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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그리스도 이름 위에 세운 교회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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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이름 위에 세운 교회 (행 3:1~10) 
 

오늘은 우리교회 설립67주년기념주일입니다. 사람으로 비하자면 고희를 눈앞에 둔 교회입니다. 예전에는 환갑을 굉장하게 생각했지만, 요즘은 고희도 젊다시며 젊은이 못잖게 젊게 사십니다. 우리교회를 바라보시는 여러분의 마음도 그러하신지요? 

굳이 따지자면, 나이 값은 수에 있다기보다는 성숙함에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풍겨 나오는 기품 속에서 연륜이 느껴지는 거지요. 젊음의 상징인 외모로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내적 성숙함이 나이 값입니다. 교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예수님 닮은 기품이 드러날 때, 좋은 교회 아니겠습니까?

▶ 모든 것에는 주기(cycle)라는 것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퇴보하는 일이 없이 지속적인 발전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성숙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無常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人生도 無常하다). 경제도 싸이클이 있습니다. 歷史에도 싸이클이 있습니다. 경제만 그럴까요? 역사만 그럴까요? 교회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런데 왜, 역사상 수많은 교회들이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습니까? 

그 수많던 교회들이, 쟁쟁하던 교회들이 생겨났다간 역사 속에 사라지곤 했습니다. 2000년 동안 命脈을 이어온 교회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없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7교회들—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교회가 있었다는 흔적만 덩그러니 남겨 두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전하여 세웠던 교회들—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다 사라졌습니다. 그 교회들이 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요즘 교회들 중에는, 교회의 이름을 바꾸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교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 역사를 시작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부여가 아니겠습니까? 

역사학자 Oswald Spengler는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이라는 책에서 ‘역사는 생명체와 같은 숙명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했습니다. 슈팽글러의 이러한 생각이 역사학자 A. J. Toynbee(1889-1975)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굳건해 보이기만 하는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견한 슈팽글러의 책을 읽은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논했습니다. 그러나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책에서 슈팽글러와는 달리 문명도 생명체와 같은 주기를 가지고는 있긴 하지만, 모두 똑같은 과정을 밟는 것은 아니다(숙명론적인 것은 아니다)는 다소 유연한 관점을 피력했습니다. 다양한 환경 속에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진전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또 도전挑戰에 대해서 구성원들이 어떻게 응전應戰하느냐에 따라서 그 문명과 역사의 운명은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구성원들이 문명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서, 발생과 성장과 쇠퇴와 해체(소멸)의 과정을 서로 다르게 밟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교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 사도행전 3, 1-10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쇠퇴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해체(消滅, 敗亡) 직전에 있는 󰡔유대교의 실상󰡕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갓 태어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 세워진 성령 충만한 꿈틀꿈틀 거리는 생명력 왕성한 초기 예루살렘교회를 봅니다. 이 둘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하나는 패망을 목전에 둔 유대종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제 막 떠오며 이글거리는 태양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쇠퇴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자리는 이렇습니다. 오순절성령강림과 더불어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되어 막 부흥해갈 때입니다. 믿는 자들이 서로 모든 물건을 통용합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씁니다. 또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눠 먹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제9시(오후3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갈 때 있었던 일입니다. 때마침 성전 美門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입니다. 나이는 40세 쯤 되었습니다(행 4, 22).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며 생존하던 사람입니다. 

성전 美門은, 고린도 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외관이 장엄하고 화려한 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은으로 도금되거나 금으로 장식된 문들보다 가치가 훨씬 더 나가는 문이라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성전 문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문이 되었습니다.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어디 이 사람뿐이겠습니까? 다른 문들과 행각주변 곳곳에서 구걸했습니다. 이 사람은 행운을 잡은 거지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몫이 제일 좋은 곳에서 구걸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糞門). 특히 美門에는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저명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장 즐겨 애용하던 문입니다.

이 점을 주목하기기 바랍니다. 바로 여기에 유대종교가 패망(解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속으로 答). 당시 유대종교의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불쌍한 거지가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것을 싫어했을까요? 좋아했을까요? 미관상 좋지 않아서, 싫어했을까요? 오히려 좋아했을까요? 

예전에, 월드컵과 올림픽 경기가 열릴 때, 서울시에서 노점상(포장마차)들을 외국인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강제 철거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추한 모습 보여주기가 싫어서였겠지요. 거리를 말끔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요즘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가장 인상깊게 체험하는 문화의 접촉점이 노점상 떡볶이(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유대종교의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이 거지를 좋아했다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아시는 대로 유대종교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구제행위는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되는 매우 큰 덕목 중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거지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였던 셈이지요. 그러다보니 시장이나, 성전 같은 곳에서 거지들에게 동전 몇 닢을 던져주는 행위를 좋아했습니다. 자랑거리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패망직전에 있었던 유대종교의 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거지에게 자선행위로 동전을 던져줄 줄 알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위선적인 신앙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런 율법주의적이고 외식하는 신앙을 인정해주셨을까요? 萬無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형식적인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겁니다. 

