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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상숭배 (창 31: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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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 (창 31:17~35)
 
 
❚우상 같지 않은 우상

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녀 본 분들은 이것을 다 압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싫어하시는지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뭘 제일 싫어하시지요? ‘우상’입니다. 우상(偶像)이라는 말은 한자로 풀어보면 ‘사람의 모양을 따서 만든 인형 같은 상’을 뜻합니다. 물론 이 말처럼 사람의 모양을 따서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하는 것도 우상이지만 사람 모양뿐 아니라 소나 사자 같은 짐승의 모양을 따기도 하고 심지어 영험하게 생긴 바위나 큰 나무 앞에서 절하는 것도 다 우상에 포함이 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 우상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단 열 개로 압축해 놓은 십계명에서도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은 다 우상을 금지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우상을 싫어하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어디 우상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사람이나 동물의 모양을 딴 우상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우리가 늘 접하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이라곤 돈밖에 없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결혼해 분가한 네 아들 내외를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네 집 모두 신세대 부부라 그런지 아이를 갖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묻습니다. “첫째야, 너는 아직 아이가 없느냐?” “아버지, 우린 맞벌이하기 때문에 지금은 곤란하거든요.” “둘째야, 너희는?” “우리는 우리만의 삶을 향유하고 싶어요.” 나머지 아들들의 의견도 똑같자 아버지가 한마디 합니다. “제일 먼저 손자를 낳아주는 아들에게 내 재산을 전부 물려주겠다. 자, 그건 그렇고 이제 다 같이 기도하자.” 기도를 끝내고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상상에 맡깁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니 이 가정은 예수 믿는 가정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우상이 하나 있네요. 바로 돈입니다. 여러분, 돈 얼마나 좋습니까? 저도 돈 참 좋아합니다. 돈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고 못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것, 편리한 것은 그만큼 우상이 될 위험이 높습니다. 왜요? 너무 애착이 가고 너무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어떨 때는 하나님을 대신하기도 하고 하나님처럼 귀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 말고도 우상이 될 위험이 높은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권력이나 지위가 우상이 되기도 하고, 건강이 우상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녀나 가족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제가 늘 말씀드리는 대로 “하나님보다 사랑하거나 하나님만큼 사랑하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상의 종류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우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무섭습니다. 이 우상은 우리 삶과 실생활 속에 너무도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우상은 사람들이 우상인지 잘 모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우상인지도 모르고 이것을 애지중지 위하며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 우상의 이름을 제가 이렇게 붙여 보았습니다. ‘우상 같지 않은 우상.’ 성경에 이 ‘우상 같지 않은 우상’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이 ‘우상 같지 않은 우상’을 우상인지도 모르고 섬기고 살다가 영적으로 넘어졌습니다. 과연 이 ‘우상 같지 않은 우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믿음의 사람인 야곱 집안에서 섬겼던 우상,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곱의 처갓집에서 섬겼던 우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라반의 우상(아버지의 우상)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 도망을 합니다. 그가 피해 간 곳은 저 멀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밧단아람이라는 곳인데 이 지역의 중심 도시는 하란입니다. 하란이라면 일찍이 아브라함이 정착해 살던 곳이고 야곱의 어머니요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인 야곱을 더 편애했기에 야곱과 합작해 남편을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채지만, 상황이 심각해지자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친정인 밧단아람으로 피하게 합니다. “얘야, 밧단아람은 천리만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형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만 거기 잠시 피해있으렴. 거기엔 우리 친정 오라비인 라반도 살고 있으니 널 잘 돌봐 줄 거야.”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이 며칠만 피해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며칠이 20년이 되고 그 사이 어머니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우리나라에 38선이 생겼을 때 사흘만 공산당 피해 남쪽에 가있으라며 헤어진 모자가 영원히 못 만나게 된 기구한 사연처럼 이 리브가와 야곱 모자도 그렇게 며칠만이라며 헤어졌지만 영원히 못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어머니의 말을 듣고 외가를 찾아간 야곱은 삼촌 라반 집에서 가축을 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라반의 큰딸인 레아와 결혼하고 나중에 정말 사랑했던 둘째 라헬과도 결혼하고 20년 동안 열 한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오순도순 잘 살게 됩니다. 꾀를 써서 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의 가축을 제 것으로 만들어 큰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정말 야곱답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야곱은 드디어 처가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인 31장 1절부터 보면 그 까닭이 나오는데 야곱이 꾀를 써서 좋은 양과 염소를 가로채고 재산이 점점 많아지자 라반의 아들들(야곱에게는 처남들이지요)이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 놈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아 저렇게 부자가 되었다”며 모든 탓을 야곱에게만 돌리고 원망한 것입니다. 야곱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결심을 합니다. “아무래도 여기를 떠나야겠다. 큰 가족도 이루고 재산도 모았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자. 이러고 있으면 장인이나 처남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 이런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갓집을 떠나는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아무 갈등이나 문제가 없었다면야 당당하게 떠나면서 성대한 환송파티도 열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환송파티는커녕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최소한 재산을 다 빼앗기거나 어떤 해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야곱은 고민하다가 라헬과 레아 두 아내를 조용히 부릅니다. “여보, 여보(아내가 둘이니까 두 번 불렀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처갓집을 떠나 고향으로 가야 할 것 같아. 그리고 하나님도 꿈속에 나타나서 나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어.” 여필종부(女必從夫)요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닙니까? 이럴 때 부인이 남편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 참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본문 14~16절을 보세요.

