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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덴에서 (행 17:16~18, 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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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서 (행 17:16~18, 32~34)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까지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활동한 교부 신학자 터튤리안(Tertullian, AD150-230)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기독교 신앙이 태어난 모태가 갈보리 십자가 언덕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면, 아테네는 철학이 태어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종종 <신앙과 이성>, <종교(기독교)와 철학>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469년에 철학의 대명사인 소크라테스(BC469-399)가 태어납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제자 플라톤(BC427-347)은 그의 스승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철학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는 기원전 385년경 아테네 근교에 오늘의 대학의 원형이라 할수 있는 아카데미(Academeia)를 설립합니다. 이 아카데미에서 다시 플라톤의 탁월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입학하여 20년을 공부한 후 불세출의 철학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테네는 그 후 인류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을 추적하는 중에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베뢰아로 갑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는 약 60km거리로 2-3일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인들보다 더 신사적이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예의있게 경청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17:11-12)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어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돌보게 하고 자신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드디어 지성의 도시 아테네(아덴)에 도착하게 됩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320km의 거리가 됩니다. 행17:14을 보면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바울은 배로 여행한 것으로 암시됩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여기 바다가 언급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지도 참조) 자, 이렇게 해서 아테네에 배로 입성한 바울의 선교 실적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바울의 아덴 선교의 실상과 아덴의 진정한 필요, 그리고 아덴 사람들의 반응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바울의 아덴 선교의 레슨은 무엇입니까?

1. 아덴의 실상-우상의 도시라는 사실입니다.

아덴은 지성의 도시, 철학의 도시였지만 오늘 바울이 바라 본 이 도시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6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이것이 지성의 실상, 인간 지식의 실상, 그리고 지식의 도시 아덴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성, 하나님 없는 지식은 결국 인간과 도시를 우상 숭배로 이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 아덴의 거리는 우상의 거리에 불과했습니다. 

행17:22-23에 보면 유명한 아레오바고 언덕(아레스 Ares 신의 언덕, 혹은 마르스 Mars 신의 언덕으로 아덴 시의 중요 회의가 열리던 곳)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이것이 바로 아덴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일 롬1:22-23에서 하나님을 떠난 마음, 하나님을 떠난 지성의 결국이 곧 우상 숭배라고 증거합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울이 아덴 시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격분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아덴의 지식인들이 우상에게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덴시에 가면 아레오바고 언덕에 자리 잡은 파르테논 신전을 위시한 수많은 사당과 신전, 제단의 자취들이 고스란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곳에서 문화를 감동하지만 우상의 흔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 아테네라는 도시명 그 자체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로마식으로는 아테네를 미네르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테네(혹은 미네르바)는 지혜의 신이요, 학문의 신이었습니다. 지혜와 학문은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체도 우상이 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 교인들 중에는 자식들이 고2, 고3이 되면 부모가 나서서 자녀들의 교회 생활이나 활동을 막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미 교회 안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거부하고 신앙을 등진다면 자녀들이 명문 대학에 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우리 자녀들을 지식의 우상, 성공의 우상에 갔다 바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2. 아덴의 필요복음만이 참된 필요라는 사실입니다.

자, 이런 아덴의 도성에서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했을까요? 바울은 또 하나의 철학의 학설을 전했을까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덴의 도성에는 이미 여러 철학의 가르침들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바울은 회당에서도 장터(아고라)에서도 사람들을 만나 변론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18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쌔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당시 아덴에서 가장 인기를 얻고 경쟁관계에 있었던 두개의 철학 사조가 바로 에피큐리안학파와 스토아학파였다고 증언합니다. 에피큐리안 학파(시조 에피큐로스, BC270 사망)가 삶으로부터의 도피와 쾌락을 가르치고 있었음에 반하여 스토아학파(시조 제논, BC265 사망)는 숙명론과 복종, 고통의 감수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라고 가르치고 있었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운명으로 수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논쟁하며 바울은 무엇을 증거했다고 했습니까?

