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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용할 양식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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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마 6:9~13) 



지난 한 주간은 마치 옛날 현직의 나라님 곧 임금이 별세 했을 때와 다름없는 國喪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저는 1992년 김대중 씨가 3번째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이 되었을 때, 마치 정의가 패배한 것 같은 통분한 생각이 들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금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 광경을 지켜보면서 여러 차례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거짓과 불의, 변절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와 이상은 분명 고귀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제 제 아이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본 받기를 바란다는 전화를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슬피 우는 수많은 국민들의 장례 행렬을 보며, 한 사람의 목사로서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음도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노대통령의 꿈은 성취되고 실현한 것보다 그야말로 하나의 이상에 그치고 말았던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다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선한 뜻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그토록 국민들이 존경을 표한다면, 오늘날 만 가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공경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사는가 생각할 때에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지난 번 주순영 선교사님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에 전 인민들이 자기들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이상으로 대성통곡을 하고, 충격에 못 이겨 자살한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한 놀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순영 선교사의 말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으며, 충격을 받아 죽은 사람도 없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했을 때에 가슴이 뜨끔한바 있습니다. 물론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죽었어야 옳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들을 무섭게 착취하고 압제한 독재자가 죽을 때에도 그렇게 슬피 우는 인간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울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할 때에, 주님께 참으로 송구스런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금번 노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크게 슬퍼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깨닫고 뜨거운 감사의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은 신자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에, 주님께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결코 민족의 희망이 될 수 없고, 또한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 역시 기도해주어야 할 연약함이 많은 통치자이지, 결코 민족의 메시아가 아닌 것을 깨닫고,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기도문 강해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정신의 모범, 순서의 모범이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는 주기도의 정신으로, 주기도의 순서로 기도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시작된 주기도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둘째, 하나님 나라를 위한 “나라이 임하옵시며” 셋째, 하나님의 뜻을 위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우선적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제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처럼 ‘우리’ 라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님은 우리가 자신에 관한 기도를 할 때, 일용할 양식부터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맨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또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신체적 의미의 생명, 또는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므로, 우리는 생존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이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과, 불교와 같은 범신론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종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만이 가지는 연약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도록, 인간다운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심이 깊어 갈수록,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의 냄새는 점점 없어지고, 하나님의 냄새가 많이 나는 것이, 신앙적인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금욕주의적인 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볼 때, 금욕주의가 가장 번성하여, 육체를 학대하며, 육신을 악한 것으로 정죄하고, 금욕주의, 혹은 신비주의나 은둔주의가 성행할수록, 참된 기독교는 언제나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할 때에 기독교는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었고, 기독교 자체도 암흑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매우 포괄적이고, 전인적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살전 5:23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케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영혼과 몸, 즉 인간의 전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어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육체가 제외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당시에 유행했던 금욕주의적인 신앙의 위기, 즉 영혼만이 귀중하고, 육체나 물질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한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그와 같이 주장하는 자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기적을 베풀어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병자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며 치료하신, 현실에 관심이 크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에게 일주일 분의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으며, 혹 한달 분의 양식, 또 평생에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일용할 양식, 곧 그 날에 반드시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출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비한 양식인 만나를 하늘로부터 내려 주신 기사가 있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어서, 신비한 양식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일주일 분이나, 한 달 분이 아니라, 그 날에 필요한 ‘만나’ 만을 거두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출 16:18의 말씀을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식량 문제는 남아도는 것도, 부족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많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고, 또 너무 부족하면, 물질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나누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기도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명하신 그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해도 괜찮은가? 하나님께서 그런 세세한 일까지 신경 쓰시도록 해도 괜찮은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이 기도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창 28장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의 아름다운 기도의 모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여기서 야곱은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 6:25 이하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를 금하신 것이지, 기도를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유명한 ‘죠지 뮬러’는 5만 번 이상의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2,000명이 넘는 고아를 양육하면서, 또한 선교 사업도 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람에게 꾸거나 구걸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우리는 잠 30:8,9에 나오는 ‘아굴’이라는 경건한 성도의 기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얼마나 귀하고 경건한 기도입니까? 여러분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라는 기도 앞에 누구든지 ‘아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하게도 마옵시고’ 라는 구절에도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내가 배불러서 물질 만능 주의에 취하여, 하나님을 망각하고, 물질만을 따르는 사람이 될까 두려워해서입니다.

2. 노동의 책임을 가르쳐 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는 노동의 책임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공중에 나는 새,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그러나 공중의 나는 새를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얼마나 부지런하게 먹이를 구하러 다닙니까? 들의 백합화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얼마나 부지런히 영양분을 흡수합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주님의 재림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현실의 모든 삶을 도외시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3. 감사와 자족의 삶을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의 양식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식사 때 감사의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약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오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버트 번스 라는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있는데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먹을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먹을 것도 주시고

먹을 수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먹을 것은 있는데,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일입니다. 당시 미국의 첫 손가락으로 꼽혀지던 석유 재벌 회장이 영양실조로 사망한 적이 있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입니다. 질병으로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먹을 것은 많은데, 갖가지 질병으로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 가운데는, 먹을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먹을 것이 없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아대책 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먹을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1년에 18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하루에 양식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이 하루에 5만 명, 한 시간에 2천 명, 1분에 34명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민족은 30%가 너무 많이 먹어서, 다이어트가 옛날의 배고픔만큼이나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년간 약 15조원에 해당되는 음식을 버린다는데, 이것으로 북한 동포 전체의 식량 문제를 상당히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 끼 밥을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영양 과다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낭비의 악습을 고쳐야 합니다. 과소비의 허영을 불태워야 합니다. 굶주린 자의 신음 소리가 세계의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는데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월드비전과 같은 구호 단체에 성금도 보내고 해서 굶주린 이웃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4. 선교의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여기에 ‘우리’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은 영적인 양식으로 확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전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양식을, 영적으로 기갈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나누어주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음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음식은 살려고 먹지만, 먹으면 죽는 음식입니다. 요 6장은 예수님께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육적 양식을 공급하심과, 아울러 영적 양식을 교훈 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튿날 아침부터 썩어질 양식만을 위해 나아오자, 예수님은 먹고 죽을 양식을 위해 살지 말고, 먹고 영원히 사는 양식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일하고 자는 것을 생각 없이 반복하여 사는 동안, 교회 밖의 사람들은, 먹으면 죽는 음식 한 가지만 알고, 그것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영원히 죽게 됩니다. 인생이 음식 먹는 것과, 잠자고, 일하는 것은, 사는 것이라기보다, 실상은 죽어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는, 죽는 것 같으나 사는 것입니다. 살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과, 방향과, 그 의미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는 것이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기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 하는 것은, 아름다운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열심히 일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들의 백합화도 우리 식 으로 하면 다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감사와 자족을 가르쳐 줍니다. 딤 6:6-7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 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전도의 책임을 가르쳐 줍니다. 육신의 양식은 아무리 먹어도 결국은 죽고 맙니다.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곧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쌀과 같은 육신의 양식도,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나누어주는 일도 힘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식사 때마다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식욕과 건강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왕성한 말슴 식욕을 함께 허락해 주셔서, 여러분의 영혼도 건강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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