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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 (롬 8: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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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 (롬 8:22~27)

 
해마다 성령 강림 주일이 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문안교회에서 행한 선친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선친은 원로 목사로서 한 달에 한 번 새문안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1985년 성령 강림 주일에 사도행전 26장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바로 그 설교가 선친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할 기회를 얻은 사도 바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총독 베스도가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 말씀입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그 다음에 되어진 일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내용입니다. 선친은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그 옛날 사도 바울처럼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리의 신앙이 뜨거웠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핍박을 받았고 고향인 유대 땅에서도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 빨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세계가 복음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놀라운 복음의 확산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령이 역사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성령이 이룬 많은 변화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은 아무래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사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공동번역 행 2:1~4)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날 처음으로 성령이 역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천지 만물이 창조될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그리고 교회의 시작 등 중요한 순간마다 항상 성령의 역사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 성경은 굳이 성령의 역사를 말하고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결코 공자나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 중 한 사람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나 그분이 인류 역사에 끼치신 공을 탐구하는 것쯤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믿음의 실천이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믿음도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고 그 고백에 따른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령의 은총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란 단순한 기대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학자 에릭 프롬은 소망은 인간 삶의 근원이기 때문에 소망이 없으면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소망과 생명은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은 소망과 함께, 그리고 소망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말씀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소망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기 전에는 꿈이 없었습니다. 미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게 되면 놀랍게도 소망이 생깁니다. 꿈이 생기고 미래가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4절 하반절 말씀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이란 아직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들을 수도 없는 것이요 미래에 대한 복된 약속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미래가 보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위대한 비전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소망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고, 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끝까지 부여잡고 지키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스탄트 시대, 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음식 만드는 것이 귀찮아서 라면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것도 끓이기 귀찮아서 물만 부으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비행기가 빠르고 편하게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줍니다. 인내란 어찌 보면 오늘 현대인에게는 맞지 않는 단어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께 거는 우리의 소망은 인스탄트 식품처럼 빠르게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진정한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인내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박해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은 그 때와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은 몇몇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 별로 흔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집안 어른들로부터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쯤은 사도 바울 당시의 고난과는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 당시와 비교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고난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있습니다. 직업 때문에, 자녀 교육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세상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고난,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고난 속에서도 전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 대답이 바로 본문 말씀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나의 약함을 도울 뿐 아니라 내가 기도하지 못하고 쓰러질 때 나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못할지라도 안심해도 좋습니다. 성령은 나의 안에 거하며 나의 부족한 것, 나의 약한 것, 나의 믿음 없는 것까지 알고 나를 도우며 나의 발걸음을 인도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이천년 전 다락방에 휘몰아쳤던 성령의 역사가 재현되기를 바라며 성령 강림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 제자들과 함께 모인 무리들이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이 강림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하도록 자신들을 온전히 맡겼던 것처럼 우리가 믿고 맡길 것 같으면 오늘 우리도 충만한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늘 보다 나은 삶을 소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아쉬움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혀 그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어려워져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 세상이 온통 벽으로 막혀 있고 출구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출구가 없는 방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나 하면 인간에게는 불가능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결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 말씀입니다.
"...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습니까? 앞이 캄캄한 것 같습니까? 그래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간직한 채 닥치는 모든 고난을 끝까지 참고 이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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