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용서하며, 용서받으며 (마 6:9~13)

  • 잡초 잡초
  • 208
  • 0

첨부 1


용서하며, 용서받으며 (마 6:9~13)


오늘도 주기도문 강해 설교를 계속합니다. 주기도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있어서 정신의 모범, 순서의 모범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시작된 주기도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둘째, 하나님 나라를 위한 “나라이 임하옵시며” 셋째, 하나님의 뜻을 위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우선적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다음 주기도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첫 번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달 분의 양식이 아니고 평생 먹을 양식이 아닌 그 때 그 때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일용할 양식 주심을 감사하고,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건강과 식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왕성한 식욕도 함께 허락해 주셔서 우리의 영혼도 건강하게 해주시기를 항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기도 중 인간 자신을 위한 두 번째 부분 곧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F. B. Meyer는 <이 앞부분의 기도와, 이 구절은 ‘그리고’로 함께 결합되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매일 필요한 만큼, 자주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과, 우리가 용서받을 필요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필요만큼 절박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는 그의 양식 주심만큼 풍성하며, 아낌없으시다는 점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기도문의 이 구절은 가장 논란이 많은 구절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구절이 합당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주기도문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주기도문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무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우리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죄 사함을 받아,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기 때문에, 주기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2)우리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 성령님이 임하여, 우리의 죄성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기도는 할 필요성이 없다는 사람들이 있고, 3)주기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사실에 근거하여, 그 대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조건부적인 기도와 같으므로,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먼저 ‘죄’란 낱말은 본래 ‘부채들’ ‘빚들’이란 뜻으로 복수로 기록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들을, 빚진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들을, 빚들을, 사하여 주옵시며....” 이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날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상 범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베드로는 너무도 황송한 나머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사양을 한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석에서 “주여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씻긴다’는 말은 죄 씻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 씻음을 받지 아니하면,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씻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목욕이고 2)발 씻음입니다. 주님은 목욕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중생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이미 구원, 중생,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단 한 번만으로, 영원히 해결되어 버리는 것이므로, 발 씻음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중생 하게 해주시옵소서!’ ‘거듭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와의 투쟁이 전혀 상관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상으로 보아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악과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발 씻음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비록 목욕을 했을지라도,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때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발은 어느새 더럽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물며 팔레스틴 지방은 먼지가 많은 곳인데다가, 그들이 샌들을 신고 다님을 감안하면,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해도, 발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 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세상과 접촉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내 영혼 가운데 더럽혀져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 했을 때마다, 또 다시 구원을 얻어야 합니까? 또 다시 중생을 받아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중생은, 의롭다 함을 받음은, 예수를 믿는 순간 단 한 번만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므로, 우리에게는 발 씻음과 같은 회개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연약하여 죄를 범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 1서 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백’하는 일은, 곧 발 씻음과 같은 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고 있는 이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다름 아닌 그의 자녀들의 기도인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죄란, 불신자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의 자녀들의 범죄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의 죄는 무서운 정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성도들의 죄는 불신자들의 죄와 성격이 판이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죄란 법정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죄 문제와는 다른 것으로, 아버지는 자녀들의 죄를 얼마든지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와서 자백해야 할 자녀들의 범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다시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 체험을 통하여 거룩하게 성화 되고, 내 속의 모든 죄악된 성품이 제거되었으므로, 죄의 자백 같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들,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답변해야 합니까?

요1서 1: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리’는 물론 두 말할 나위 없이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성경은 신자들이 범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성자일수록, 자기의 죄악에 대해서 더욱 민감했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갈수록, 거룩한 성자가 되어 갈수록,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더욱 민감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완전주의자들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가장 불완전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서도,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니, 더욱 불완전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셋째, 주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줄로 아는, 조건부 기도이기 때문에 할 수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기도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든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에 근거하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이 구절이 우리에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란 본래 ‘빚’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갚지 않고 있는 빚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갚아야 할 빚이 있음에도, 갚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약 4:17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빚이며, 성경은 그 빚들이 죄라고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큰 죄가 없는 것입니다.

