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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께서 부르짖으시며 (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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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께서 부르짖으시며 (암 1:1~2)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이번 주부터 아모스 말씀을 강해하려 합니다.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라 불립니다. 정의는 옳고 바르다는 의미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옳고 바른 뜻을 선포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라 불립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하며, 삶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한 기준이 없습니다. 

아모스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7장에서 하나님이 담 곁에서 손에 다림줄을 들고 있는 환상입니다. 다림줄은 벽이나 성을 쌓을 때 수직을 재는 도구입니다. 실 끝에 무거운 쇠 같은 것을 달아 내립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확히 수직을 이루고 거기에 맞추어 돌이나 벽돌을 쌓습니다. 다림줄이 없다면 잘못하면 비스듬히 담이 쌓이게 되고 그러면 높이 쌓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수직을 잡지 못하면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다림줄을 늘어뜨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성이 얼마나 기울었는가를 재고 계신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다림줄은 명확한 기준을 말합니다. 아모스는 이런 하나님의 선명한 기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모스는 이 다림줄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바르게 서고 있는가를 재고 있습니다. 이 다림줄을 가지고 아모스는 종교가 어느 만큼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재고 있습니다. 이 다림줄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드리우고 그들이 바르게 서 있는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명한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로보암의 시대

1절에서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기입니다. 남쪽 왕국을 유다라 하였는데 당시 왕은 웃시야였습니다. 북쪽 왕국은 이스라엘이라 하였는데 당시 왕은 여로보암 왕입니다. 정확히는 여로보암 2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 1세와 다릅니다. 대략 연대로 따지면 BC 760년경 정도 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는 북왕국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다루는 성경의 내용은 미미하기만 합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흔히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 세상의 역사관과 성경의 역사관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보통 세상의 역사관에서는 자기 국력이 신장되거나 문화가 발달되었던 때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런 시대는 역사책의 분량이 많아집니다. 통칭 물질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국력이 신장되었던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났던 시대는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국제적으로는 보잘것없는 시대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던 시대를 성경은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아모스의 무대가 되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의 시대에 대한 평가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시대지만 성경은 단 한 줄의 평가로 그치고 맙니다. 열왕기상 14장 25절은 여로보암의 시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하맛 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라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다윗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시리아나 앗수르 모두 국력 쇠퇴기로 이스라엘에 국제적인 압력이 거의 없던 시대였습니다. 남쪽 애굽 또한 잠잠했습니다. 이런 국력 신장의 결과 물자 또한 풍부했습니다. 아모스서에서는 당시의 풍요에 대해서 이렇게 전합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암6:4-6) 여러분 상아로 된 침상에 누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리석 침대는 저리 가라 입니다. 그만큼 풍요로워 사치가 극심하고 한가로이 노래나 부르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국가 번영 시기의 역사는 많은 분량에 걸쳐 다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였다는 열왕기서의 한 줄의 평가로 끝내고 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을 덧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아모스서의 기록을 통해서 여로보암 시대의 불의와 부정적인 면을 고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성서의 이런 역사관은 또한 성서가 우리들을 평가하는 인간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있는지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이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극히 세속적입니다. 그가 가진 물질이나 그의 명성이나 권력을 높게 봅니다.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예수를 알지 못하면 그는 허망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과 명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잘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 자는 졸부요 패권자일 뿐이지 지도자나 진정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뜻과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진정 ‘잘사는 사람’입니다. 

여로보암 시대는 물질은 풍요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잘사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2만 불 또는 3만 불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2만 불, 3만 불에 맞는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가치를 먼저 갖기를 원합니다. 자기만 알며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부를 갖게 되면 그 사회가 위험해지고, 그런 민족이 부를 갖게 되면 세계가 위험해집니다. 성숙한 시민의식이나 정직,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는 결코 선진사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국민소득 1만 불을 달성한 때는 1995년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2만 불이라는 고지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주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2만 불에 맞는 건전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적 수준이나 시민의식에 해당하는 만큼의 부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통일이라는 선물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북한을 끌어안을 형제애와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런 통일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되면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부와 영광을 주십니다.

