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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의 죽은 것은... (삼상 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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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죽은 것은... (삼상 31:1~13)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나 사무실 빌딩 같은 건물의 4층을 '4'층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F'층으로 표기해 두든지 아니면 아예 4층을 빼어버리고 3층 다음에 바로 5층으로 올려 놓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아라비아 숫자 '4'의 발음이 '죽을 사(死)' 자와 같아서 재수가 나쁘다는, 어처구니없는 미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엘리베이터에서 '4' 자가 들어가야 할 단추에 왜 'F'라는 영어 알파벳이 들어가 있는지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서 어리둥절했었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그것이 영어의 'fourth'(넷째)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것인 줄을 깨닫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설사 미국 사람을 불러서 물어본다 해도 그 'F' 자가 'fourth'의 머리글자인지 아니면 'first'(첫째)나 'fifth'(다섯째)에서 온 것인지를 알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라는 발음만 들어도 곧바로 '죽음'을 연상하면서 펄쩍 뛰는 우리나라 사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률은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자살률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의 선진국들과는 정반대로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높은 축에 속하는 일본까지도 몇 년 전부터 앞지르게 될 정도로 급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유명 연예인들이 잇달아 자살함으로써 청소년들로 하여금 '모방 자살'의 충동을 유발시키는가 하면, 몇 주일 전에는 전직 대통령이 투신자살을 함으로써 이미 '동반 자살'을 한 여대생까지 나오는 등 마치 이 나라에 무슨 '자살 유행병'이라도 돌고 있는 듯한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 '자살'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블레셋 군과의 전투에 패하면서 자살로써 그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던 극적인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자살'이란 어디까지나 '불신앙적이며 동시에 불명예스러운 죽음'일 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울 왕의 죽음을 통하여 왜 자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이며 따라서 기독신자들이 결코 행하지 말아야 할 명백한 '범죄행위'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살은 생명의 주권자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이기주의의 극치'입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의 말씀에 "1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28장 4절에 보면 블레셋군은 "수넴"이란 곳에 진치고 있었고 사울의 군대는 "길보아" 산에 있었는데 이것은 사울 쪽이 전술상으로 우위에 있는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스라엘군은 초전에 대패하여 뿔뿔이 패주하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사울은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칠십인역'에 보면 사울이 "배에 중상을 입었다"고 했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크나큰 고통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도망할 기력도 없고 적군의 포로가 될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사울은 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모욕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삼손같은 사사가 이전에 블레셋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눈 뽑힘을 당하는 등 그 얼마나 비참하고도 끔찍한 '모욕'을 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그런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자기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병기 든 자"에게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참된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외면적인 선민의 우월감만 그에게 남아 있었음을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병기 든 자" 즉 사울 왕의 무기당번 병사는 그런 요청을 듣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자기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결국 스스로 "칼 위에 엎드러져서" 죽게 됩니다.
칼 손잡이 쪽을 땅에 대고 날 끝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거기에 가슴을 올려놓고 자신의 몸무게를 이용하여 찔려 죽는 것은 당시 군인들의 대표적인 자살법이었고 그것이 바로 사울이 택한 죽음의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자살은 언뜻 보기에는 그저 '동정'해 주어야만 할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럴게 할 수밖에 없었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자살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살에도 아주 중대한 죄가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 불신 이방 민족의 손에 죽게 되는 것만을 '모욕'으로 여기고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훨씬 더 큰 모욕은, 바로 사울의 자살로 인하여 그를 왕으로 모셨던 이스라엘이 당하는 모욕과 그가 겉으로는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던 하나님의 성호에 돌아가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머릿속에는 왕으로서 당연히 가졌어야만 했던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끝까지 '자기' 하나뿐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살아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죽음 역시 자기 삶을 살던 것과 똑같이 '자기 마음대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자살하기까지 자기 생명에 대하여 절망했다는 것은 곧 생명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불신앙'을 극명하게 보여 준 최악의 패역한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울 왕의 죽음의 비극은 그가 '전쟁에서 져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 죽었다'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자살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죄'입니다.
