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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합당하게 행하라 (엡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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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하게 행하라 (엡 4:1~7)


오늘은 부활절 후 7번째 맞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신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을 내내 너무나 큰 충격과 놀라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張三李四가 목숨을 던지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우리국가의 수반이었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세상 버림의 사건은, 예기치 못했던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설치된 301개의 분향소에 500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간 것이나, 국민장 당일에 덕수궁 앞뜰과 서울광장에 모여든 수십만의 장례인파는 온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개 들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의 쓴 뿌리를 보면서 마음이 참 많이 아픕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시금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답을 다시 찾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답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시대가치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시대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추종하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요?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은 우리나라와 우리사회는 지금 분명히 가치혼돈의 시대인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일제식민경험과 해방 후 건국과 6․25전쟁, 군사정권과 산업화, 민주화갈등,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좌우이념의 갈등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린 내려 있는 가치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길을 간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유리하는 소수의 遊牧民에 지나지 않던 그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이집트에 내려가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면서 큰 민족을 이룹니다. 지도자 모세와 함께 출애굽합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면서 율법 말씀을 받고, 배웁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언약의 땅 가나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자(그와 함께 했던 장로들마저 죽자; 수 24, 14 「세겜언약에서」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고 당부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350년 동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맙니다. 가치혼돈의 시대로 바꾸어 버린 것이지요. 그 가치혼돈의 핵심은, 하나님 경외함보다 가나안 땅의 우상 섬김에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였던 S. A. Kierkeggard(1815-55)가 평생 추구했던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하는 문제였습니다. 그가 찾은 답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말은 좀 어렵지만, 뜻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同時的으로 사는 것”,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추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을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라고 했던 겁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라고 본 것이지요. 

로마서 14, 7-8 말씀에 주목해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主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主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던져진 문제의 답이 다 있지 않습니까?

▶ 사도 바울은,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 된 저와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그 권면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입니다. 절망이 아닌, 삶입니다(Kierkeggard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그 병은 절망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권면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처해 있던 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어디인지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바울이 처한 삶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監獄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1절).

역설입니다. 어찌 갇힌 자가 自由한 자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까? 罪囚의 몸이 되어 있는 사람이, 어찌 자유자로 살아가고 있는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이런 권면을 할 수 있습니까? 감옥 바깥에 있는 자유자들이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권면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거꾸로 되었습니까? 이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에, 그리스도인 됨의 삶의 능력이 있는 겁니다.

Kierkeggard의 말처럼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단독자󰡕가 되면, 그런 사람에게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냐 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부르고 싶은 찬송 323장 찬송이 저와 여러분의 찬송과 고백이 될 것입니다.

(1)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蔑視賤待 十字架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상대적인 이 시대의 世俗價値, 상대적인 義, 비교우위적인 어떤 삶의 방식으로, 우리 삶의 가치나, 이유, 의미를 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의 유일한 믿음의 主되신 ‘예수님의 자리’에 올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삶의 이유이고, 의미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를 해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거부하는 이방인들에게,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그가 처해 있던 삶의 자리를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합니다. 갇힘이라는 삶의 자리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절망이 될 수 없었다는 겁니다. 

도리어 바울은 떳떳하게 자기 인생을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갇힌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 존재(인생, 삶)가, 아예 ‘예수 그리스도 에게 갇힌 자’라 고백합니다. 우리가 갇혀도 예수님에게 갇혀야 합니다. 자기 의나, 자기 욕망이나, 자기 명예나, 자기 비전에 갇히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갇힌 자인데, 예수님 때문에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 갇히지 못하겠습니까? 감옥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놀라운 삶의 이유입니다. 용기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갇힌 자입니까? 내가 갇힌 삶의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리스도인은 갇힌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입니다. 나를 가두시는 가둠은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합니다. 그 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舊蘇聯 군인들에게 러시아어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루마니아 공산치하에서 14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R. Wurmbrand 목사님이 있습니다. 햇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도 않는 지하 독방에서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인권이 있습니까? 밥 넣어주는 간수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찌, 미치지 않고 살겠습니까? 

