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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네 아내를 귀히 여기라 (벧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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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내를 귀히 여기라 (벧전 3:1~7)


지난 한 주간은 우리 국민들이 내내 침통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너무나 비극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노 대통령을 좋아했던 사람이든지 싫어했던 사람인지를 불문하고 다 슬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기분이 우울하고 TV를 보면 눈물이 나곤 했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지 장례식이 있던 날은 사상 최고로 5백만 명이 추모를 했다고 합니다. 생전에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만 듣고서는 함부로 비판하고 욕했던 분들도 노 대통령의 소탈하고 진실한 삶에 감동을 받은 듯싶습니다. 노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서는 역사가 냉정한 평가를 내리겠지만 가장 큰 업적은 권위주의를 청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서민 대중들 속에 함께 하는 친근한 대통령상(像)을 심어준 것이 사실입니다. 

두 가지 타입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먼저 loathing leader, 즉 사람들이 혐오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loving leader, 즉 사람들이 사랑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몇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국민이 혐오하는 지도자는 어떤 정책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는데 반하여(enforcing policy from without), 국민이 사랑하는 지도자는 국민들에게 어떤 내적인 힘으로 영향력을 미칩니다(influencing people from within). 둘째, 혐오받는 지도자는 상관이 부하에게 하듯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는 데 반하여(dictating as the superior over the inferior), 사랑받는 지도자는 팀의 일원으로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directing as a part of the team). 셋째, 혐오받는 지도자는 어떤 자비심도 찾아볼 수 없는 우두머리인데 반하여(being a headman with no compassion), 사랑받는 지도자는 자상함을 갖춘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being a hartman with concern). 넷째, 혐오받는 지도자는 누군가가 던지는 질문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해석하는데 반하여(interpreting question as personal attack), 사랑받는 지도자는 질문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이해합니다(understanding question as an opportunity to teach).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행복한 가정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오늘은 마지막으로 부부관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정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천국에 가본 적이 없지만 행복한 가정을 보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가정에 속한 식구들이 잘만 가꾸면 천국처럼 행복한 곳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 되면 지옥 같은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이 천국같은 곳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부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형제자매의 관계는 두 번째입니다. 먼저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지 않고 매일 다투어 불화가 생기면 그 가정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부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혐오받는 지도자와 사랑받는 지도자의 차이를 말씀드렸지만 부부가 쌍방 간에 다 잘해야 합니다. 남편이라는 권위 하나로 군인 장교가 부하에게 명령하듯이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아내를 다스리던 시대는 갔습니다. 인격적으로 아끼고 귀히 여기는 민주적인 태도가 필요하지요. 

이런 말이 있지요. "신혼 때에는 집안에서 음식을 끓이느라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나고, 일 년쯤 지나면 아기 오줌 누이느라 쉬하는 소리가 나고, 십년이 지나면 김빠지는 휴 하는 소리가 난다." "신혼 때에는 부부가 밤참으로 피자를 먹으며 즐기지만. 일 년쯤 지나면 냉장고에서 아무것이나 꺼내서 먹고, 십년 쯤 지나면 부부싸움 하느라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서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고 살고, 50대에는 서로가 가여워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니까 함께 살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유지하려면> 

사실 이 세상에서 부부관계처럼 어려운 관계는 없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부부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베드로 전서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을 잘 뜯어보면 1-6절 까지는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도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7절은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도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부부관계는 남편과 아내, 둘 다 잘해야지 어느 한 쪽만 잘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전서의 저자는 아내가 남편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1-6절의 논조를 보면 예수 믿는 아내가 예수 믿지 않는 남편에게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대개 부인 때문에 남편이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정이 예수 잘 믿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아내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요. 실제로 총각 때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던 분들이 불신자인 아내를 만나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반대로 총각 때에는 믿음이 없던 분들이 믿음 좋은 여성과 결혼해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갖추어야 할 덕목보다 아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훨씬 더 많이 언급한 이유는, 지금도 그렇지만 베드로 전서가 기록된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아내가 남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갖추어야 할 덕성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할까요? 1-6절을 보면 믿음 좋은 아내가 불신자인 남편을 모름지기 이런 자세로 대한다면 그 남편을 신앙인으로 개종시킬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1절을 보세요.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여기 순종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1-6절에 보면 모두 네 번씩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순종은 어쩔 수 없이 강압적으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어떤 가식으로 하는 굽실거림과도 성격이 다릅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순종입니다. 노예가 주인에게 하듯 신분 질서 때문에 억지로 하는 타율적인 순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아내나 남편이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지요. 양성(兩性)이 다 평등합니다. 다만 성경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이유는 가정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내가 가정의 머리가 되는 남편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면 그 가정은 질서가 세워집니다. 평화가 보장됩니다. 

신혼부부가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성난 신부가 고함을 지릅니다. "친정에 가겠어욧!" 그러자 신랑이 지갑을 꺼내서 기차요금을 신부에게 건넵니다. 돈을 다 세어 본 신부가 신랑에게 또 한 번 소리를 칩니다. "이걸로는 왕복 차표를 살 수 없잖아욧!" 

