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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동행하시는 성령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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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옛날 어느 나라에 무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두려워서 피해 다니기만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는 전우들에게 늘 조롱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전쟁터에서 우연히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는 적장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적의 유명한 장수였습니다. 비겁했던 무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일약 용감한 무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후부터 그가 전쟁터에 나가기만 하면 용감히 싸워 혁혁한 공을 거두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영웅이 되었답니다.

기독교는 약한 자를 강하게 들어 쓰시는 종교인 줄로 믿습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우리는 허물 많고 약점 투성이지만 어떤 계기로 가장 강한 성공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계기를 만드셔야 하는데,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변화된 일단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오시기 50일 전쯤에, 그들의 스승으로 부르기도 했고, 주라고 부르기도 했던 분이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잡혀갈 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잘못된 체포라고, 잘못된 재판이라고 나서 말하지 못했을 만큼 겁쟁이요, 두려워 떨던 비겁했던 사람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바로 그 제자들이 50일이 지난, 소위 오순절 날에 변화되어지는데, 가장 강하고 담대한 자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절기를 막 시작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성령, 가슴에 움직이는 성령, 그 성령과 동행함을 확신하고 성령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 강림 절기를 살아가면서, 성령 강림의 의미와 성령께서 오셨기에 누리는 특권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의미 - 성령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성서의 역사로 본다면 구약은 성부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활동하시던 시대를 가리켜 성자 시대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시대인 것입니다.

성부 시대에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그에 반하여 인간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성자 시대에 그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성부 시대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그 영광된 모습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새 힘을 불어 넣어 주시며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이렇게 삼위 되시는 하나님은 각각의 시대에 합당한 모습으로 힘과 능력을 나타내시며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세 위격 중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됨을 잃지 않도록 날마다 새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성령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십니다.

제 목회 여정의 시작이 88년 5월 20일이니 정확하게 만 21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훌륭하신 많은 목사님들의 이력에 비하면 자랑할 것이 크게 없지만, 그럼에도 제 교회에 대한 이해를 물으신다면 가장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성령님에 의한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교회는 한 마디로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성령에 의해 시작, 지탱, 운행, 성장, 부흥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어떤 형태의 교회이든지, 의도하고 기획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는 “교회의 힘의 원동력은 무엇에서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을 이 시간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교회는 많습니다.
즉 ‘우리 교회는 성령님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목회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요,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주권도 이 땅의 그 누가 아닌 성령께서 붙잡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내 생각과 내 지혜에 의존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는 신앙고백의 시간들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특권 - 동행하여 주십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어 주장하시는 삶,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경학자인 스코필드 박사가 한 번은 버지니아 주 스탠톤에 있는 한 정신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스코필드는 병원을 안내하던 병원장에게 한 건장한 육체의 젊은 환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젊은이가 난폭해지면 다루기가 매우 어렵겠습니다.” 그러자 병원장은 “예. 그렇지만 저 젊은이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발휘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자기는 힘이 없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요. 그리고 항상 자기가 약하다고 불평하며 거기에 대한 약을 달라고 졸라 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코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젊은이와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내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많은 재능을 받은 교인들은 재능을 사용할 믿음과 지혜와 헌신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만 이미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비천한 자리라도 쓰임을 받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할 믿음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미 자기 속에 성령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는 못해, 나는 안 돼, 나는 틀렸어, 나 같은 게 뭘 해”라고 스스로 맥없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십시다.

성령인 프뉴마의 원뜻은 우리말로 ‘신바람’이란 단어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에 신바람이 나야 됩니다. 신바람이 나려면 진짜 신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다른 바람으로는 안 됩니다. 진짜 신바람은 영적인 성령의 바람이 우리 안에 불 때 마음마다 기쁨이 일어나고, 마음마다 능력이 일어나고, 마음마다 변화가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령은 없다가 이천 년 전쯤 오늘, 정확하게 2009년 전 오늘에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역사하셨습니다.

사사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기록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사사들이 사사로 세움을 받고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삿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삿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

성령님은 그러다가 오늘, 결정적으로 임해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신구약을 망라하여 하나님의 크게 쓰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힘이 크고 작으냐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 문제보다 크신 이의 존재를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수기서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가나안의 변경에 서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 하나님이 계시하신 땅. 저들이 정복하여야 할 땅. 그 땅을 잘 알아보기 위하여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정말로 살만한 땅인가? 그리고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적들과 싸워서 정복할 수 있을까?”
이런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가나안 땅의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보고하게 됩니다. 가나안 땅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먼저 12명중 10명이 한 목소리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우리의 힘, 우리의 병력,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그 땅을 정복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 땅은 사람 살 만한 땅이 아니다. 포기하자.”