이번에 대법원 판결로 삼성이라는 회사가 이건희 회장에서 그 아들에게로 후계자 승계가 합법적인 추인이 되었습니다. 법 형식이야 어떻든 그 내용을 보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61억의 돈으로, 세금 16억만 지불하고, 순환출자 방식으로 200조 회사 규모의 경영권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성은 물질적으로 성공한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그렇지만 삼성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정신적, 도덕적 영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도 저렇게 부자가 되고 싶다.’ ‘어떤 수단 방법을 써도 부자만 되면 되는구나.’ 하는 부정적인 물질의식일 뿐입니다. 정직이나 나눔, 인간에 대한 배려나 물질을 초월하는 어떤 정신적 가치에 대한 그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성서의 눈은 이런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드고아 목자 아모스

아모스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라는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아모스는 ‘짐’ 또는 ‘짐을 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짐 같이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할 때 짐이 많으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루터는 아모스를 평하여 “그는 잘 지낼 수 없고 화를 돋우는 짐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아모스 7장에서는 불의를 경고하는 아모스의 말을 견디지 못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암7:10) 이 땅이 견딜 수 없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짐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 짐과 같은 존재들이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며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신앙인들은 세상의 심판과 멸망을 외칩니다. 세상은 경쟁을 외치는데 신앙인들은 사랑을 외칩니다. 세상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칭찬하지만 신앙인들은 섬김을 강조하고 약자와 가난한 자를 돌볼 것을 촉구합니다. 세상은 결과만 중요시 하지만 신앙인들은 과정과 양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쾌락과 사치를 누리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데 신앙인들은 절제와 나눔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아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속해 있는 세상이나 조직에서 여러분들은 불편한 사람들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하다는 세상을 향하여 그들의 불의를 드러내는 것이 신앙인들입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리끼는 사람들이 된 까닭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근거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록 쓴 말 같지만 신앙인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이렇게 불편한 말을 하는 이유는 실상 세상을 심판과 저주로 몰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아모스의 고발을 받는 사람들은 그를 짐처럼 여겼지만, 거꾸로 아모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거운 짐처럼 부담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시대의 짐을 자신의 운명처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드고아의 목자로서 아모스는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양도 있겠다, 농사도 짓겠다 그는 소박하게 자신의 행복만을 꿈꾸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어 시대의 짐을 지고 가게 만들었습니다. 

진짜 주인은 짐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객이나 손님은 좋은 것만 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싫은 것도 짊어집니다. 그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고 이 역사 위에 정의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담감을 자신의 부담감으로 떠안은 사람이 아모스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다윗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13:36) 예수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짐을 떠안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라는 짐을 떠안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시대의 짐을 떠안는 사람들입니다. 

아모스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당시 사회에서 철저히 비주류에 속한 존재였습니다. 첫째 아모스는 정통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절에서 ‘드고아 목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7장 14절에서는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였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위대한 선지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두었거나, 아니면 선지학교를 나왔거나, 아니면 제사장 출신들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이런 선지자 근처에는 전혀 가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평신도 선교사였습니다. 출신도 학벌도 변변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문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전에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가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성경을 쓴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모스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학벌이나 출신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느냐 입니다. 1절에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계시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보았기 때문에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7장 15절에서는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명령했기 때문에 그는 운명처럼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났느냐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역사의 비전을 보고 강한 소명감으로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정식 신학교를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소명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구지 신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기에 아모스는 국가라는 경계도 극복했습니다. 아모스는 원래 남유다 사람입니다. 드고아란 곳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19km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 그가 국경을 넘어 북왕국 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민족적 한계는 역시 아마샤의 논쟁 중에 잘 나타납니다. 아모스서 7장 12절입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고 하나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도 전세계적으로는 수많은 선교사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모스를 열정만 있는 신비주의자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다음 시간에 묵상하겠지만 그는 1-2장에서 보듯이 주변 국가의 정세에 대해서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는 수사법과 웅변술에 능합니다. 1-2장에서 그 능력이 두드러지는데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해서 밖으로부터 안으로 소용돌이처럼 몰아쳐가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을 꼼짝 못하게 합니다. 그는 신학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 신학이 교리에 억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본뜻을 헤아릴 정도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출애굽 신학’이나 ‘여호와의 날 신학’을 예수님처럼 뒤집을 줄 아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회를 정확히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불의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허식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치는 목자였지만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번영과 풍요에 감추어진 불의들을 볼 수 있었고 결국 이 불의는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다림줄과 같은 하나님의 선명한 기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되 가장 중요한 준비는 말씀으로 무장하고 세상과 인생을 향하여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위기의 때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런 분명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모두 먹고 살기 위해, 또 튀지 않기 위해 회색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선명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대장부 신앙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맹자』,「등문공」편에서는 대장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불투명하고 회색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으로 이처럼 선명한 기준을 가진 사람을 욕하면서도 흠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부르짖으시며