14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지금 두 딸이 뭐라는 겁니까? “우리가 아버지 집에, 친정에 남아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재산 한 푼 안 돌아올 테니 갑시다. 게다가 아버지가 당신한테 우리를 팔아치우듯 시집보내고 우리 돈도 다 먹었으니(참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딸이 아닌 무슨 외국인처럼 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아버지 필요 없으니 빨리 짐 싸가지고 당신 고향으로 갑시다.” 여러분, 이런 집안을 두고 다섯 글자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콩가루 집안’입니다. 

아버지는 정말로 딸을 재산처럼 여기고 딸과 사위를 남남처럼 여깁니다. 모든 기준이 ‘돈’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들도 누이나 매형을 단 한 가지 기준으로 봅니다. ‘돈’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재산을 가로챘다고 누이와 매형을 원수처럼 여긴 것 아닙니까?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딸들도 아버지를 경멸합니다. 미워합니다. 제 살길 찾으려고 아버지를 무슨 벌레 대하 듯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딸들의 유일한 가치관도 바로 ‘돈’입니다. 딸들 팔아먹고 돈을 가로챘으니 아버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콩가루 집안 맞습니다.

우리 이 집안을 분석해 봅시다. 아버지의 가치관이 그대로 아들과 딸, 모든 자식들에게 유전됩니다. 아버지의 가치관은 돈입니다. 돈이 우상 된 집안의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내 집안’(여기서 내 집안이라는 것은 시집간 딸조차도 남의 식구로 보는 아주 좁은 의미의 집안입니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내 가족 잘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이 잘 되는 것, 가족이 행복해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지난 5월 한 달 동안 설교한 것처럼 우리 가정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주시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가정의 행복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이 되는 순간 이것도 역시 우상이 되고 맙니다.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돈과 가족의 행복 외에 이 집안, 이 가장의 결정적인 우상은 바로 본문 18절에 나온 ‘드라빔’입니다. 드라빔(히브리말로 ‘테라핌’)은 한 마디로 우리 집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요 가정 전용 우상입니다.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신상인데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사람만한 크기까지 있고 금이나 은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보통 나무로 만듭니다. 지금도 유적지를 발굴해보면 당시 사용하던 드라빔이 종종 발견됩니다. 그 때 사람들은 집집마다 이 드라빔을 세워 놓고 매일 그 앞에서 우리 집을 지켜달라고,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옛날 우상 섬길 때 집안에 모셔놓았던 신주단지 비슷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라반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집들처럼 집안에 드라빔을 세워놓았습니다. 나중에 딸인 라헬이 훔쳐 낙타 안장 아래 숨긴 것을 보니 아주 자그마한 드라빔 우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분명 라반의 집안은 하나님을 아는 집안이었습니다. 툭하면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면 요즘 말로 예수 믿는 집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안에 드라빔 우상이 있었어요. 마치 예수 믿는 집안이 집안에 부적을 붙여 놓고 신주단지를 모시고 그 앞에 날마다 비는 꼴과 같습니다.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드라빔은 그냥 우상이 아닙니다. 드라빔은 겉으로는 사람 모양처럼 생긴 우상이지만 실제로는 ‘내 가정 우상’입니다. ‘내 집안 우상’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집안의 수호신이요 복의 근원이 되어 우리 집을 행복하게 잘 살게 지켜달라고 비는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드라빔은 단순히 겉모습의 우상을 떠나 앞서 말한 대로 가정의 행복 자체가 우상이 되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이 된 것입니다. 라반 집안이 이런 집안이었습니다. 