이 때 다른 두 명의 사람이 이 상황에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이 나머지 두 명, 절대 소수였던 이 두 명의 정탐꾼이 보고 하기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 보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말할 때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이 열 두 명의 정탐꾼은 똑같은 땅에 다녀왔습니다. 똑같은 환경을. 똑같은 장소를. 똑같은 산과 들을.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온 그들의 시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너나 할 것 없이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직장이 어떤 상황입니까? 우리의 가정이 어떤 환경입니까? 모두들 사실상 큰 차이를 갖지 못합니다.
모두들 그저 그렇게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그 삶의 모습은 대단히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됩니다.
시각이,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그 각도가, 그 관점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현실은 많은 근심, 삶에 대한 권태, 그리고 많은 피곤, 환경에 대한 중압감을 줍니다. 때때로 권태롭습니다.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다들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이게 뭔가. 내 환경은 왜 이렇지?
나에게는 왜 저 사람 같은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피곤하기 시작합니다. 자폭하고 싶기도 한 현실이 때때로 우리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에게 던져진 이 상황과 내 삶의 환경을 “지금 어떻게, 어떤 시각으로 보며 살아야 할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인이면서도 불구하고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여기 신앙인의 불신앙이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던 이 10명의 정탐꾼들을 살펴봅시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가나안 땅 정복?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해 볼 만한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입니다. “안 믿는 것도 믿음이다.”
안 될 줄 믿은 대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민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이 정탐꾼 열 명은 결국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애기입니다.
누구를 안 믿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어려운 일 앞에 부딪히니까 후퇴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 환경을 이기지 못합니다. 신앙으로 어려운 삶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정작 믿음이 필요할 때 믿지 못하는 사람들, 믿음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 이것을 우리는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의식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 역사함을 과거에 체험하기도 했지만, 지금 내 앞에 부딪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믿음을 적용할 줄 모르고, 신앙으로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 그것이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휴 저 가나안 땅을 어떻게 정복해.”

그런데 이 10명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게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 2명의 정탐꾼, 그들은 흥분해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온 가나안 땅의 현실은 10명이 본 그 현실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음에도 10명이 절망하고, 체념할 때 이 두 사람은 왜 그런지 흥분하며 “해 볼만한 과제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이 두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성을 확신하게 하고, 담대하게 만들고, 저들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였을까요? 무엇이 저들의 삶에 저력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까?
우리는 14장에서 다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민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기 두 명의 정탐꾼, 이들이 다른 10명, 절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르게 그 가나안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이것은 한번 해 볼만 한 과제라고 말합니다.
한번 그 땅에서 살아볼 만 하다고 하는 이런 생의 저력과 이런 능력이 용솟음치게 만든 그 비밀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실망하고, 체념할 줄 모르는 강인한 삶의 스타일을 갖게 하였는지요? 그 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민14:8-9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에 대한 아름다운 정의를 얻게 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는 내 눈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앙을 갖는 순간, 하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내 주님으로 내 마음에 초청하는 순간, 성령께서 내 마음에 거하기 시작하는 날부터 나는 하나님의 눈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보니까 달라집니다. 하나님 없는 눈으로 볼 때 그 땅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데, 신앙의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니까 참 아름다운 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이 두 명의 정탐꾼, 이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이 사람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민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들은 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 두려운 생활 속에, 무의미한 것 같은 삶 속에, 그들은 하나님을 계산에 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문제가 달라진다. 가능성이 생깁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래도 하나님을 주인 삼으실 수 없는지요?
이제 성령님과 동행하고픈 마음이 가득하지 않으신지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어서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므로 그분의 복을 누리는 교회입니다.
그 분이 원하셔서 일을 하고,
그 분이 기뻐하시니 찬양하고
그 분이 들으시니 기도합니다.

그 분께서 인도하시니 우리의 계획이 실행되어집니다.
그 분께서 용납하시니 우리가 호흡합니다.
그 분께서 응원하시니 사단과 싸워 이깁니다.

오늘 내 삶의 주인은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주인 되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김처럼 세상을 이기시고, 세상을 정복하시고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시여 동행하여 주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다스려 승리하시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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