남산, 높은뜻숭의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종종 목사님들과 함께 명동에 있는 명동교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가려면 지하도를 건너가야 하는데, 건너다보면 지하도 계단 한쪽에서 차가운 바닥에 박스하나 깔고는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벌벌 떨면서 구걸하는 노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드리고 갈까 하다가, 오면서 제과점에서 빵이라도 사드려야지 하고는 그냥 지나쳤습니다(빵을 사다드리면서 할아버지 얼굴을 보았는데···구걸직업인). 대게 구걸하는 사람이나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들을 가만 보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동전 몇 푼이라도 받으면 그만입니다. 던져주기만 해도 큰 선심 쓰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큰 문제라는 거지요.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던 거지도 돈 주는 상대방에게 관심 없습니다. 고마움 없습니다. 그만 그런 것 아닙니다. 그에게 동전 몇 푼이라도 던져주며, 하나님께 상 받기를 바라던 당시 유대종교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지는 자기가 하나님께 받을 상을 위한 구제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 그런데, 보십시오. 이 거지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제9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자, 이 거지는 역시 늘 하던 대로 돈을 얻을까 해서 구걸합니다. 그가 구걸했을 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구걸하고 있던 자신을 주목하는 두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여”합니다. “주목하여”(아테니사스, ateni,saj)라는 말은 거지를 주의 깊게 응시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형편이 어떤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것을 보아 알았습니다. 나이 40이 넘도록 이렇게 살아온 그를 불쌍히 여긴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왔겠습니까? 살면서 절망할 때가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그런 그를 누구 한 사람, 주목하여 상대해 준 사람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긴급명령도 받습니다. 거지의 온 마음 중심을 집중시키면서 단호하게, 긴급하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 가득하게 한 명령입니다. “너는 우리를 보라!” 

단순한 구걸을 할 때는, 상대방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고개 숙인 채, 손만 내밀어도 상관없습니다. 구제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 거지가 누구인지? 구태여 알 필요가 없습니다. 관심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동전 몇 푼 던져주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패망을 목전에 둔 당시 유대종교의 방식이었고, 유대종교가 말하는 신앙의 실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거지를 “주목하여” 보면서 “너는 우리를 보라”고 명령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패망을 눈앞에 둔 유대종교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꽉 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거지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무엇을 줄 것인지, 평소와는 다른 그 무엇을 얻을까 해서, 두 사도를 주목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그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합니다. 그리고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서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합니다(여기, 이 거지가 성전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와서 구걸하던 거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 취급받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평생 첨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 성전에 들어가서—이스라엘人의 뜰—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곧, 그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 이 사건에서 우리는 패망하는 유대종교와 갓 태어난 예루살렘교회와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차이점이 바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본질이라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다” 했습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돈입니다(동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종교인들이 던져주는 은과 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귀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을 주겠다는 말씀이지요. 여기 말하는 은과 금은, 곧 당시 유대종교가 가지고 있던 형식적인 신앙, 그들의 전통, 그들의 율법주의적인 신앙행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어느 기업에 회장님을 모시는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회장님 타시던 자동차는, 독일제 BMW 최고급자동차였습니다. 그런데 그 운전기사가 회장님의 자동차를 얼마나 아끼는 지,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차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차를 너무 아낀 나머지, 회장님이 흙 묻은 신발로 차를 타시려자, 기겁하면서 가로막습니다. “회장님, 신발 먼지 좀 털고 타시지요. 그냥 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이쯤 되면 심각합니다. 차가 중요합니까? 회장님 잘 모시는 일이 중요합니까? 주객이 전도되어도 유분수지요. 이런 기사를 회장님 잘 모시는 기사라 할 수 있습니까? 유대종교가 그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하나님의 뜻)보다는, 그들의 전통이 더 중요했고, 그들이 만든 율법조문이 더 중요했던 겁니다. 이런 것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말한 銀과 金의 意味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에게는 이와 같은 은과 금이 없을까요? 오늘 교회도 은과 금을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시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은과 금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도 없는 전통과 제도(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포도주와 부대 둘이 다 保全 됨), 명예와 권력이 된 교회의 직제들(섬김 자리), 물량주의, 성공주의(2005년 월간조선, 󰡔큰 교회, 큰 목사이야기󰡕), 21세기 감성시대에 부응하여 ‘진리의 말씀’, ‘복음’, ‘하나님의 뜻’보다는 주관적인 감정과 감성에 호소하는 교회성향들(고객감동, 슈퍼마켓 쇼핑하듯) 이런 것들이 다, 오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銀과 金입니다. 이런 은과 금이 많다고 해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실상은 가난한 교회).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전인격, 복음, 삶)이 높임 받아야 교회입니다. 사람의 그 무엇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앉은뱅이인 우리를 걷게 하시고, 뛰게 하시고, 이방인의 뜰에서만 날마다 구걸하며 살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뜰’(성전 안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 높임 받는 교회이어야, 쇠퇴하고 패망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의 이유도 바뀌어야 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날마다 생존을 위하여 구걸하던 거지의 삶과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동전 몇 푼을 구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자 되어야 합니다. 내 모든 삶을 주목하여 응시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나를 주목하여 보라시는 명령에 응답합시다. 그리고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다. 

67주년 맞은 우리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나름대로 소중하게 여기며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일까요? 67년 전 이곳에 우리교회가 첨 시작될 때,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맘 가지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은과 금들을 버리십시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 우리교회를 세워 가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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