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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희년이 된 사람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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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이 된 사람 (눅 4:16~21)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 예기치 않은 말씀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유대력의 오순절에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오순절(Pentecost)은 ‘50일’을 뜻하는 그리스 말로 본래는 유대인들이 보리 수확을 마친 후 햇곡식으로 만든 두 개의 빵을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였습니다(레23:17). 나중에는 이 절기가 이스라엘 역사와 결합하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이날은 그런 의미에서 야훼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탄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인류, 곧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후 골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골방 문을 박차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한 사건을 통해 과연 성령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가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주님은 마침내 세상 앞에 당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짤막하게 보도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4:14a) 그 무렵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넘겨받아서 바로 이 대목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

이 말씀은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에 해당하는 대목이지만, 자세히 비교해보면 상당히 변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이 대목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압축했고, 어떤 부분은 생략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은혜의 해와 더불어 언급된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라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이 상기시키는 폭력성을 저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이 내린 까닭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주님의 영은 온갖 매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오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빚을 지고, 자기 땅을 남에게 넘긴 채 소작인으로 혹은 종살이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희년의 나팔소리였을 겁니다. 희년의 해 7월 10일,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yobel) 소리가 길게 울리면, 종은 자유인이 되고, 땅은 원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그 나팔 소리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주님의 영은 생을 짓누르는 온갖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는 영입니다.

주님이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은 그의 입을 주목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말을 들게 됩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너무나 명료하고 강건한 선언입니다. 주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당신의 삶이야말로 희년의 구현임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마디로 희년을 현재화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 알아차리기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저 높은 강단에서 불이라도 쏟아낼 것 같이 사자후를 발하는 사람들입니까? 가혹한 삶의 조건에 짓눌리고, 잘못된 정책에 채여 점점 변방으로 내몰리는 이들 곁에 서서 그들에게 희년의 삶을 가져오려 애쓰는 사람입니까? 며칠 전 어느 잡지사 기자로부터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한 마디로 요약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건 거의 억지 부탁인데,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공감의 능력이 큰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공감이란 ‘그의 마음을 나도 함께 있는 그대로(共) 느끼는 것(感)’입니다. 

어머니는 공감의 대가입니다. 어머니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왜 그럴까요? 어머니와 아기는 사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공감이란 어떤 의미에서 한 몸 의식입니다. 예민한 분들이 피조물의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그 피조물과 자신이 사실은 한 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입니다. 그들은 제 몸의 고통은 알아도 남의 고통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습니다. 공감은 또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의 능력입니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노랫말이 있지요? 사랑은 이처럼 무모한 열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공감의 능력이 큰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 공감의 대상이 꼭 동료 인간이나 피조물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상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공감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십니다.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고전2:10b-11)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 수요 모임에서 우리는 복음성가를 반복해 부르면서 깊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눈길 머무신 곳 그곳에 내 눈 머물고
하나님 손길 닿으신 곳 그곳에 내 손 닿으리
하나님 마음 두신 그곳 그곳에 내 맘도 두고
하나님 계획하신 그곳 그곳에 내 삶 드리리
나 경배합니다 주님 주님만 닮게 하소서
나 예배합니다 주님 주님만 좇게 하소서 

성도의 삶을 이처럼 잘 요약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지하고, 그 마음에 공감합니다. 예언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정념’(pathos)에 공감하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이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거룩한 분노
하나님은 언제 아파하십니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들이 그 본디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아갈 때가 아닐까요? 탐욕으로 마음이 썩고, 함께 살아가라고 주신 이웃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이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한 암몬 사람 나하스는 항복하겠다는 주민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뺌으로써 이스라엘을 모독한 후에 조약을 맺겠다고 말합니다. 밭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던 사울도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자, 사울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겨릿소 두 마리를 잡아서 여러 토막으로 자른 다음, 그것을 전령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로부터 군인들을 소집하라고 명합니다. 사울은 그 군인들을 이끌고 암몬 군대를 몰살시킵니다(삼상11장). 소년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보며 분노하여 몸을 일으킵니다(삼상17장).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도 분노할 줄 모르는 기독교는 살아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현실 때문에 누구보다 아파하실 분이 주님이신데, 그것을 외면한 채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어떻게 성직자로서 히틀러 암살모의에 가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합니다. ‘미치광이 운전사가 거리로 차를 몰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을 때 성직자는 죽은 이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운전자를 차에서 끌어내야 하겠습니까?’ 

기독교가 따뜻하고 안락한 삶에 투항하는 순간, 복음의 정신은 죽게 마련입니다. 강자들의 논리를 내면화한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거룩한 분노를 잃어버릴 때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빛도 소금도 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성전 체제를 보면서 ‘이 성전을 허물라’ 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를 느낀다고 하여 날마다 화를 내고, 사사건건 싸움닭처럼 시비를 걸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릇된 것에 대해 비판도 해야 하지만, 그들조차 거룩한 일에 동참하도록 끈질기게 요구하고, 또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 일으켜 세우는 힘
사람들 속에는 불이 밝혀지길 기다리는 심지가 있습니다. 그 심지에 선한 불길을 붙이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심없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깊이 감동합니다. 사실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거룩한 삶의 적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싸움이 자기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다 하지만, 자기와 싸워 이기는 사람을 강하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力)이 외적인 힘을 의미한다면 ‘강하다’(强)는 말은 내적인 힘을 뜻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어찌 생명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자기와의 싸움에서 여러분은 늘 승자입니까? 바울 사도는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롬7:14)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이라면서,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도 없고 복종할 수도 없는 자신의 무력감을 토로했습니다. 해결책은 없나요?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수님과 같은 친밀함을 가지고 부르십니까? 그리고 일상의 모든 순간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요16:13). 성령은 너와 나 사이에 놓인 분리의 장벽을 허물어 마음이 통하게 하시고,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성령은 또한 고난의 자리에서도 두려움 없이 맞설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받을 박해를 예고하면서 그들이 관원들에게 넘겨질 때에도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10:19b-20)

얼마 전 예수 포럼 강사로 오셨던 한승헌 변호사님은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열린 법정에서 있었던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습니다. 계엄당국은 운동권들이 함께 몰려다니면서 남녀관계가 문란하다는 혐의를 씌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남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검사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김동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김동완, 저기 있는 이미경이 애인 아니야?” 그러자 김목사님이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살벌한 법정에서 단상, 단하가 모두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이런 여유, 유머는 이겨놓고 싸우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변호사님은 법정에서 기독교인 피고들을 변호하다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주눅드는 법이 없었고,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변호사님은 ‘사서 고생하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 역사의 주체로 서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들은 역사 속에서 당당한 주체로 섭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로는 먼 길을 갈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않고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입니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일으킨 놀라운 기적에 대해 말합니다. 그의 죽음은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 같아 낙심한 사람들, 무기력증 속에 빠진 이들 속에 새로운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세상의 꿈 하나를 유산처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고레스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성령은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성령은 나만을 위해 살던 사람을 일으켜 이웃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에서 희년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고,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려주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이 되어 주고, 걷지 못하는 이들의 발이 되어 줍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몸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의 삶은 희년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우리도 이웃들 속에서 이런 희년의 기적을 일으키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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