돈이 우상 되고 행복이 우상 되고 내 집안이 우상 되고 가족이 우상 되는 콩가루 집안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도 수많은 가정이 이런 식으로 삽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1등은 돈이고, 2등은 건강, 3등은 자녀가 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가정에서 나온 답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가정도 답이 똑같습니다. 라반 집안처럼 말끝마다 하나님 찾고 예수님 찾고 기도는 하고 가족들이 교회 다니기는 하지만 정작 집안의 목표와 가치관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돈과 건강과 자식들 잘되는 것, 가정의 행복 사이에서 하나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집안에 드라빔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앉지만 드라빔 신상을 세워둔 것입니다. 라반 집안과 조금도 다름없는 집안입니다.

❚라헬의 우상(딸의 우상), 우리 가정의 우상

그렇다면 이 드라빔이 아버지 라반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겠습니까? 당연히 가보 1호고 천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겠지요. 그런데 야곱 가족이 야반도주를 해서 라반의 집을 떠날 때 딸 라헬이 그 드라빔을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양털 깎으러 간 사이에 라헬이 그 드라빔을 훔쳐서 도망을 갑니다. 라헬이 그 급한 상황에서 왜 드라빔을 훔쳐갔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라헬도 그 드라빔이 자기 가족, 자기 집안을 보호하고 복 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 떼도, 황금덩어리도 아닌 드라빔을 훔쳐 간 것입니다. 이것만 가져가면 우리 돈을 다 빼앗은 아버지에게 복수도 되고 그 복을 그대로 우리 집으로 옮겨 갈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치관이, 아버지의 우상숭배가, 아버지의 신앙관이 그대로 딸에게 옮겨 간 것이지요. 기억하십시오. 부모의 가치관과 신앙관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옮겨갑니다.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온 라반은 야곱 가족이 떠난 것을 알고 깜짝 놀라 7일 동안 죽어라고 쫓아갑니다. 가족과 가축을 거느린 야곱 일행은 천천히 가고 라반 일행은 낙타를 타고 전속력으로 쫓아갔을 테니 결국 길르앗 산에서 야곱 가족을 따라잡게 됩니다. 그런데 따라잡은 장인 겸 아버지의 말이 좀 이상합니다. “너희들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도망가듯 떠났냐? 말만 했으면 환송 파티 성대하게 해주고 손자손녀들에게 입맞춤도 하고 그렇게 잘 보냈을 텐데 말이야.” 여러분, 이 말이 정말일까요? 정말 야곱과 딸들이 그냥 간 것이 섭섭해서 라반이 그토록 죽어라 일주일을 쫓아온 것일까요? 손자손녀 마지막으로 보려고요?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이 곧 드러납니다. 