또 어떤 부부가 싸움을 했답니다. 서로 절대로 말을 붙이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서는 꼭 해야 할 말은 글로 쓰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출장을 가게 된 남편은 새벽차를 놓칠까봐 어쩔 수 없이 부인에게 "내일 아침 4시에 깨워줘요" 라고 쓴 쪽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 7시가 지나 있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남편이 부인을 깨우려고 하는데, 머리맡에 종이쪽지가 보였습니다. "여보, 벌써 4시예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있듯이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아내의 자발적인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하십시오. 그리할 때 가정에 질서와 평화가 세워집니다. 특히 불신자인 남편에게 순종의 미덕을 보일 때 1절 후반부와 2절의 말씀처럼 말 때문이 아닌 그 아내의 두려워함과 정결한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외모도 잘 꾸며야 하겠지만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3-4절을 보세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유명합니다. 고대 로마의 귀족 여성들은 화려하게 치장을 하는데 엄청난 돈을 투자했습니다. 머리카락을 곱슬곱슬하게 만들었고, 흑색이나 적갈색으로 염색을 했습니다. 금발로 된 가발을 많이 썼고, 헤어밴드나 상아나 회양목, 거북이 등뼈로 만든 머리핀을 꽂았고 온갖 보석으로 주렁주렁 치장을 했습니다. 옷은 또 얼마나 사치한 옷을 입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 전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머리를 꾸미고 금붙이를 달고 화려한 옷을 입는 등 겉치장만 하지 말고 내면을 먼저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까 썩지 않는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 즉 정숙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속사람부터 먼저 단장하라고 당부합니다. 

사실,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외적인 치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신앙과 덕성에 있다 할 것입니다. 잠 31: 30절 말씀처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성이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한 아내와 결혼한 악한 남편에게는 소망이 있어도, 악한 아내와 결혼한 선한 남편에게는 소망이 없다." 

베드로서 기자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내적인 단장을 잘 한 여성의 모범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들고 있습니다. 6절을 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남편에게 순복하며 내적인 단장을 잘하면 사라의 딸이 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갖추어야 할 덕성> 

그렇다면 이제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7절을 보세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첫째로,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다. 

여기 "지식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성을 창조하신 오묘한 섭리와 뜻을 잘 알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한 재미 교포가 한국에 나와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자신은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아내도 뒤 따라 갔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와 보고 싶었던 아내의 얼굴을 보니 남편의 마음이 무척 기뻤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좋은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가본 곳 중에 가장아름다운 광경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였습니다. 그래서 금방 도착한 아내를 태우고 금문교를 향해서 갔습니다. 미국의 도로 중에서도 아름다운 고속도로를 따라 장시간 운전을 하며 달렸습니다. 아내도 처음에는 경치를 구경하며 즐거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피로를 느꼈습니다. 잠깐 쉬고도 싶었지만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남편과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금문교 보다는 남편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꼭 가지 않아도 되니 쉬었다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그곳에 꼭 같이 가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빨리 가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아내 쪽은 돌아보지 않고 9시간 내내 운전만 했습니다.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참다못한 아내는 강제로 차를 세우게 합니다. 화가 난 아내는 차에서 내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남편이 불러도 돌아보거나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당황하여 아내를 부르며 차를 타고 따라갑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운전자가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한 여자는 맨 발로 걷고 있고 그 뒤에서는 차가 따라가니까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차가 출동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내는 차에 오르긴 했지만 너무나 화가 나서 금문교는 보지 않겠다는 바람에 1시간 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 이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몰라도 너무 모를 때가 많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아내를 대할 때가 많습니다. 함께 살아가되 하나님께서 아내를 창조하신 오묘한 섭리의 지식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 귀히 여겨야 할까요? 먼저는 아내가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심신이 다 약할 수 있으므로 남편이 아내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영적인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잠자리만 함께 하고 식사나 함께 하는 식구의 차원이 아니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영적인 동반자이므로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함께 구원받은 동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존중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데요, 남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내와 다툼이 생기고 거리가 멀어지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어디 남편만 그렇겠습니까. 아내의 기도줄이 막히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부부싸움을 하고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 기도가 잘 나오지 않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혹시 오늘 여러분의 기도줄이 막혔다면 그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에 어려운 것이 부부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남이 만나 함께 사는 부부는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언약 관계입니다. 언약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처럼 자연스레 되지 않습니다. 쌍방 간에 많은 노력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내 여러분, 즐거운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겉모습만 썩어 없어질 것으로 치장하지 마시고 오직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사람부터 단장하십시오. 그리할 때 불신자인 여러분의 남편도 달라질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내를 지으신 창조 원리의 지식을 따라 동거하십시오. 남편 여러분보다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므로, 또 함께  천국에 들어갈 영적 동반자이므로, 무엇보다도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여러분의 아내를 귀히 여기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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