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강림주일]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롬 8:22~27)

  • 잡초 잡초
  • 399
  • 0

첨부 1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롬 8:22~2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성령의 오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정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스도 부활 후 50일되는 날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을 기점으로 보혜사 성령의 계절을 맞이합니다. 즉 11월 말 대림절이 오기까지 일년의 절반이상을 보혜사 성령의 계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유대인들이 첫 곡식을 감사하던 절기였습니다(레 23:15-16). 그런데 나중에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의미가 추가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후 50일 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하나님과 율법을 통해 계약을 맺었는데, 이것으로써 이날은 첫 열매를 감사하는 절기를 넘어서서 유대인들에게 구원사적인 의미를 가진 날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수확의 첫 열매를 드리던 감사의 절기인 오순절은 이제 성령께서 임하셔서 교회라는 첫 열매가 맺혀진 것을 감사하는 절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이, 이제는 성령을 주신 사건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생겨나게 되었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가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성부 하나님의 시대, 신약성경의 성자 하나님의 시대, 그리고 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시대를, 우리는 이 짧은 시간 설교를 통하여 입체적으로 구현하여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성령 안에서, 성령 충만하여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다짐해보려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입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 그리고 성자 하나님과 구분되는 동시에 그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만 혹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계시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와 동시에 성령은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 팔레스틴에만 계시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은 이천년 전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이 모든 시간들과 공간들 속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현재적 사건이 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깨닫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하여 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 한번 일어났던 그리스도 사건이 우리 안에서 현재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살펴보며 또한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몸 말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 좁은 유대 땅을 떠나 아주 놀라운 속도로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이 세계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 로마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삼백 수십 년 전,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물론 그 제국은 그리 오래 가지 못 했지만 이로 인해 그때까지 서로 단절되어 있던 나라와 나라, 지방과 지방 사이에 교류의 길이 열렸습니다. 특히 당시로서는 최첨단, 선진문명이었던 그리스 문명이 소아시아를 넘어서 인도지역까지 전파됨으로 광대한 그리스문화권이 형성된 것입니다. 곧 이어 로마제국이 이를 이어 받게 되는데 이로서 전 근동과 유럽이 하나의 문화, 하나의 정치로 통일됨에 따라 복음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도움은 이런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왕국시대에 그리고 로마시대에 주요 도시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당시 로마 제국 안에서 발달된 도로와 행정의 도움을 받아가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어적으로도 당시 국제어였던 그리스어 덕분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물론 복음 전파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 전역에서, 심지어는 고향 유대 땅에서 조차도 극심한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위축됨 없이, 오히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들불처럼 온 세상으로 번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원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세계가 복음화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견 이러한 사건들은 역사의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우연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작용하고 있는 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 곧 성령의 역사로 믿고 고백합니다. 

성령은 이처럼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세상과 역사 속에 친히 살아 숨 쉬며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힘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통하여 세상을, 역사를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지난 역사를 통해서 이루신 수많은 변화의 사건들이 있지만 그 정점은 아무래도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날의 역사적인 사건의 시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어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사도행전 2:1-4, 공동번역) 

물론 이러한 사도행전의 묘사는 아마도 사실 보다는 하나의 신학적인 진술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합니다.“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불길”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내려 오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또 성령강림 사건을 오순절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오순절은 해방절 다음 50일째의 축제로 첫 수확한 보리와 밀을 하나님께 드리는 봄 수확 감사제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로 구약의 하나님 출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날입니다. 

