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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덴의 비극 (창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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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비극 (창 3:1~13)

 
신학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입니다. 이 3장은 인간의 죄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이 내용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갈등 부분이 있기 때문에 계속 신학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사망과 고통이 왔다고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데 왜 죄가 인간에게 왔는가? 선악과의 존재는 무엇이며 이것을 인간이 따먹을 줄 아는데도 하나님이 왜 만들어놓으셨는가? 또 선악과라는 이 자체는 사과 같은 열매냐, 아니면 상징적 의미냐? 이런 등등의 이야기가 끝없이 논쟁거리로 내려왔습니다. 

아마 교우 여러분들도 한번쯤 그러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이 가능한가?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완벽하게 안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알려주시는 것만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말하는 계시는 또한 불완전성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크게 신앙적으로 존경받는 분들이 대통령 출마를 해서 하신 말씀이 “나는 대통령 되라고 하나님께 계시 받았다.” 여러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중에 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러면 그런 사람은 가짜인가? 신앙 좋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는가? 계시의 불완전성입니다. 이

성경은 논리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어떤 문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옵니다. 인간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성경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유치한 질문에 답변하려고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이 성경에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 있고 그런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만을 취급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은 정말 계신가, 안계신가 이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답변하려고 쓴 기록이 아닌 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성경을 봐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저의 아들과 어디를 즐겁게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옆에 있는 이 젊은이가 당신 아들이요?” “그렇습니다.” “정말 당신 아들인지 아닌지 나에게 증거를 대시오.” 그때 저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면 동사무소로 갑시다. 내가 호적등본을 떼어 줄 테니 오십시오.” 그리고 데리고 가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DNA검사를 해드릴 테니 병원으로 가십시다.” 이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 사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멀쩡하게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러붙어서 아들인지 아닌지 증거를 대라고 하십니까? 믿지 못할 때는 그냥 가시오. 당신 일이나 하시오.” 이렇게 대답할 것 아닙니까? 

만약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아닙니다. 나는 오늘 이 의문을 반드시 해결해야 됩니다. 당신이 이것을 나에게 밝히 증거하지 않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끈질기게 군다면 그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참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아마 쌍소리를 해서 대꾸할 겁니다. “아니, 이놈의 개뼈다귀 같은 사람이 들러붙어서 뭐하는 짓이야?” 이런 반응이 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다가 이번에는 더 기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옆에 가던 내 아들이 “당신이 정말 내 아버지요?” 물어봤습니다. 그럴 때 또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마 기가 막혀서 “아니다. 너는 길바닥에서 주워 길렀다.”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옛날의 어른들은 이런 소리 많이 했습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길렀다.” 왜? 기본적으로 이것은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해도 괜찮아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유치한 질문에 답변하시는 것이 성경은 아닙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이상하던가 아니면 하나님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질문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뱀이 인간을 지배하는 듯한 게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뱀이란 마귀를 뜻합니다. 이 사탄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성경 전체에 확실성 있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것이 나타남으로 인간 비극이 초래되는데 이 존재는 구조상 천사와 같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며 영적인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을 다스리는 고난을 주셨는데 천사에게는 영적 세계의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셨고 인간 세계는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특별한 것이 주워졌습니다. 다른 동물이나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율성이 주워졌습니다. 여러분, 동물들은 에덴동산에서 지금까지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합니다. 그 자리를 그렇게 지키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죠? 인간도 끝없는 창조를 하고 있어서 이제는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복제하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구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 자율성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반했다는 겁니다. 천사들의 자율성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율성 때문에 인간과 천사의 끝없는 호기심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이 뭐냐? ‘내가 하나님이 되면 안 될까?’ 이겁니다. 천사 중에 대장격인 천사장이 하나님이 대적하고자 자기 세계를 만들었죠? 그것이 사탄이 되었죠? 그 사탄은 자기 세계를 만들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하고 지금 나서는 겁니다. 

