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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의로운 심판의 표 (살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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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운 심판의 표 (살후 1:1~12) 
 
 
데살로니가후서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1장), 재림과 관련된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며(2장),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을 경계 하는(3장)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1장은 인사말 이후(1-2), 극심한 핍박 중에서도 믿음과 사랑이 풍성함을 감사하고(3-4),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관한 가르침으로 고난을 인내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5-10),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성취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11-12)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발신자들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른 교회에 자랑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을 감사합니다. “모든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간직하고 있는 “인내와 믿음”을 자랑했습니다(3-4). ‘더욱 자란다’는 말은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인내와 믿음으로 극복해 가는 동안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사랑이 풍성해졌습니다. 발신자들은 성도들의 사회적인 성공과 성취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신뢰함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성도를 사랑함에 있어서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를 살피며 감사하고 자랑합니다.

만일 발신자들이 외적인 성공과 성취를 중심으로 감사하고 자랑하려 했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예수 믿고서 사회적으로 잘된 것 하나 없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소개하기조차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공하거나 성취한 일만 간증하고 아직 고난 중에 있다는 사실은 애써 감추어야 했겠지요. 그렇게 했다면 성도들은 사회적 성취와 성공을 갈망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고, 교회는 점점 세속화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세속화되어가는 오늘날의 교회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어떻게 증진되고 있는지, 성도들 간의 사랑이 어떻게 풍성해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감사하며 자랑삼을 때, 교회가 점점 거룩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을 인내하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b)고 선언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행 14:22b),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습니다.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5b)로 인정받는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 나라를 위하여”(5C) 고난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5a)가 됩니다. 성도의 고난 받음은 하나님 심판이 공의롭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이 지속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감소하고 형제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고난에 ‘인내와 믿음’이 더해지면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의뢰하게 되고, 다른 지체들의 고난 받는 아픔을 공감하게 되며,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요일 2:15). 고난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엄청나게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경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고 평가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인내와 믿음’에 대한 ‘보상’은 아닙니다. 다만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면서 믿음과 사랑이 성장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장’해 주지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고난 속에서도 인내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받는 일로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인내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반응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6-7a).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은 어린이 동화처럼 공의롭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 받게 하는 악인이 형통하고 환난 받는 선인이 부당한 고난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성공과 성취를 누리며 안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당한 이런 현실을 보면서 불경한 자들은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없다’며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공의가 온전히 실행되는 날이 오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 입니다(7b). 만족할 만큼의 공의가 실행되지 않는 현실 때문에 성도들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런 현실이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 소망 두고 살지 않게 합니다. 고난은 마음에 쌓인 이 세상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이 땅의 영구 거주민이 아닌 거룩한 나그네로서 살게 하며,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완전한 공의를 시행하실 ‘그 날’을 소망하며 살게 합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시행됩니까? 먼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십시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위한 고난도 전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라면 복음대로 살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거나 자기 십자가를 져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반역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혀 합당하지 않지요.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하십니다(8-9).

심판과 관련할 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 결코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6-8).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에 부당한 고난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실현될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동안만 유지되는 일시적인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잠 24:19).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고난을 주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10a절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그 날에 주께서 오셔서 주님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으실 것입니다”로 번역했습니다(10a). 그 날에 성도들이 영광 받으리라는 표현을 기대했다면 이 구절에서 살짝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언제나 영광은 주님께서 받으셔야 옳습니다. 성도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참여하게 된 그분의 영광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성도들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천상 예배에서도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는 찬사를 받으십니다(계 5:12).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을 전존재로 예배하고 온전히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큰 기쁨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성도는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서 가장 부당한 죽음을 죽으셨던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최상의 삶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언제나 왕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모습을 중심으로 묘사되었을 뿐입니다(12).

10b절의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고 기이히 여김을 받으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똑같은 내용의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복음에 복종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 성경에 분명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게 증언해도 그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품에 차이가 있어서도 아니고 지능에 차이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는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자기의 공로를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사를 돌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11-12절은 고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감사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사회적인 성공과 성취를 위한 기도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없애주시도록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난 중에서도 그들을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길 기도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12).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두고 있으며, 그 결과 성도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며, 당신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도록 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인내와 믿음 가운데서 신뢰와 사랑이 풍성하게 성장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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