때문에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강림 사건은 이제 성령으로 인하여 구약의 하나님을 대신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더나가“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자기 말로 알아 듣고,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라는 증언은 교회의 보편성, 곧 새로 출현한 교회공동체는 피부색과 민족과 지역과 남녀노소, 심지어는 온갖 언어까지도 차별하지 않는 범세계적인 종교, 보편적인 종교라는 뜻이 내포되어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 활동의 정점으로서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날 처음으로 성령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성경은 이 세상의 창조, 예수 탄생의 예고, 예수의 세례, 교회의 시작 등 구원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성령의 활동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보자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기독교 신앙은 충분할 것 같은데 성경은 굳이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성령이란 실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도대체 성경은 왜 이처럼 구원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성령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나가 성령이 오셨다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 라는 질문도 해 봅니다. 이를 위해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란 인물은 어떤 훌륭한 역사적 위인, 예를 들어 공자나 석가나 장자와 같은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가, 혹은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연구하고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가 인류역사에 끼친 공을 탐구하는 일은 굳이 신앙이란 형식을 띠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 본질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지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실천이란 성경이란 책을 통해서 아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알되 그것을 받아 드릴 수 있을 때 실천이란 행동이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역사이심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른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그 사랑을 나의 삶 속에 반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인간의 단순한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은총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필요한 이유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예수를 바로 바라보게 하고,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고, 그 고백에 따른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성령의 은총을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희망을 무언가에 대한 기대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미래에 대한 단순한 기대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습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희망이야말로 인간 삶의 근원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일단 희망을 잃으면 생명은 사실상 끝장난 것이기 때문에 희망은 생명의 구조와 인간 정신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희망과 생명은 하나이기에 인생은 희망과 함께 그리고 희망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희망과 생명을 하나로 보는 에리히 프롬의 관점은 성서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하는데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의 본문인 로마서 8장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의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은 만물과 함께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들 곧 희망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하고 있는 고통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곧 인간에게 참된 자유와 희망을 주시려는 징조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이러한 희망을 성취하려면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한데 성령이 이를 도와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난의 실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구체적인 고난은 무엇입니까? 

물론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고난이란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고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 때문에 당하는 박해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들은 그때와는 다를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에 대한 믿음 그 자체 때문에 박해 받는 일은 몇몇 특정 지역을 제외하곤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한 일입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집안 어른으로부터 종교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바울 당시의 고난, 박해와는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당시와 비견할 수 있는 고난, 오늘의 고난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생활고 때문에, 부부관계 때문에, 고부간의 문제 때문에, 직업 때문에, 대학입시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도 많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세속적인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 사이에서의 갈등 때문에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바르게 살면 손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양심을 억누르며 사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바보가 되는 세상,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일 뿐이지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바른 삶인지를 알고 있지만 머리로써 뿐입니다. 이해는 하지만 몸은 그에 따르지를 않습니다. 이같이 야누스와 같은 두 얼굴을 하고 그 속에서 어느 것이 참된 나인지를 모르면서 사는 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이요, 거기서 생기는 갈등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같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인간에 의해서, 혹은 세속의 권세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종살이에서 해방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될 날이 조만간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나라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하나님의 질서가 존재하고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사회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보다 나은 생활을 원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 기대가 이루어져 생활의 아쉬움을 모르고 사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반대로 지금까지 전혀 그러한 희망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살기 어려워 졌다고 생각하면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의 마음 속에는 아마도 이 세상은 온통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어서 출구는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출구 없는 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항상 출구는 있기 마련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불가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활의 변화, 성장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간에게서 얻으려고 했지 하나님에게서 얻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까? 하나님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방법의 차이는 기브 앤 테이크식으로 하나님께 먼저 주고 또 받는 것이냐 아니면 통채로 받아 먹으려고만 하는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먼저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같이 우리도 먼저 하나님께 뭔가를 먼저 바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줄 생각은 안하고 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이루어질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말입니까?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정성입니다. 행동입니다. 실천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지 않고 그저 육신 편한 데로 살면서 하나님께 요구만 하는 것은 사실 간청이 아니라 강요요 위협인데 하나님이 이런 강요, 위협에 넘어 가실 분입니까? 아닙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뭔가 인간적으로는 아깝지만 바치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것이 우리의 고통인 것입니다. 이 고통을 극복 할 때 희망이 보이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이 희망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신앙은 부단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끝까지 부여잡고 지키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스탄트와 스피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음식 만드는 것이 귀찮아서 라면을, 그것도 끓이기 귀찮아서 물만 부으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빠르게, 편하게 우리를 목적지 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러니 기다림, 인내란 어쩌면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단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은 그리고 그 분께 거는 우리의 희망은, 인스탄트 식품처럼 거리에 널려 있지도 않고 또 빠르게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정한 희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인내함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이천년 전 다락방에 휘몰아쳤던 성령의 역사가 재현되기를 희망하며 성령강림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밖을 보면 우리가 꿈을 꾸게 되지만 안을 보면 깨어나게 되리라"는 말처럼 솔직한 자기 모습, 교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고 더나가 모든 것을 수용할 태세를 가지고 있는 빈 그릇처럼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비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비움과 의탁이 있을 때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도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들 안에서 역사 하도록 자신들을 온전히 성령께 의탁하였던 그 자세를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2000년 전의 성령 강림 사건은 모양과 방법은 다를지언정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재현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의 강림하심이 오늘 여러분들의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재현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