이 말을 한 후 라반은 곧바로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합니다. 야곱과 딸들과 여종의 장막까지 들어가 보며 무언가를 애타게 찾습니다. 뭘 그리 애타게 찾은 것일까요? 바로 드라빔입니다. 그렇다면 라반이 일주일을 죽어라고 쫓아온 것도, 그리고 지금 그토록 애타게 찾는 것도 바로 드라빔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섭섭해서도 아니고 딸들이나 손자손녀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바로 이 목숨보다 귀한 드라빔 하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라헬은 기지를 발휘합니다. 아니 잔머리를 씁니다.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숨기고 그 위에 앉아 “아버지, 마침 생리가 나서 일어나 아버지를 영접하지 못하니 양해해 주세요.” 하고 아버지를 속였고, 찾다 찾다 드라빔을 못 찾은 라반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또 모르죠. “또 하나 새기지, 돈은 좀 들겠지만” 하고 생각했을지요. 여러분,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딸은 죽어라고 숨기고 아버지는 죽어라고 찾습니다. 결국 딸에게 속은 아버지는 실망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고 딸은 승리의 미소를 짓습니다. 정말 콩가루 집안입니다. 

이후로 이 드라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과연 그 드라빔이 라헬의 바람처럼 그 집안을 지켜주고 복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나중에 창세기 35장 4절에 보면 야곱 가족이 벧엘로 다시 올라갈 때 가족들이 섬기던 모든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를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갔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때 이 드라빔도 함께 묻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까지 야곱과 가족들은 드라빔뿐 아니라 각종 우상을 집안에 세워 놓고 섬기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다른 집안도 아닌 야곱 집안이 말입니다. 작은 드라빔 하나가 발단이 되어 온 집안에 우상이 가득한 가짜 크리스천 집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크리스천 가정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크리스천 가정이 우상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무서운 우상입니다. 바로 라반 가정처럼 가치관의 우상입니다. 돈의 우상입니다. 가정의 행복과 성공이라는 드라빔입니다. 크리스천 아버지의 잘못된 생활방식과 잘못된 신앙이 크리스천 딸과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결국 온 집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상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집안의 우상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고 나아가 자녀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라헬이 섬긴 드라빔 우상은 특별히 아들 우상이었습니다. 언니 레아가 여섯 명의 아들을 낳는 동안 라헬은 아들이 없었으니 얼마나 절망하고 질투심에 불타겠습니까? 남편 야곱을 닦달하며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며 위협도 서슴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런 라헬을 불쌍히 여겨 아들 요셉을 주셨는데도 라헬의 욕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30:24)는 명령형 기도, 거의 협박성 기도까지 하며 아들을 더 구합니다. 그러다가 친정을 떠나온 후 그토록 원하던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35:18). 그토록 원하고 그토록 갈망했던 아들을 낳다가 말입니다. 

이렇게 라헬은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기에 아들 우상, 자식 우상이라는 드라빔을 섬긴 것입니다. 이 아들 우상, 자식 우상은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이 그토록 자식에게 매달리고 자식을 끔찍이 위한 나머지 하나님보다 더 위하고 사랑하는 함정에 빠집니까? 저도 아버지요 부모로서 제 자녀를 사랑하고 정말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라헬처럼 “나 이거 안 주면 죽겠습니다”하고 부르짖고, “하나님, 나한테 그거 안 주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하나님 안 믿고 교회 안 다닐 겁니다” 하며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만 얻으면 무조건 행복해 질 것 같고, 그것만 있으면 만사형통 할 것 같은 것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나의 드라빔 우상입니다. 그 드라빔 우상이 내게 기대한 만큼 행복을 줄 리도 없거니와 문제는 그 드라빔 우상에 라헬처럼 목숨 걸면 결국 그 우상 때문에 망하고 우상 찾다가 죽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상의 끝은 멸망이요 저주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복도 줄 수 없는 죽은 우상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내 전용 하나님, 내 가정 전용 하나님으로 나 필요할 때만 찾고 내 바람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나님이 된다면 이도 드라빔 우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쪼록 우상숭배를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는 여러분과 가정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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