아모스는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했습니다.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하나님은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사자의 포효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3장 4절에서는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라 말씀합니다. 사자의 울음소리에 온 숲이 숨을 죽입니다. 그 소리에 벌벌 떨며 모든 동물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소리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시온산 위에서 온 이스라엘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아모스는 이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아모스는 자기 생업을 포기하고 이스라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레처럼 울리는데 우리는 마치 귀머거리 마냥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위험하다”고 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여도 소귀에 경 읽듯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라 말씀합니다. 모든 것에는 사전에 경고가 있습니다. 경고가 올 때 돌이켜야 합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몸에 조금 이상 신호가 오면 휴식을 취하거나 약을 먹거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병으로 도져 생명이 위험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조금 경고하실 때 우리는 빨리 돌이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귀먹은 사람마냥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하나님은 부르짖고 계신데 전혀 듣지를 못합니다.

사회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짖는 소리는 직접 말씀으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싸인이나 환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들립니다. 2절입니다.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그것이 목자의 한숨이든, 양들의 목마른 외침이든 온 초장이 애통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이 애통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나타날 애통이지만 이미 들판에서는 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리는 곧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회의 고통 받는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먼저 가난한 자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번 일주일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정말 온 국민이 슬퍼하였습니다. 조문객 수가 김해 시골 봉하 마을에만도 1백만 명을 넘었고, 전국적으로는 5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TV를 통해서 정말 심하게 애통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이런 모습을 ‘추모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학자들이 온 국민이 왜 이렇게 애통하는지 그 현상을 분석하였습니다. 여러 분석이 있었지만 설득력을 얻는 분석 중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한 슬픔에 더하여 국민들이 각자의 슬픔을 함께 쏟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많은 울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경제적 고통이나 소외로 인한 울분, 민주주의의 유린과 억압으로 말미암은 고통, 힘없는 약자들의 슬픔, 갈등과 분열로 인한 분노, 남북관계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 마지막으로 이런 위기의 때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신뢰감의 상실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표현했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짖음입니다. 백성들의 애통을 타고 하나님의 부르짖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을 향하여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고 말씀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은 이런 애통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습으로 보아서는 여전히 정치지도자들이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지도자들 또한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감각하며 오히려 엉뚱한 소리로 국민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잘 듣지 못하면 결국에는 더 큰 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자, 약자의 애통의 소리는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이것은 심판의 전조입니다. 약자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다가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 하나님의 부르짖는 음성을 들었기에 자기 직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는 영적인 기근으로도 나타납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갈멜 산은 이스르엘이라는 곡창지대의 해안가에 위치한 숲으로 쌓인 아름다운 산입니다. 이 산 또한 마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심한 기근이나 가뭄을 말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이나 기근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짖음은 영적인 메마름으로 나타납니다. 아모스 8장 11,12절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우리 민족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말라서는 안 됩니다. 마른 것은 죽은 것입니다. 이미 한국교회와 기도원들은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눈물이 없습니다. 철야기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민족의 기도제단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문화와 교양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헌신은 없고 축복과 안일과 자기 가족주의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분명 영적인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지진을 통하여 그 부르짖음을 보여주십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1절에 보면 지진이 있기 2년 전부터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지진은 자연재해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외쳤던 메시지에 대한 확신을 이 지진에서 얻었던 것 같습니다.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더 큰 심판에 대한 예고에 불과합니다. 이 지진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이 더 철저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풍요의 시대에 아모스는 장차 다가올 시대의 먹구름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전멸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아모스의 경고를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그로부터 38년 후에 앗수르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우리 민족을 향하여 부르짖고 계십니다. 이 소리를 듣고 우리 삶을 바꾼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끝내 외면한다면 그 앞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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