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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확실한 시대 (벧전 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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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시대 (벧전 1:23~25) 

 
본문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로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참 행운아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주안에서 부름 받은 것만도 은혜이고 영광인데 베드로는 예수님 시대에 태어나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언자였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베드로는 한때 실패도 하였고 실수도 하였지만 그 후에 베드로는 분명하게 신앙으로 서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나가 전도하고 예수의 증언자로 살았습니다. 당시 전도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시대에는 전도하는 일에 핍박이 여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황제 네로는 기원 64년에 로마시내에 불을 지르고 그 화재를 기독교인들이 저질렀다고 책임을 전가해서 박해가 가중되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협과 박해 앞에서 신자들이 고난이 너무 극심하니까 우왕좌왕 했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핍박은 거세지고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신앙이 좋았다가도 그런 어려움이 오면 신앙도 불투명해지기 쉽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외부에서 강한 고난이 오니까 몹시 흔들리고 신앙에서 떠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렇게 흔들리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니라.” 

이 말은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신앙과 복음과 거듭남이 일시적인 것도 썩어져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고로 지금 우리의 신앙은 지금 조금 어렵다고 그냥 버리고 포기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의 삶을 버리고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말씀이 이 말씀이니라“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이 미래가 불투명하고 오늘 현재 위협과 도전이 강하고 또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잠간의 인생을 위해서 영원한 복음의 길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한 말이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풀과 같고 영광도 꽃과 같이 잠간 있다가 없어진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오직 복음인 이 하나님 말씀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오늘 잠시 고난 때문에 영원한 복음의 길에서 떠나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장 어려운 것이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아가다가 실패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실패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 실패의 아픈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하는 미래의 불투명이 더 힘든 일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고난도 막심했지만 그 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일본은 너무 강하였고 언제까지 이 고난이 계속될는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분명함이 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낙오되고 변절하고 친일파가 되고 그랬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도 오늘 현재가 너무 힘들고 인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 보다 더 큰 고난은 언제까지 이 시련이 계속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투명함이 더 큰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너무나 강했고 언제 자유 함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전무하였기 때문에 모두 우왕좌왕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렵고 힘들다고 더 소중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베드로가 보고 오늘의 어려움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이 불확실함이 문제입니다. 

 먼저 오늘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오늘도 알고 보면 그때 못지않은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삶에서 피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도 미래와 장래가 너무나 불확실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갈브레이스(Galbraith, John Kenneth, 1908.10.15~2006.4.29)라는 미래학자가 “오늘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시대는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말 빼고는 모두가 불확실한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모두가 불확실합니다. 

우선 오늘 미래를 내다보면 참 불투명합니다. 뭐가 보이질 않습니다. 금년이 어떻게 될는지, 내년은 또 어떻게 될는지 너무 예측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 기업가들이 5개년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게 변하니까 2- 3년 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는지 몰라서 계획을 세워도 생각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변하니까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5분은 이집트시대의 12년과 맞먹을 만큼 세상에 빠르게 변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한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앞날을 내다보아도 참 불확실합니다. 살아가려면 이웃을 잘 만나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이웃들은참 안 좋은 사람들만 주변에 모여 있습니다. 동으로는 일본이 있는데 이 일본은 인격이 안 돼 먹은 나라입니다. 잘 잘못을 사과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더 뻔뻔하게 행동하는 나라입니다. 한마디로 양식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지성인이 없습니까. 지난날의 아픔을 준 역사에 대해서 일언반구 자성하는 사과 한마디, 책임 있는 행동하나가 없습니다. 이런 나라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또 북으로는 북한이 있는데 이 북한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예측이 불가능한 나라입니다. 엊그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 변수입니다. 북한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럭비 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졌습니다. 그 나라가 핵실험을 하였고 이제 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얻어먹으면서도 남한을 협박하고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나오던 사람들인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협박해 오겠습니까. 핵무기 하나를 만드는데 4천억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동안 우리나라는 8년 동안 햇빛정책이라는 것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12억 달러가 넘는 돈을 주었으니 그 돈 가지고 이 핵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핵무기 만들라고 돈 준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고스란히 그들로부터 협박을 받아가며 돈 내놓으라 쌀 내놓으라 하면 이제는 무조건 주어야 하는 입장에 처해버렸습니다. 햇빛정책도 햇볕을 쪼이면 순순히 옷을 벗고 밖으로 나올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지 옷을 더 끼어 입고 더 깊숙이 들어가는 사람들인 것을 모르고 주었으니 이런 결과가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현재 우리 이웃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북서쪽에는 중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중국 사람들도 장차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아주 음흉한 나라입니다. 미국은 주한 미군을 빼간다고 야단이고 경제는 더 불확실해져가고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가 불안하고 불확실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 불확실한데도 정작 이 나라 사람들은 저 북쪽에서 핵실험을 했다고 하는데도 그래서 중국은 벌써부터 화생방 훈련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평온합니다. 

이 평온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평온입니다. 이 평온이 북한이 우리에게는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인지, 하도 사고를 당하다 보니까 핵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북한이 만든 핵은 우리의 것이 되는데 잘된 것 아니냐 하고 말하는 철없는 생각들이 이런 잘못된 환경을 만들고 오늘을 왜곡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 어떤 사회학자의 분석처럼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마음일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불확실합니다. 