자살은 철두철미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의 극치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자기 마음대로 죽는 것'은 바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기주의의 극치'요 '불신앙의 뚜렷한 증거'인 까닭에 자살이란 변명의 여지없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까닭에, 그것을 스스로 끊어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조물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를 잊는 것, 즉 그 주신 생명에 대하여 늘 감사하면서 그것을 선하게 활용하는 것을 한순간이라도 저버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정면 거역하는 중죄입니다.
'주인이 익은 곡식을 곳간으로 거두어 가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때가 될 때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은 영광스럽고도 복스러운 죽음이지만,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생명의 주인께서 소유하시는 가장 고유한 권한을 침해하려는 죄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생명을 주신 자만이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실 권리가 있으심을 깨닫고, 우리 각 사람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아니하면서, 오늘도 연장되고 있는 이 모든 생명의 순간순간들을 진실로 소중히 여기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값있게 사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살은 인생의 심판주로부터 아무 것도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자의 종말'입니다. 

7절 이하 13절에 기록하기를 "7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8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으매 11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 일을 금식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 블레셋 사람들은 "죽은 자를 벗기러" 전장에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죽은 군인들의 갑옷, 장비 등을 벗겨 승리의 전리품을 챙기는 것을 뜻하는 데 당시 승전군의 상투적인 수법이었습니다.
그때 블레셋군은 사울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의 "머리를 벤" 후에 그의 몸뚱이만 "벧산 성벽"에 못으로 박아서 달아 놓았습니다.
사울은 죽기 직전까지 자기 얼굴, 자기 명예만 걱정하면서 그것을 지키겠다고 자살을 했지만, 실제로는 죽은 후에까지도 결국 이방인에게 철저하게 모욕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블레셋군은 그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의 집"에 두었다고 했는데, 이 아스다롯은 블레셋 사람이 섬기던 '풍요와 사랑의 여신'이었습니다.
또 역대상 10장 10절에 보면 사울의 머리가 블레셋 사람의 다곤 신전에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사울의 갑옷과 머리가 마치 블레셋군의 승전 트로피처럼 그들의 우상 신전에 바쳐졌는데,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승리는 곧 자기네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명예가 실추될 것만을 두려워했던 사울 왕은 이처럼 자기 체면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사울 왕에게 겨우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을 찾는다면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장사지내 주었던 일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요단강 동편에 살던 므낫세 반지파에 속한 자들이었는데, 사무엘상 11장 1-11절에 보면 암몬 족속이 야베스 거민을 침략했을 때 사울이 이들을 구출해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야베스 거민이 사울의 당한 일을 듣고는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벧산까지 가서 사울의 시체를 거두어 왔습니다.
마을의 모든 장정들을 다 동원하여 야간행군을 해서 그 목 없는 사울의 몸뚱이를 짊어지고 온 것입니다.
본문에 "거기서 불사르고"라는 말은 화장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뼈를 장사지내어 주었는데, 사무엘하 21장 11-14절에 보면 나중에 다윗 왕이 그것을 베냐민 땅에 있던 사울 아버지의 묘 즉 그 가족 장지에 이장시켜 줍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행한 일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간절히 바라는 것이나 마지막 소원이 그 죽은 사람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 '행한 일'이 그 죽은 사람을 따라간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생전에 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따라갈 것입니다.
사울에게도 그런 것이 한 가지는 있었습니다.
본인이 원했던 '명예'는 조금도 그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가 살았을 적에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던 그 '행한 일'만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사람에게는 '행한 일'이 겨우 하나라도 있기는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은 그의 사후에 그를 따라갈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화려하게 출발했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시작한 이후 인생의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대신에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리는 죄를 저지른 이후 온갖 범죄를 일삼듯이 저질렀습니다.
