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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이 임하시면 (요 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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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면 (요 16:7~13)


참으로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대 전제 하에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내 뜻을 이루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들 안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안에 그런 잔인한 폭력성이 숨어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데모를 일삼고 사회의 혼란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을 가진 자는 가진 잣대로 또한 자기의 뜻만 펼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폭력보다도 더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언어적 폭력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온갖 비방과 시기로 가득한 말을 퍼부어 댑니다.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또 상대방을 핍박하기를 일삼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죽이려고 듭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가 하면 선이지만 네가 하면 악이라는 식입니다. 심지어 그런 잣대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합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그럽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차라리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래도 요나는 스스로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달랐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줄도 알았습니다. 예수를 팔고 받았던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밝혔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다는 그렇게 옳고 그른 것을 그리고 어떻게 예수가 잡히게 되었던지를 부끄럽지만 자기의 잘못을 말하고 그렇게 만들어나간 추잡한 배후를 밝혔어야 하지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보다 비겁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세상의 모습입니다. 

억울하다고 죽고, 힘들다고 죽고, 희망이 없다고 죽고, 살맛이 안 난다고 죽고, 빚 갚을 길이 없다고 죽고, 공부 못해서 죽고, 시험에 떨어져서 죽고, 왕따 당했다고 죽고, 괴롭힘 당했다고 죽고, 그런 세상에서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사셨습니까? 낮고 천한 자리를 택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은 어찌 생각하면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란 뜻이 아닙니다.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값을 지고 대신 죽기 위해서, 그래서 더 이상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주님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우리의 삶의 모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님을 본받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은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이 그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주께서 떠나시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온통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당연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한 우리네 마음은 “하나님을 믿어 복 받기를 원합니다. 만사형통하기를 원합니다.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무 부족함도 어려움도 없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심도 걱정도 없이 건강하게 살되 하는 일마다 잘되기를 바라고 이왕이면 남부끄럽지 않게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거 나쁜 것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딛고서라도 그렇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나는 죽으러 왔다”고 하시면서 “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그것도 친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는 희생을 말씀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우리는 어떤 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이제 이룩하고 또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보내 주신 하나님께로 도로 돌아가야 하는 마당인데 그런데도 여전히 제자들은 이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일 땅 위의 일에만 관심이 가득합니다. 사도행전 1장 6절, 7절에서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땝니까?” 제자들이 묻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의 관심은 땅 위에 속한 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관심은 이 세상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제자들이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해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두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14:1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제자들을 달래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을 떠나서 날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은 너희들이 그렇게 슬퍼하거나 우울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고 도리어 너희들이 감사해야 할 매우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은 아주 속상한 일이요 실패로 끝나는 일 같지만 그러나 주님이 떠나심으로 보혜사 성령이 오시게 될 것이기에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즉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대속 사업을 완성하신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세상에 그냥 계시게 되면 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구약 시대 때는 소나 양과 염소 또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가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만 대속할 수 있기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를 모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요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니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떠나심으로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게 되니 또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길이 왜 그토록 힘들게만 느껴집니까? 사실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어둠 속에 비쳐지는 빛을 좋아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조금만 흔들려도 그것보라고 외쳐댑니다. 주님께선 우리들에게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고 원수를 어떻게 친구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얼굴도 보기 싫은데 어떻게 친구가 되요? 어떻게 그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정말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일까요? 입으로는 저들을 축복합니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들이 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우리네 진심이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다음의 요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외친 것은 자긴데 그러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망하지 않아야 마땅한데도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돌이켜 그들에게 재앙이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요나는 속상해 하고 차라리 이런 꼴을 보느니 나를 죽여달라고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아버지 품을 떠나 세상에서 다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그러나 아버지는 동구 밖까지 좇아나가 얼싸안아줍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저를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때 밭에서 돌아온 형이 막 화를 내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 창기와 함께 다 말아먹은 저놈을 위해서 이런 잔치를 하는 것이 어찌 마땅하냐? 오히려 아버지 집에서 죽도록 수고한 나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잔치를 차려준 적도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불쾌한 마음을 감추려고도 하지를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성도라면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의 지도자라면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그들 안에 보여지는 어긋난 모습들을 볼 때 어떻게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며 수군거리다가 이런 사람하고는 결코 같이할 수가 없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저런 사람을 떠나보내든지 아니면 내가 떠나든지 해야 되겠다고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성령 안에 있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결국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게 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시며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나를 도우실 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떠나시는 것은 곧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게 되는 것이기에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일도 정말 나를 죽이고자 덤벼드는 그런 사람을 위해서 나를 속상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사사건건 시비하는 그들을 위해서 끝까지 선을 베풀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게 되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먼저 생각할 것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누구에 대한 불평과 불만, 하나님께 대해 마음에 안 드는 그런 일들이 있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래서 내가 과연 성령으로 충만한가 돌아보시고 다시금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그래서 성령 안에서 주님처럼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귀한 사랑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오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은 몇 독 했다고 자랑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당연히 자랑할 만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몇 독씩 하면서 알게 된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과 또 하나는 자기 생각의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자기 생각의 옳은 대로 산다고 하는 것의 기준이 오직 자기 생각이라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다 옳다고 하는가? 아니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옳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옳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가지게 되면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으로만 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가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말씀을 내가 살아가는 기준으로 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도 나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건 가능한 말씀, 이건 좋은 말씀, 이건 좀 곤란한 말씀, 이건 무시해 보려도 좋은 말씀, 이건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할 말씀, 이런 식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느냐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기에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그 말씀을 바로 깨우쳐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사로잡아 내 스스로는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랬습니다. 여기 책망하신다는 말은 진실을 밝힌다, 사실을 폭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성령이 세상에 오시는가 하면 성령께서 무엇이 죄고 무엇이 의며 무엇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지를 알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야 참과 거짓을 바로 알게 되고 내가 바른 줄 알고 살았던 것이 사실은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래서 나를 바로 세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내 마음에 들려오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심을 깨닫게 되는 것도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을 울리는 말씀이 주어져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아닌 강단에서 의도적으로 주는 불편부당한 말씀으로 듣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도 우리는 핑계합니다. 그건 이래서 그렇고 저래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시면 더 이상 우리는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내가 잘못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 했냐 잘못했냐가 아니라 과연 나의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가 더 초점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죠. 하나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할 수 있도록 힘도 주시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친히 역사해 주시고,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세요 하고 기도하게 되고 그래서 판단하고 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붙잡아주고 감싸주며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죄라는 사실을 성령 안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눈 속에 들어가 있는 티와 들보라는 엄청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도 성령 안에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요 은혜 아래 있게 될 때 비로소 아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불평하던 일도 감사하게 되고 전에는 좌절하고 주저앉던 일에도 오히려 당당하게 힘을 내서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요 내가 쓰기에도 부족한 것을 가지고도 오히려 넉넉하게 나누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먼저 해야 될 것과 나중 해야 될 것 그 우선순위를 바로 정해서 살아가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모든 힘의 원천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본입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 원수까지도 친구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권능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이, 사랑할 수 없었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권능이,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에 평화와 기쁨과 감사로 넘치게 하는 권능이,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입을 열어 찬양하며 감사하며 증거하게 되는 권능이,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게 되는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요 예수를 영접하는 우리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하늘나라가 우리 앞에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세상의 어려움도 능히 견디고 이기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의 길을 지도해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어둠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으며 어떤 환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오히려 주님만을 바라며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들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 이르는 것처럼 그렇게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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