한마다로 바울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철학이 아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방금 읽은 18절은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을 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가 복음이 아닙니까? 부활의 소식이 복음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예수의 부활로 인류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철학으로 죄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보았다고 고백한 사람이 있었나요? 철학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고 간증한 사람이 있었나요? 그러나 죽음 건너에 부활의 확실한 사실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죽음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믿는 자들에게 부활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보장된 사건이기 때문에 성도의 죽음은 부활의 시간까지의 잠자는 안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도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에서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다시 <깨어 남>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잠자리에 들면서 울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잠듬은 깨어나는 다음 아침까지의 안식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인생의 해답이 아닙니다. 지식도 인생의 해답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만이 해답입니다. 예수만이 해답입니다. 아덴시가 필요로 했던 것이 바로 이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도시가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이 동일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덴의 필요-복음만이 그 참된 필요임을 확신하신다면, 오늘 우리의 도시, 우리의 일터, 우리의 마을, 우리의 학원, 우리의 가정의 필요, 우리 이웃들의 필요-그것도 오직 복음인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아덴의 반응세 가지 결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본문32-34절에 보면 바울 사도의 복음의 증거에 대하여 아덴 사람들은 정확하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 반응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32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무슨 말입니다. 첫째 유형은 조롱 혹은 야유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유형은 오늘 우리 식 표현으로 하면 결신 보류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좀 더 연구해 보고 좀 더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제가 40년 전에 예수 만나고 너무 기뻐 전도했더니 응답이 생각해 보고였습니다. 최근에 다시 만나 전도했더니 지금도 생각해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아덴의 희망은 세 번째 유형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에게서 시작됩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이 몇 사람-그들이 바로 아덴의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아덴이 변화되기 위해 반드시 수천의 사람들이 한 순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몇 사람이면 됩니다. 한 나라의 변화, 한 도시의 변화, 한 일터의 변화는 언제나 몇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 몇 사람이 확실히 변하고 그 몇 사람이 확실히 복음의 희망을 붙들고 살면 마침내 거대한 도시의 변혁, 민족의 변혁이 일어납니다. 

성경 해석 자들 중에는 바울이 아덴에서 몇 사람밖에 구원하지 못했다고 해서 아덴 선교를 실패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던 유월절 명절 기간에 요한12:20,21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다는 말씀을 듣고 보이신 예수님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요한12:23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유명한 요한12: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헬라인 몇 사람을 위해서도 기쁘게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한 알의 밀이 되시겠다는 선언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들을 통해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될 수많은 열매를 그분은 보신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를 보십시오. 지금의 그리스는 정교회를 사실상 국교로 하는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날 그리스에서는 국민의 98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대답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물론 그들이 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여름 우리도 우리의 아고라, 우리의 회당, 우리의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를 말쟁이라고 비웃고 야유 하는 무리가 있어도, 우리를 개독교로 폄하하는 이웃들이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몇 사람을 건져도 그것은 성공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마을, 우리의 일터, 우리의 학원,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불씨, 기적의 시작이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감동하시고 여건을 주시면 바다 건너 이웃 나라 아고라에도 이웃 나라의 산당에도 이웃 나라 회당에도 이웃 나라의 아레오바고 그 나라 역사의 중심 언덕에도 가십시오.

 그리고 그 나라의 철학이 그 나라의 문화가 그 나라의 민속 종교가 대답하지 못한 복음을 들려주십시오. 예수가 희망이라고 전하십시오. 부활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의 해답이라고 전하십시오. 적어도 몇 사람은 복음을 듣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그 민족을 변화시키는 밀알이 될 것을 믿고 그들을 축복하고 돌아오십시오. 오래지 않아 우리는 그 도시 그 나라의 변혁의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덴의 레슨입니다. 아덴의 교훈입니다. 아덴의 도전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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