그는 전쟁을 떠나면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일러주신 지시까지도 태연하게 거역하는가 하면, 자기에게 그처럼 충성스럽게 대하는 다윗을 극도로 미워했을 뿐 아니라 다윗이 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준 이후에도 끝까지 집요하게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종내에는 무당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겠다고 하는 등, 실로 사울 왕의 후반기 인생은 사람의 영혼이 한 번 어두워지고 타락하기 시작하면 그 얼마나 극도로 악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 것이었으며, 그처럼 '실패자'의 본보기와도 같았던 그의 인생은 자살을 통하여 그 '최악의 절정'에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살아 있을 동안에 불순종했고 죽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했던 사울 왕이었던 까닭에, 그가 죽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대접받을 것이 전무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의 인생을 자살로써 종지부를 찍은 사람에게 무슨 묘 자리 좋은 곳을 잡아 장사지낸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더 이상 살맛도 없고 살 의지도 다 포기하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상을 가득 차려 장례식을 치르고 49제를 지내 주고 3년 동안을 상복을 입고 곡을 한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눈곱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세상이 싫다고 스스로 떠난 사람'을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오히려 붙잡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기독신자들은 '죽은 사람의 귀신' 따위를 믿지 않지만, 설사 그런 것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야말로 그 죽은 사람을 오히려 귀찮게 하는 일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에도 물론 그렇지만 일단 죽고 나면 실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시는가?'하는 이것만 문제가 될 뿐입니다.
사람이 그 죽은 사람에 대하여 어떤 요란한 허례허식을 갖추어 주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그 육신을 어떻게 처리해 주시고 그 영혼을 어디로 영접해 주시는가 하는 것만 남아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사람들도 죽은 사람을 두고 그가 살았을 때에 자기네들에게 어떻게 행했는지에 따라서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추모한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 생전에 당신 앞에서 믿음을 지키고 선하고 의롭게 산 성도를 그 죽은 후에도 얼마나 더 잘 대해 주시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인생에 대한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을 깨닫고,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약속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생명의 기회를 연장해 주시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공적인 인생'을 남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역대상 10장 13절과 14절 말씀은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고 짤막하면서도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정말 한 인생의 비문치고는 최악의 비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울 왕의 그런 비참한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범죄가 그 출발이 되었습니다.
충신을 살해하려 했으며 수십 명의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무당에게 점치러 갔으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믿음 없이 죽었던' 불신앙의 인생이었고 '죽은 후에 따라갈 선한 행실도 없었던' 실패자의 전형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자살은 무슨 '순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한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으며, '순교'는커녕 자기 개인신앙조차 지키지 못하고 끝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최악의 용두사미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의 고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자살을 두고 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모를 빙자한 선동'과 '동정에 휩쓸린 혼란'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고인은 죽기 직전까지 '자기 아내가 빚을 갚기 위해 쓴 돈 1백만 불과 퇴임 직전에 자기 아들의 계좌에 입금된 5백만 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주장했으며, 검찰은 대부분의 상식적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그 돈에 대하여 당연히 의혹을 가지고 수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고인이 자살을 하자 갑자기 그 모든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 중단'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무죄한 사람을 검찰과 언론이 몰아서 죽인 살인 사건'으로 둔갑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에 쫓겨서 도주하다가 포위되었을 때에 자수하지 않고 투신자살을 해 버리면 그 용의자는 절로 '무죄'가 됩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무죄인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경찰이 자기를 쫓아온다고 해서 자살하겠습니까?
일단 재판이라도 받아보고 무죄판결이 나오면 진짜 '크게 웃어 줄 수' 있을 것이며, 만약에 유죄가 된다면 그때야 진짜 억울해서 자살할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변호사 출신으로서 법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실 분이 말입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다른 용의자들이 그런 경우에 자살하면 자기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 분명하고 재판받게 되어도 아무 가망 없는 줄을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자살한 것이라고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만 '억울한 죽음'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검찰이 '살인마'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논리입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이 나라의 경찰들은 아무리 유력한 용의자라 해도 절대로 추격을 하지 말아야지요.
