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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전 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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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전 5:12~28)
 
 
데살로니가 교회는 매우 어린 교회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는 영적 질서조차 불분명했습니다. 발신자들은 올망졸망 어린 신자들로만 구성된 그들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룩하게”하시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했습니다(23). 그래서 그들이 성숙한 교회로 자라갈 수 있도록 많고도 구체적인 권면들을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가 세상과 온전히 구별되어 흠 없게 보전되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교회의 리더십과 관련된 자세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 헬라어 단어 “알고”는 ‘가치를 알아채는 것’을, “가장 귀히 여기며”는 ‘엄청나게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어 선택이 상당히 충격적이면서 강한 거부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자극적입니다. 목회자인 저로서는 싫을 것 하나 없는 말씀인데도 설교하기에 대단히 부담됩니다. “수고하고 … 다스리며 권하는 자”로서의 성품과 능력과 삶이 존중받을 만하지 못함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모든 권세를 쥐고 왕 노릇하는 ‘교권주의’와 부패한 목회자로 인해 목회 직분 자체에 대해 혐오하는 ‘반교권주의’는 교회사에 교대로 나타났었습니다. 또, 목회자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가 공존하는 교회는 항상 성도 간에 반목과 분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로서는 이 말씀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악용될 위험이 있음을 알아채고 엄청나게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교인의 화목을 생각하면서 권위를 부리기보다 잘 섬겨야겠지요(마 20:26-27). 반면 성도로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부족한 지도자일지라도 기꺼이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문장 끝의 “너희끼리 화목하라”는 말씀은 지도자의 권위가 인정될 때 교회의 화목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입니다.

지도자의 권위적인 횡포나 교권주의에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은 ‘존중할 만해야 존중하지’라는 반발심부터 가지기 쉽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만들 수 있지요. 하지만 존중할만한 자를 존중하는 것은 신앙이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다만 “저희 역사” 곧, 저희의 하는 일로 말미암아, 목회 평가를 해서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존경하라 했습니다. 교회가 온전히 거룩하고 흠 없이 보전되려면 우리 주님의 말씀이 지극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항상 말씀 맡은 자를 대단히 존중하도록 가르칩니다(딤전 5:17; 히 13:17). 이러한 가르침들은 하나님 말씀의 최종권위를 존중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만 순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윤리적 가르침과는 구별됩니다.

다음으로 14-15절은 교회의 다른 지체들 돌아보는 삶과 관련된 세 가지 권면입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는 잘못된 재림 신앙으로 말미암아 일하지 않고 다른 이의 신세만 지는 사람, 믿음이 부족하여 사별한 후 과도히 슬퍼하는 마음이 약한 사람, 음란한 사회 풍조를 극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방치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교회는 ‘한 몸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른 지체들의 적절한 훈계와 격려와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이 같은 관심이 있을 때 실제로 한 몸의 지체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으로서 다른 부족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섬겨서 변화가 있으면 의욕이 생기겠지만, 세월이 가도 변화가 없으면 소망 두기가 쉽지 않지요. 섬김을 악용할 때는 악으로 갚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했고,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라고 명령합니다(표준새번역). 언제까지 참아야 오래 참는 것일까요? 문맥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반면 인간은 본성상 조급한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오래 참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자 참지 못하고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조급증은 강화되었습니다. 인터넷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답답해서 마우스를 계속 클릭하다가 고장을 내기도 합니다. 연인과 부부가 서로 오래 참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를 오래 참지 못합니다. 목회자와 성도조차 서로를 오래 참지 못합니다. 기도의 응답 역시 오래 참지 못합니다. 조급함은 말세의 특징입니다(딤후 3:4).

교회가 타락한 시대를 거슬러 살면서 “온전히 거룩하게”되고 “흠 없게 보전”되는 일은 한 두해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잘 드러내는 교회로 성숙하는 일도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아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했습니다. 잠언 말씀에는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했습니다(잠 25:15). 오래 참음은 문제아조차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참는 사랑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내었습니다.

‘1도 차이’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이 수증기가 되려면 100도까지 끓여야 하는데, 99도까지는 여전히 물이지만 100도가 되는 순간 수증기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행여나 마지막 1도를 참지 못하여 그동안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오래 참기를 격려하는 글이었습니다. 대나무 씨를 뿌리면 4년 동안은 싹도 나지 않다가 5년 되는 해에 갑자기 25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는 4년의 기간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오래 참는 일에 많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낙심하고 피곤해 질 때도 많습니다. 가슴이 아리는 실패 속에서 다시 저를 부르시고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 분을 통해 오래 참음을 통한 기적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16-18절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면서 성도의 오래 참는 삶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지속되는 고난의 의미를 잘 모를 때, 낙심이 되고 참기 힘들지요. 그런 때는 성경이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명하신 이 세 가지 일들을 성실히 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부의 핍박과 리더십의 불분명함으로 인한 내부의 불화가 있었습니다. 상황만 보면 기뻐하고 감사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은 성도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것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픔과 슬픔을 당할지라도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 다른 모든 이가 헛된 것을 예배할 때 참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의로운 자로 서게 될 것 등을 생각할 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망쳐버린 일과 인간관계라 할지라도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탄식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롬 8:28).

기쁨과 감사 사이에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이 명령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오래 참으며 인내도록 만드는 유일한 버팀목입니다. 이 말씀이 24시간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라는 뜻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물론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기도 생활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매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며 묵상할 때, 아무리 큰 아픔과 슬픔도 성도의 삶에서 기쁨과 감사를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조차 감사제목으로 바꿔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9-22절은 공예배와 관련된 권면들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성령님께서는 바울 일행이 ‘말’로 전한 복음을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이제는 바울 일행이 보낸 서신이 공예배 때 읽혀지는 동안(27), 성령님께서는 ‘글’로 전한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명령과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명령이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예언은 구약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교훈을 해석하여 통찰력 있게 가르치는 은사를 뜻하거나 이 서신 서에 포함된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을 뜻합니다.

“범사에 헤아려”는 직역하면 ‘모든 것들을 시험하라’입니다. 기록된 말씀으로 성도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등 모든 것들을 시험해서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이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의 문맥에서 자연스럽습니다. 앞부분에서 전혀 언급한 바 없는 장래 일을 알아맞히는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지요. 합리주의자나 신비주의자는 기록된 말씀을 멸시함으로써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을 소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유아스럽게 생각하고 성경을 초월해야 이성적이거나 신령한 것처럼 왜곡합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이러한 악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된 것은 종말의 교회가 온전히 거룩하고 흠 없이 보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일을 성취하실 것입니다(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는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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