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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잔치하는 인생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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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하는 인생 (요 2:1~11) 
 

1. 잔치하는 인생

오늘 저희 교회를 처음으로 찾으신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늘 잔치하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잔치하는 삶이다”라고 하신 목사님이 계셨는데요. 지금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만, 이전에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 있던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부교역자 시절부터 이 목사님과 한신교회가 주최하는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었는데요. 거기서 이 목사님의 감동적인 두 가지의 신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별세(別世)”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말한 “별세”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성도가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대신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고 예수님이 주인 되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신앙생활은 잔치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잔치”란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모든 일이 잘 되어서 항상 즐거운 삶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그보다 더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원망 불평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도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니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삶, 즉 잔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여러분 모두의 삶이 바로 이런 잔치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항상 즐겁고 행복한 잔칫집 같은 인생입니까? 슬픈 초상집, 그 정도는 아니라도 한숨만 나오고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한 병상(病床) 같은 삶입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삶이 어떻기를 바라실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이 항상 잔치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 장기 중환자 병동 같던 이스라엘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은 아주 강력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166년부터 66년까지 약 1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se)’의 학정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성전을 약탈하고, 제단과 신당과 우상들을 세웠으며, 거기서 돼지와 더러운 짐승들로 제사를 올렸습니다. 예루살렘에 불을 지르고 성과 가옥들을 파괴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들을 학대했으며, 유대인들에게 전통과 관습을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공공연한 자리에서 성경을 찢었습니다. 이것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우리의 일제 강점기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통이 길어지고 한이 쌓이면 백성들이 참을 수 없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카비 운동」이라 부르는 이 운동으로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獨立시켜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로 알았으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할아버지인 에돔 사람 안디바스가 이스라엘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헤롯 일족이 되어 유대인들을 유린했고, 자신들이 제사장직까지 겸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앙까지 짓밟았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70년 경,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 이스라엘도 완전 점령당해 망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강대국들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할 때,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인 제사장들과 지식인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까지 타락하여 유대인들은 안팎으로 의지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인 안나스는 교활하고 권력을 좋아했으며 탐욕이 많고 가혹한 사람으로서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리아 총독 발레리어스 크라터스가 그를 파면시켰습니다만, 뇌물을 주어 자기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이 되게 한 다음 계속 해서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독립 운동을 추진했던 열심당(질롯당)이나 씨카리(Sicarri) 운동 등이 있었고, 또 바리새인들 중에도 이상 세계(사11), 이상적인 왕(67:17-25, 사65), 理想國家인 메시아 왕국을 꿈꾸던 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아주 미약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당시 유대 땅과 유대 백성들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가운데 있었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불행한 처지에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병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메시아를 기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외는 달리 해결책이 없는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3. 위기를 만난 잔칫집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초창기,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요단강 주변 베다니에 계시다가 3일 후, 갈릴리 가나로 가셔서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그 결혼식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있었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함께 초청을 받았습니다(1,2).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이 주일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결혼식 첫 날,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갔다가 다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오면, 그날 밤 횃불을 밝힌 가운데 결혼 예식이 올려졌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신랑 집에 모여 축하하면서 신랑과 신부를 축복했는데요, 초청 받은 손님들은 풍성한 음식을 마음껏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랑신부를 축복했습니다. 이 잔치 기간 동안 신랑과 신부는 왕과 왕비와 같은 대접을 받았지요. 여러분, 결혼식만큼 기쁨과 꿈과 행복이 가득한 때가 언제겠습니까? 신랑과 신부도 기쁘지만, 하객들도 덩달아 즐겁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향해 결혼 때의 사랑과 맹세, 그리고 결혼식의 즐거움과 풍성함이 평생 계속 되기를 빌어주면서 말이죠.

그러나! 살다보면, 원치 않게도 문제가 생기고, 부족한 것들이 생기고, 그로 인해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살다가 위기를 만나고, 어느 정도 살다가 서로에게서 문제를 발견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작에, 그러니까 결혼식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한참 결혼식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그때 그만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석회암 층이라 식수가 절대 부족합니다. 그래서 식수와 음료수 대용으로 포도주를 담가 마셨지요. 더더군다나 포도주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젊은 부부와 그 가족들을 축하해 주며, 그들과 함께 흥에 겨워 잔치하는 결혼식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결혼 잔치의 포도주는 결혼식의 기쁨을 더해 주고 모두 함께 즐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잔치 날이 며칠 더 남았는데도 포도주가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손님을 초청해 놓았는데 음식이 떨어져 보십시오. 얼마나 낭패스럽습니까? 