감옥에 투옥되자, 그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감옥에서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 대상이 누군지 아십니까?(처음에는 교인들을 생각하며 설교했습니다. 반응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내용들이 “하나님 좀 따져봅시다”였습니다. 하나님께 따질 것이 한 두 가지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만 하셨습니다. 14년 뒤에 나중에 그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14년 동안 침묵만 하시는 것 같았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이 투옥되어 있던 바로 그 14년이라는 기간을 󰡔하나님의 지하운동󰡕의 시간으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그러면 주 안에서 갇힌 자 된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合當하게 행하라”(1절 하). “부르심, 합당함, 행하라” 세 단어가 그의 권면입니다. 이 세 단에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이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가만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여자로부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까지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부름 받은 존재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인 겁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M. Luther는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직업은 하나님의 召命이라는 거지요(Calling, 天職).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서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合當함󰡕이라는 인간 편의 應答이 있어야만 합니다. 합당함이라는 인간 편의 응답이 없으면, 그 부르심은 거부가 되고 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자들이 많습니다. 합당하지 못해서, 부르심에 실패한 자들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열방을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 받았지만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선민주의에 빠졌습니다. 우월의식으로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 경멸하며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습니다. 

합당함이란, 어떤 ‘기준’이나 ‘범주’에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의 어원적인 뜻에는, 기준에 맞는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운다’는 뜻이 있습니다. 들보가 무엇입니까? 기둥과 기둥 사이를 건너질러, 건물을 지탱하게 해주는 나무입니다. 합당함이란, 건물을 지탱해주기에 적절한 꼭 맞는 들보를 하나 더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꼭 맞는 들보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얹어야(짧거나, 길거나, 굽거나, 너무 가늘거나 너무 굵거나 하는 것 다 쓸 수 없지요) 그 건물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내 인생이라는 건물의 기둥에 꼭 맞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들보’를 얹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내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겁니다. 그럴 때, 건물이 서로 相合하여, 견고하게 서는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행하라”하셨습니다. 여기, 행함이란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부르심’과 ‘합당함’과 ‘행함’은 그리스도인 됨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떨어져버릴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입니까?(교회 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씀, 가정, 국가공동체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모든 겸손과 온유입니다. 겸손은 본래,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부정적인 의미였습니다. 비굴한 태도나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이나, 굴욕적이고 노예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겸손이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가정과 국가공동체를 세우는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자기 의나, 자기 명예나, 자아실현을 위하여 과감하게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외향적인 그리스로마적인 용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자기를 비우는(자기포기, 내려놓음) 겸손이 복음적인 삶의 방식이고, 복음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온유도 그렇습니다.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온유란, 개인적인 명성이나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고,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품을 말합니다. 온유는 강한 자가 자기 힘을 조절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부드러움입니다. 그리고 또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했습니다. 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일에 부르심을 받았든지, 꼭 기억해야 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심을 받았던 바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을 부르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異邦人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하셨습니다(행 9, 15). 바울은 ‘택한 주님의 그릇’이었던 겁니다. ‘그릇’이라는 말에는 대단히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릇을 쓰는 주인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어디, 바울만 그릇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릇입니다.

고린도후서 4, 6에서는 “우리가 이 보배(예수 그리스도, 복음)를 질그릇에 가졌으니”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그릇󰡕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릇 중에서도 질그릇에 비유됩니다. 깨어지기 쉽습니다.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보배를 담고 있기에 귀하게 쓰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질그릇이기 때문에, 보배를 담고 있기가 참 부담스럽습니다. 힘에 겹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질그릇을 자꾸 강한 그릇으로, 멋진 그릇으로, 만들어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질그릇을 쇠그릇으로, 은그릇으로, 심지어는 금그릇처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우리 속은 여전히 흙덩이인데도 겉이라도 쇠로, 은으로, 금으로 꾸며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강해진 듯, 아름다워진 듯이 보일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릇이 근사해지면 근사해 질수록 그 그릇 속에 담긴 보배는 그만큼 빛이 덜납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그릇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고 마는 거지요. 우리가 예수를 이런 식으로 믿습니다. 질그릇은 깨어져야 보배가 빛이 납니다. 질그릇 된 나를 가꾸기 위해 살지 말고, 내 안에 담긴 보배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남긴 유명한 말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 30). 아멘.

하나님 아버지,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질그릇 같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인생임을 깨닫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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