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인간은 호기심이 발동해서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에 손을 댔다는 겁니다. 왜 선악과를 땄는가? 하나님의 고유 영역에 왜 인간이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서 범죄를 했는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그 사건이 있는 이후로 영원히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십계명 중에 첫 번째, 두 번째 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삼지 말라는 겁니다. 따라서 “너도 하나님이 아니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경배 드리고 예배드려야지 네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지 말라.”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로 이렇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려고 하던 천사장이 사탄이 되고 그 이후 그 존재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가도록 방해하는 대적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만도 사탄이라고 하는 존재가 33번 언급되고 마귀라고 하는 이름으로 32번 나오고 귀신의 왕, 바알세블, 공중 권세 잡은 자, 시험하는 자, 참소하는 자…. 수없이 마귀의 존재성에 대해 인정하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마귀는 마지막에 영원한 심판 무적행의 형벌을 주겠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진행의 방해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마음을 먹고 일을 하려고 하면 마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우리 교회가 세계 선교를 합니다. 사실 시험 받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것을 이기고 나가야지 괜히 마귀 시험에 흔들렸다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드리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려고 준비하시는데 마귀는 예수를 초전박살 내려고 예수 곁에 와서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대고 일을 하지 못하도록 유혹하지 않습니까?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갔더니 하나님 앞에 헌금 좀 하려고 했다가 욕심이 생겨서 다 거두잖아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느냐?” 하고 둘이 벌을 받아 죽는 모습이 성경에 나타나고,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를 죽이려고 유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탄은 에덴동산부터 인간을 괴롭히는 활동자로 나타나고 있는데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탄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하나님이 사탄의 영역을 제한하셨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2절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시간 안에서만 활동할 수가 있고 영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욥기서에 나옵니다. “네가 욥의 생명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 그 이하에서만 활동하지 그 이상은 절대 못하도록 제한된 자율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것이 왜 뱀이냐? 하나님의 대적자를 왜 뱀으로 상징화 했느냐? 

성경에 보면 뱀이나 용 말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마귀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 보면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와 사탄이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수풀에 기어 다니는 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 자체를 마귀로 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뱀이 마귀라면 다 때려죽이면 마귀 역사는 세상에서 없어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뱀이 등장하고 용이 성경에 이렇게 등장하느냐? 여러분, 과거 바벨로니아 문화에서부터 지구상에는 용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용의 머리를 부수시는, 용은 우리 하나님에게 꼼짝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을 성경이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 용의 문화는 온 세상에 지금 다 퍼져 있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호령을 합니다. 중국에도 그런 문화가, 우리나라, 일본에도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쩌다가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중국집에 들어가 보세요. 온통 벽에 용 그림 천지입니다. 왜 그려 놓은 겁니까? 손님 많이 오라고 그려 놓은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 하나 붙여놓는 것과 똑같이 용이라고 하는 신이 우리 이 가업을 지켜주신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아주 옛날부터 이 용의 문화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심청전이 뭡니까? 인당수 깊은 물에 계신 용왕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려야 되는데 처녀 심청이를 재물로 드려야만 용왕이 이 바다를 평온하게 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그런 게 나온 겁니다.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하니까 신문에서조차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라.” 왜 대한민국이 용입니까? 왜 네 마리 용 중 하나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용 문화는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대통령 출마자들을 보고서 신문에 뭐라고 합니까? 용들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용 문화는 없어지지 않고 뿌리 깊게 박혀져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인 애굽 문명을 상징하는 스핑크스의 이마에 달린 게 뭐죠? 코브라 뱀입니다. 뱀이, 용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온 세상의 문화가 이렇게 되어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우리 하나님은 용을 저주하시고 용의 머리를 부수십니다. 시편 74편 13절을 보세요.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시며” 이런 말씀이 있죠?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뭐 때문에 용의 머리를 깨부수고 계십니까?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다 용 문화로, 용이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성경에는 “하나님은 용을 부수시는 능력 있는 우리 하나님” 그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27장 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주이시리라.”

우리 하나님은 용을 죽이실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을 하나님으로 알지 말라.”라는 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고 우리 문화에 깊이 박히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용을 숭배하고 용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귀의 의미인 용을 죽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좋은 꿈꾸실 때 무슨 꿈꾸었다고 하십니까? 용꿈 꾸었다고 합니다. 용이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용이 신으로 우리 문화에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바로 그 뱀이 에덴동산에 나타나 인간을 속여서 자기 부하로 삼는데 성공한 것이 에덴의 비극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마귀의 유혹은 인간관계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기 전에는 창세기 2장 25절에 분명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 지은 다음에는 피차에 부끄러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관계가 다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부끄러움을 보려고 하고 내 부끄러움을 가리워 안보이게 하는 그런 노력을 계속 하지요? 이때부터 우리 인간은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고 자기만 생각하려는 극단의 이기주의로 에덴동산에서부터 떨어져 버렸습니다. 인간관계의 파멸은 세상을 그렇게 험악하게 만들어놨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께 여쭤볼게요. 지금 현재 여러분과 함께 사시는 그 부인을 처음에 연애하실 때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쓰신 말들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를 가지고 “당신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이래가면서 그 마음을 돌려서 그렇게 결혼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런 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쓴 사람이 누굽니까? 아담입니다.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예뻤으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스럽던 인간관계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 앞에 벌을 받고 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누가 이렇게 했느냐?” 그러시니까 아담이 하는 말이 뭡니까?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속아서 그렇습니다. 죽이려면 저 여자를 죽이세요. 나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인간은 이때부터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극단의 이기주의가 되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도 위급한 올 때는 그를 버리고 나만이 살려는, 그러나 또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애증의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두 가지이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할 일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라. 이것이 권위다.” 