잔치 집 음식은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한 사람들, 이웃들, 오신 손님들에게 약간의 음식이라도 들려서 보내는 것이 인심입니다. 어릴 때 동네잔치가 벌어졌을 때 지짐 굽고 계신 어머니에게 가서 눈치껏 얻어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잔칫집에 가셨던 어머니가 하얀 손수건에다가 약간의 떡과 지짐을 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주실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잔치는 풍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무엇으로 건배를 합니까? 떡을 들고서 ‘건배’할 수 있습니까? 국을 서로 들고 국그릇을 부딪치며 ‘찬 찬 찬’할 수도 없잖습니까? 예상보다 손님이 많이 왔는지, 주인이 돈이 없어 모자라게 준비했는지, 혹은 포도주 준비를 맡은 종이나 책임자가 돈을 빼돌렸는지, 아무튼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 역시 끝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우, 혼인 잔치를 벌이고 손님을 초청했는데 포도주가 없으면 유대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벌금형’을 받도록 했다고 합니다. 즉 초대받은 손님들이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자기들이 무시당했다고 여겨 고소를 하면 로마의 형법이나 민법에 따라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의 종교법과 관습법도 이에 대해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는 “포도주가 떨어짐은 신랑 신부의 수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랑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랑의 부모 형제들이 하객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시집 온 신부는 ‘결혼식 포도주가 모자랄 정도로 궁색한 집으로 시집 왔나보다. 속았구나!’하고 후회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나들이옷을 입은 하객들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돌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불행의 상징이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덕담이 오고가기보다 악담이 오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소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신랑이나 신부 혹 그 부모의 입장에서 결혼하는 날, 전적으로 축하와 축복만 가득 차야하는 날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정말 재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랑이 입장하다가 넘어졌다든지, 신부가 입장하다가 길게 늘어뜨려진 드레스를 밟아 넘어졌다든지, 갑자기 전기가 나간다든지 … , 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우리는 ‘재수 없다, 불길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처럼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신랑과 신부의 앞날이 불행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었습니다. 본인들 뿐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들의 입장에서도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것은 단순히 잔치집의 모습이 아니라, 그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시작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이스라엘이 늘 이랬습니다. 뭔가 될 듯 하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망해 버리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70년 혹 그 이상의 노예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자리를 잡고 독립된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나, 안티오쿠스 4세에게 철저하게 짓밟혔습니다. 

유다 마카비우스와 그의 동지들이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는가 싶더니, 로마에 의해 비참하게 짓밟혀 이스라엘은 또 다시 쑥대밭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마치 잔치집의 포도주 항아리가 텅 빈 것처럼 이스라엘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무늬만 이스라엘이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조차도 없어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갈릴리 지방, 유대지방이라는 行政區域上의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통치의 윗선은 로마, 그 아래는 로마가 파견한 총독과 이방인인 헤롯이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사람들의 심령도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즐거우십니까?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즐거움이든, 아니면 주안에서의 신령한 즐거움이든, 아무튼 여러분은 즐거우시냐고요? 건강은 어떻습니까? 가정은요? 가족들이나 자녀들 다 괜찮으십니까? 돈은요? 남아돌지는 않아도 살아가기에 모자라지는 않는지요? 혹시 여러분들에게 ‘이러다가 뭔 일 당하지’ 하는 불안한 마음은 없습니까? 혹시 어느 날 사고나 질병이 여러분 자신이나 가족들에게 찾아오지는 않을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직장이나 사업에 대해 염려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자녀들의 앞날이 탁 트여 훤하게 보입니까? 구약 잠언에 ‘웃음 끝에도 근심이 묻어있다’는 표현이 있는데요(잠14:13), 이 말씀처럼 즐거운 것 같으나, 행복한 것 같으나 돌아서면 근심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이 여러분의 형편은 아닌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잠시잠간 잔치 같은 즐거움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 삶의 대부분은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또 지금은 별 일이 없지만, 지금은 사업이 잘 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불안합니다. 자녀들을 바라보면 더더욱 불안합니다. 혼란스러운 지금의 시국이 어떻게 돌아갈지,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이 저러다 잠잠해질지 아니면 우발적인 짓을 하지는 않을지 …. 그러나 여러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염려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기, 여러분의 삶이 늘 잔치 같기를 원하시고, 지금의 잔치와 같은 삶이 그대로 ‘쭈욱’ 이어지거나 더 즐거워지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4. 예수가 계신 잔치집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불행하게 끝날 위기의 잔칫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잔치 집의 포도주가 동이 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아리가 있는 대로 거기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집에 오는 손님이나 또 자신들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그리고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기 위하여 반드시 집에 큼직한 항아리들을 두었고, 거기에 물을 채워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사용된 항아리의 크기는 80 리터 정도였습니다. 기름보일러의 기름 탱크가 보통 100 리터짜리라고 하니까, 80리터 항아리면 상당히 큰 항아리입니다. 마침 그 잔칫집에는 이런 항아리가 6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에 물을 가득 아귀까지 채우라’고 하셨습니다(2:7). 그리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제가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과 그 행하신 일에 대해 비판적인 일부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포도주, 그것도 잘 숙성하여 맛이 기가 막힌 포도주를 이렇게까지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맛있는 포도주를 그렇게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역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아주 질 좋은 포도주를 아주 풍성하게 남아 돌 정도로 만드셨다는 것을 그들이 간접적으로 증거하더라고요. 

