는 이런 세상을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라 명명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미국과 알 카에다가, 대한민국이 북한과,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이전에 적대적이었던 나라가, 개인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공존하는 세상, 꿈같은 일입니다. 이런 세상이 과연 가능할까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이런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무간지옥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세상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꿈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완상 박사는 “폭력을 정상적인 것으로 제도화하는 문명과 제국의 삶을 대체할 새로운 삶의 문화를 세워가야”(<<예수 없는 예수교회>>, 264쪽) 한다고 말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에 남는 것은 불화와 갈등뿐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길은 다른 것 없습니다. 강자의 식성이 변해야 합니다. 한완상 박사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는 대목에 주목합니다. 곧 강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어야 비로소 둘 사이의 관계가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자의 주식은 무엇입니까? 덜 갖고,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자들이 다른 이들을 해치면서까지 자기 배를 채우는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약한 이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배려할 때 평화의 세상은 시작됩니다. 그런 세상은 누군가가 거저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이사야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내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보듬어 안고, 또 북돋워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계십니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역사의 진보란 보듬어 안는 능력이 커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GNP가 높아지고, 생활의 편의를 위한 도구들이 늘어나도, 다른 이들을 품어 안으려는 우리 마음이 좁아진다면 우리는 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평화운동 단체인 <비폭력평화물결> 대표이면서 평화신학을 가르치는 박성용 목사가 미국에서 지내던 어느 날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집 앞을 지나 공원 쪽으로 걸어가는데, 옆집 정원에 토끼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더랍니다. 어찌나 예쁜지 살금살금 다가서는 데, 인기척을 느낀 토끼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둘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박 목사는 토끼에게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단다.’ 그런데 토끼는 얼른 몸을 돌이켜 덤불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박 목사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 있었는데, 문득 ‘저 토끼에 비해서 내가 너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크다는 사실이 어떤 대상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신 주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신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파랗게, 땅 전체를>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봄 풀잎 

시인은 이른 봄날, 여리디 여린 새싹이 흙을 밀어올리고 솟아오르는 광경을 이적에나 접한 듯 바라보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는 풀잎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하지만 나는 믿습니다.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자기 선 자리에서 말없이 자기 생명의 몫을 살아내는 사람들/것들 덕분임을 말입니다. 그들은 뿌리와 같은 이들입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뿌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역사를 곧추세우는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절망에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우들이 역사의 꿈을 실현하는 주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적인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기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 발전에 무임승차하기를 거부하십시오.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 우리들 각자에게 품부된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울면서 씨를 뿌려야 결실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이 뜨거운 6월, 우리를 평화와 생명의 일꾼으로 삼아달라고 기도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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