용의자가 도망치다가 빌딩에서 투신자살만 해 버리면 경찰관들이 오히려 살인죄로 처벌받을 판인데 어떻게 쫓아가겠습니까?
특히 정치가들의 비리의혹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검찰은 아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지요.
대통령 후보자에 대해서는 특검의 칼날까지 휘둘러도 괜찮지만 일단 현직에서 물러난 정치가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조사를 하면 영락없이 '정치보복' 행위에 가담한 '정권의 시녀'로 전락되고 마는 판에 도대체 누구를 수사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는 단어조차 거의 쓰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다 '서거(逝去)'이고 기껏해야 '투신(投身)' 정도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내셨던 분으로서의 이런 죽음이 명예로운 것이며,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외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미안한 말이지만, 제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불명예스러운 자살'일 뿐입니다.
'무능했을지는 몰라도 깨끗했다.'고 자랑하시던 분이 그 '깨끗함'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사실이 드러나자, 국법에 의한 '모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의 판단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줄 알지만, 저와 똑같이 생각하는 국민도 그보다는 더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왜 고인의 죽음을 미화시키는 보도 일색인 것입니까?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 사회의 엘리트'요 온 국민에게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사실과 판단'을 알려 주어야 할 '이 나라의 양심의 소리'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무슨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하게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앵무새 보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대한민국에서 '노란 모자 쓴 사람'들만 국민입니까?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법치국가로, 선진국으로 이끌어 가기를 간절히 열망하면서 '참고 또 참아주고 있는' 국민들은, 어느 교수의 뼈저린 표현대로, 믿고 뽑아준 정권에 의하여 오히려 영원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 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입니까?
국민의 5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고 뽑힌 현직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어도 짓밟힘을 당하고 영결식장에서 조의를 표하는 중에도 그렇게 모욕을 당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상식 있는 다수인이 지극히 비상식적이며 불법적이기까지 한 소수의 난동 앞에서 끽소리를 못하는 나라, 대권은 물론 국회까지도 다수의 의석을 국민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물 흐리는 미꾸라지'같은 좌파의 선동에 완전히 끌려 다니는 나라, 공정해야 할 언론에서는 몇몇 PD들의 편파보도와 조작보도들만 판을 치고 군데군데에서 외로이 외치는 바른 소리들은 악성댓글의 홍수에 순식간에 파묻혀 버리는 이 기가 막히는 나라 - 우리 대한민국의 수준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생각하니 정말 억장이 무너집니다.

일부 목사들의 행동은 더욱 가관입니다.
기독신자도 아니었으며 더욱이 그처럼 불신앙적이고도 불명예스러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고인에게 목사가 가서 도대체 무슨 말씀으로 설교를 하며 교회 찬양대가 가서 도대체 무슨 노래로 조문한다는 말입니까?
'전직 대통령'이면 '신자'가 아니라 해도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저는 그것이야말로 '목사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만이 자살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곤충 중에도 교미 직후나 혹은 자기 공동체에 침입한 적에게 침을 꽂고 자기도 죽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자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살을 할 줄 아는 것은 그 인간이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생명의 주권자가 되심'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최종 심판자가 되심'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바로 이 '완전타락의 본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처럼 자살이라는 죄까지 저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사(決死)'라는 말을 너무나 쉽고도 흔하게 씁니다.
노조에서 데모를 할 때마다, 아니 자기 동네에서 무슨 공사라도 하게 되면 어김없이 피켓과 현수막에 커다랗게 써 붙이고 나오는 말이 '결사반대'입니다.
하지만 '못 살겠다'느니 '죽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하는 사람일수록 사실 실제로 죽는 준비는 또 제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죽을 때까지 '생명의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죽는 자들만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죽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주 안에서 죽었는가?'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생전에 행한 일'이 있는 자들만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은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장례를 치러 주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맞이해 주시는가?'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어디까지나 '불신앙적이며 동시에 불명예스러운 죽음'일 뿐임을 깨닫고, 생전에 오직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언제 어떻게 죽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스러운 영접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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