예수님께서 물로 만드신 포도주의 맛은 어떠했을까요? 10절에, 그 맛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혼가를 대신하여 결혼을 주관했던 연회장이 신랑에게 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먹었던 포도주도 괜찮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다들 적당히 취했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것을 내어도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더 좋은 것을 내다니…!’ 그래서 그 잔치는 뒤로 갈수록 기쁨이 더 커졌습니다. 기쁨 두 배! 만족 두 배! 잔치를 벌인 사람들이나 초대된 사람들 모두 씁쓰레한 기분으로 잔칫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심으로, 그가 역사하심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래서 신랑과 신부와 가족들과 하객들 모두의 기쁨은 더 커졌던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풍족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원치 않게 많은 것들이 모자라게 됩니다. 인간적인 사랑도 모자라게 되고, 세상의 즐거움도 모자라게 되고, 돈도 모자라게 됩니다. 우리의 젊음 또한 너무나 짧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능력과 실력의 포도주가 바닥 날 때가 옵니다. 더 이상 젊은 사람들과 견줄 수가 없어 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돈의 포도주가 바닥이 나고, 부부관계에 애정의 포도주가 바닥이 나서 그야말로 썰렁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다면, 모자람이 없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최소한 지금 이대로라도 유지될 수 만 있다면, 괴로움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천국생활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는 이처럼 늘 모자람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늘 모자람의 연속입니다. 처음부터 모자랐던 것은 아닙니다. 뭔가 될듯하다가 안 되는 경우, 잘 가다가 끝에 가서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나가다가 중간에, 꼭 끝나기 직전에 멈추어 서버리는 바람에 낭패를 당하는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몇 점 차이로 대학입시나 입사 시험에 실패하여 눈물을 짓는 경우, 몇 시간 차이로 중대한 일을 놓치는 경우, 100분의 1초 차이로 4년여를 준비한 금메달을 놓치는 경우,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모자라 기업인에게 사형선고 같은 부도를 맞는 경우, 돈 때문에 신용 불량자가 되는 경우…. 자신의 부족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일에 몰입하거나, 소일거리를 만들거나, 부족한 것이나 실패를 잊기 위해, 때로는 자기 자신까지 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안쓰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이나 술로서 자신을 잊으려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끊기도 하지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고, 자신의 부족을 한탄하고 저주하는 더 강한 몸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위기의 잔칫집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텅 빈 지갑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가정, 불안한 가정에 찾아오셔서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그곳을 충만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기뻐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의 비어있는 것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느 순간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5. 잔치는 계속 되어야 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위기를 만난 잔칫집과 신랑과 신부와 그 가족들의 위기를 더 나은 축복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잔치집이 아니라 초상집 같습니까? 밋밋하고 맹물처럼 재미가 없습니까? 실패와 좌절의 문 앞에서 서 있습니까? 내일이 불안하십니까? 노래보다는 한숨이, 웃을 일보다는 울 일이,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납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족의 현장에 계셨던 예수님이 여러분과도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예수님만이 여러분에게 일어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이 웃음으로 시작했다가 슬픔으로 끝나거나, 축복으로 시작했다가 저주로 끝나거나, 잔치집이 초상집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더하고, 행복이 더하고, 축하와 칭찬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준비 해 놓았던 것,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것들이 다 바닥나는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다시 채우시고, 아니 전혀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채워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잔치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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