이것은 미래뿐이 아니고 오늘 현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나 개인의 삶을 깊이 생각해 보아도 참 불확실합니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도 불안합니다. 지금 45세면 모두 명퇴하는데 내 나이도 점점 그 선에 가까워 오는데 그때 나는 어떻게 하나, 아이들은 지금 한창 커가고 있는데, 집 한 칸 없고, 아내보기는 부끄럽고, 미래의 길은 안보이고, 용기는 없어지고, 이것이 나의 현재모습입니다. 

그 어려운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까 직장가기가 대학가는 것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려고 이력서를 써 들고 하루 종일 뛰어다녀 보지만 마땅한 일자리는 없고 나이는 먹어가고 부모님 보기가 민망하고, 답답해서 기도를 해 보지만 무슨 징조는 없고 응답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미래만 불확실한 것이 아니고 현재도 불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가 더 암담하고 그 인생의 흔들림이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도 깊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덜 한 편입니다. 일본인들은 이 미래에 대한 확신이 더 부족한 민족입니다. 일본인들에게는 분명한 종교가 없습니다. 힌두교나 회교가 국교인 나라 민족은 그래도 의존대상 있어서 흔들림이 적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 의존대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본에는 모든 것이 다 종교입니다. 조상도 신이고, 전쟁에서 사망한 원혼도 신이고 부처도 신이고 그래서 이 모든 신들을 다 포함하고 합산해서 신사에 봉안합니다. 

 그리고 신사에 절을 하며 살아갑니다. 일본 문부성에 등록된 종교 수가 180,600개입니다. 그중에는 금을 믿는 진리교도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이루었는데 정신문명이 아주 미숙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이 일본이 미래에 대해서 가장 확신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데리고 신사에 데리고 가서 참배를 시킵니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결혼할 때면 교회에 가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진짜 교회가 아니고 가짜 교회를 만들어놓고 가짜 목사 앞에서 주례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화장해서 유골을 절에 갖다가 안치를 합니다. 이런 일본인들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저 밑바닥에 아주 막연한 복을 기원하는 불안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미래나 현재가 불확실하게 되면 이렇게 중심을 잃은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뿐 아니고 우리의 운명도 불투명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암에 걸린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또 나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내 인생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장차 내 건강은 어떻게 될 것인지”, 내 주변을 돌아보면 갑자기 어느 날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그 모습이 남의 일 같이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겁이 덜컥 납니다. 혹시 나도 암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그때 속에서 진땀이 납니다. 그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미래가 암담한 채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갈브레이스라는 미래학자가 이 시대를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불확실한 것 말고는 모두가 불확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삶이 불확실하면 빈 배처럼 빈차처럼 흔들림이 심해지게 됩니다. 베드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흔들렸습니다. 너무 외부적인 압박이 강해지고 오늘 상황을 인내하기가 어렵고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불안해서 모두 신앙이 흔들렸고 마음이 흔들렸고 중심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에서 포기하고 낙오되고 배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본문에서 베드로가 편지를 써서 그렇게 흔들리면 안 되는 이유를 써 보낸 말씀이 바로 이 본문말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도 풀의 꽃과 같다, 그래서 풀도 마르고 꽃도 떨어진다.” 그 말은 “우리의 인생은 잠간이고 마침내 꽃이 시들듯이 우리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주께서 전해주신 이 복음도 영원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 복음이 주는 말씀에 의지해서 흔들리지 말고 더 견고해지라”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영원히 의지하고 믿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주께서 주신 “복음이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고 말씀을 의지했던 사람들은 그 보다 더 큰 위기의 때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갔던 사도바울은 로마서 8:3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죽음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신 있는 자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처지에 처해도 의연했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이고 신앙인이 누리는 행복함입니다. 이런 믿음의 확신 속에 살아가면 보이지 않는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가 더 분명하게 보이고 또 더 자신감 있게 전개되는 미래의 삶에 즐거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순교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온천이 많습니다. 온천중에도 규슈에 가 보면 지옥온천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온천은 노천 온천인데 물이 항상 끓고 있습니다. 물의 온도가 100도로 뜨겁고 물이 나오는 온천구의 온도는 1,000도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온천수가 나오는 구멍에서는 증기기관차에서 뿜어내는 뜨거운 증기처럼 금방이라도 땅을 터치고 솟아나올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집니다. 일본 초기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는데 끝까지 저항하는 기독교인들을 그 뜨거운 온천탕에 집어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온천 이름이 지옥온천입니다. 

특히 162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했다고 하는데 그때 운젠 지옥온천이라는 곳이 기독교인들을 1000도로 끓는 물에 쳐 넣어 죽이는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1620년에 너무 많이 학대하니까 기독교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3,700명을 그렇게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때 기독교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후미애라는 절차를 밟아서 지옥에 떨어트렸다고 합니다. 후미애라는 것은 예수 상을 땅 바닥에 놓고 그 예수 상을 발로 밟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 사진을 발로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거부하는 사람은 운젠 지옥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사진 앞에서 저항하다가 지옥 온천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도 뒤에 따라오던 그리스도인들이 주저하지 않고 의연하게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유독 규슈지방에만 교회가 많고 십자가가 보이는 건물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나 현재가 더 이상 불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혹독한 길도 분명하고 중심 있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심정을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대신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시대, 어느 처지에서도 내 안에 말씀이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안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이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을 근거로 해서 오늘 불확실한 시대를 너무나 확실한 복음의 삶으로 이 세상에 메시지를 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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