2. 죄의 자백의 필요성입니다.

칼빈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을 갚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루터는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발을 씻어도 또 다시 더러워진다고, 아예 발 씻음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이주태 선교사님에 말에 의하면,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세수할 것을 가르치자, 또 더러워지는데 세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시 32:3-4절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죄를 자백하지 않을 때, 영혼의 피곤함과 침체 상태를, 여름 가뭄에 시들은 풀에다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하면서, 죄 사함의 기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 타인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이런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몸과, 처와, 자식들을 다 팔아 갚으려고 하였지만,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불쌍히 여겨,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났습니다. 그는 동관의 멱살을 잡고 당장에 빚을 갚으라고 졸라댔습니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면서,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사정하였지만,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를 잡아다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주인은 종을 불러 들여 노발대발하면서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하면서, 다시 그 빚을 모두 갚도록 감옥에 넣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인의 죄를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영국의 케롤라인 여왕의 임종시에, 체스터 휠드 경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남을 용서하지 않고, 또 용서도 받지 못하던 사람이 죽는구나!”

문교부 장관을 지낸 오천석 씨가 모은 ‘노란 손수건’ 이라는 제목의 실화가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도 이름 높은 ‘포터 로더데일’ 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는 생기에 찬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허술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묵묵히 앉아 있었습니다. 사내의 이름은 ‘빙고’였고, 4년 동안 뉴욕의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집요하게 빙고라는 사람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어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에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소.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할 형편인 만큼, 만일 그렇게 오래 동안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든지, 아이들이 자꾸 아버지를 찾는다든지, 혹은 혼자 사는 것이 괴롭고 고생이 된다면, 나를 잊어 달라고 했소.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재혼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여자는 훌륭한 여인이오. 나를 그냥 잊어버려 달라고 썼소. 편지를 안 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이란 말이죠?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소!”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은 지난주일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나는 또 편지를 썼소. 옛날에 우리는 부른스위크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가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 두라고 말했소. 노란 손수건이 참나무에 걸려 있으면, 내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갈 것이라고. 만일 재혼을 했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고. 나도 잊겠다고 썼소.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건 가 버리는 거요”

버스 안의 젊은이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서, 지대한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일이기나 한 것처럼, 모두들 흥분에 들떠 자기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폈습니다. 버스는 계속 달렸습니다. 마침내 이정표는 부른스위크가 2마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들은 모두 오른쪽 창문 옆자리로 다가붙어 빙고가 말한 그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젊은이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 참나무에는 온통 노란 수건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바람 속에 환영의 깃발로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치고 있는 동안, 전과자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습니다.> 참으로 감동 깊은 이야기지요? 

‘코리텐 붐’이라는 화란의 유명한 여류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제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집에 숨겼다는 죄목으로, 아버지, 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언니는 사망을 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 후 어느 날, 코리텐 붐 여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코리텐 붐 여사는 주님께 독일인들에게만은 갈 수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딸아, 나는 나를 욕하고 등진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네가 내 딸이면, 너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녀는 드디어 독일에 가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녀가 닿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고, 예배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코리텐 붐 여사에게 찾아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감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코리텐 붐 여사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를 표하는데, 문득 다가서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며, 채찍질을 하던 못된 간수였습니다. 코리텐 붐 여사는 그 간수를 바라 본 순간, 그만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잔인했던 원수에게 도저히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진통 속에서,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믿나이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간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하늘의 사랑과 평화가 자기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주는 주님의 능력이, 그녀의 몸에 충만하여 10년이나 젊어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이런 말씀들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사랑하고 용서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이 주기도를 하는 우리 모두, 내게 잘못을 저지른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우리 자신이 연약하여 범죄 했을 때마다 회개 자복하여 주님께 용서받는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