에덴동산에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 거기서 깨어진 인간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만약 여기 아담이 남자다웠더라면 하나님이 야단치실 때 “하나님, 제가 잘못한 겁니다. 하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하와는 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해주십시오. 나를 벌해주시고 나를 쫓아내십시오.” 이렇게 말해야 남자이지 “하나님이 괜히 저 여자를 주셔서 내가 저 여자한테 속아서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저 여자를 죽여야지 왜 나를 죽이십니까?” 이렇게 비겁한 인간으로 몰락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밧세바 때문에 굉장히 고통당했지요? 야곱은 라헬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좋아했습니다. “나는 너 때문에 망했어. 그러나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이런 이상한 관계가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을 쓰시고 다윗의 실수를 끝까지 다 무모하시고 쓰셨는가? 그 사람들은 일평생 통해서 라헬이나 밧세바를 원망하는 말을 절대로 안했습니다. “내가 잘못했고 그도 내가 잘못 저지르게 만든 것이지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롭게 보신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자기를 배반한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요나를 보세요.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나를 바다에 던져 죽이시고 다른 사람은 살려주소서.” 그런 의로움이 아마 그래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위기 때는 결국 가장 가까운 이웃마저도 밟아버리고 혼자만 살려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 비극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아담과 하와는 상황에 따라 자기 이익을 도모하며 피차 관계를 유지하죠? 증오의 대상이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관계!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기가 너무나 이상하고 부끄러워서 나뭇잎을 잘라다 부끄러움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너와 모든 것을 열고 만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너와 나 사이에도 아주 큰 간격이 있구나.” 

보이지 않는 밤을 이용해서 옛날 같이 옷을 벗고 하나가 되어보죠? 그래서 가인과 아벨을 낳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잖아요? 이때부터 인간은 자기 실존을 깨달았죠? ‘아!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올 수 있는가?’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단 0.1퍼센트도 없고 완전 타락!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셔서 이 비극에 인간을 다시 구원하여 주신 십자가의 진리! 이것을 믿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결국 오늘 이 성경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진리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모든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모든 것이 회복되는 진리! 이 진리를 창세기에서부터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후로 어떻게 하십니까?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을 주시는데 무엇입니까? 제도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영원히 잘 섬길 수 있는 계명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와서 이렇게 예배드리잖아요? 안식일입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이 제도적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영원히 섬기는 자녀들이 되어라. 일주일 중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네 행복에 필요한 대로 마음대로 살아라. 그러나 하나는 안 된다. 주일은 아버지께 나와서 안식일로 예배드려야 돼. 그래야 너희들과 나와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거야.” 오늘도 십일조 헌금하시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피땀 흘려 돈 벌어서 왜 교회에 갖다가 전부 그렇게 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온 세상 우주 만물 네 마음대로 다 가지고 살아라. 그러나 하나는 안 되겠어. 십일조는 내게로 도로 가지고 와라. 그래야 너희들이 나와 관계가 유지된다.” 그래서 이것만은 안 된다고 한 것을 안 되도록 우리가 지켜가며, 이것을 꼭 하라고 하는 것을 지켜가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있는 제도적 하나님의 율법이란 것입니다. 

오늘 말씀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다 주셨지만 인간은 인간의 자유스러움을 통해서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다음에는 이웃 관계와의 사랑을 다시 회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 그래서 예수는 이 잃어버려진 인간 구원의 진리를 세상에 오셔서 다시 전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축복과 은혜가 우리들에게 지금 있는 겁니다.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시여,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셨으며 인간은 왜 그 자리를 떠났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 때문에 세상에 다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진리를 저희들이 잘 깨닫고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드리며 섬기면서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연결하는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 한주간도 우리들에게 약속되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이 나타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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