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롬 8:26~27)

  • 잡초 잡초
  • 1195
  • 0

첨부 1


. 들어가는 말: Leslie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년 전, 미국 위스컨신(Wisconsin)주의 밀워키(Milwaukee) 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연세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은퇴하신 은준관 박사께서 들려준 실화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밀워키 시립병원 입구에 생후 6개월 정도로 보이는 유아 하나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에, 뇌성 소아마비까지 겹친 비참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이 불운한 생명을 버렸던 것 같습니다.  

몹시 당황한 병원 당국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얼마 전에 은퇴한 May Lemke라는 간호사에게 죽어 가는 어린 생명을 위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장은 즉시 May 부인에게 전화를 걸고 죽어 가는 어린 생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당시 52세의 은퇴 간호사로 진실한 신앙인이었던 May 부인은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그 아이를 돌보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죽어 가는 어린 아기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생명을 보는 순간, 그녀는 너무도 비참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어린 생명의 비극 앞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우유를 주어도 빨아먹을 수 있는 반사 본능마저 없는 이 불쌍한 생명을 두고, May 부인은 아이의 팔과 다리와 온 몸을 만져주는 맛사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생명의 소생을 위한 May 부인의 초인적인 노력과 헌신은 매일 매일 계속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Leslie라는 이름을 붙인 이 어린 식물인간은 몇 년 동안 단 한 번의 움직임도, 말 한마디도, 웃음이나 눈물조차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 May 부인은 눈물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져 흐르는 자신의 뺨에 Leslie의 손을 가져다 대고 기도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Leslie를 찾은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아이를 위해 제가 선택된 것이 아니었나요? 이 선택 뒤에 숨은 이유를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 그 증거를 언제 보여 주실 것입니까? 저는 지금 지쳐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오랜 기간의 고통의 세월인지라 기도라기보다는 항의 어린 독백을 하였던 May 부인!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Leslie를 껴안고 걸음마 연습에, 온갖 재활요법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계속하기를 3년, 5년, 10년, 15년 그리고 마침내 18년간! 그러니까 Leslie가 18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옆에서 거들고 도와주던 남편과 주변의 친구와 친척들 모두가 일제히, “이제는 Leslie를 포기하라”고 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May 부인의 나이는 이미 70세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May 부인! 그러나 자기만은 Leslie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또 다시 이렇게 절규하듯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 성경은 수많은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어찌하여 이 아이를 이토록 오랫동안 버리십니까? 기적을 주소서. 이 아이가 육체적, 정신적 감옥을 깨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 주옵소서”
너무나 힘들고, 지친 가운데 한 이 기도는 사실 그녀가 하나님 앞에 보내는 마지막 통보 같은 울부짖음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갑자기 Leslie의 엄지손가락이 소포의 끈을 푸는 것처럼, 침대 옆에 있는 기타 줄을 퉁겼습니다. 18년만의 최초의 움직임! 그 순간 May 부인의 머리에는 “음악이다. 음악이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스쳐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May 부인은 Leslie 방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전축과 라디오를 번갈아 큰 소리로 틀어, 방안을 온통 음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Leslie의 손을 끌어 당겨 피아노 연습을 유도했으나, 그것은 잠시 일 뿐! Leslie는 또 다시 응답 없는 옛 식물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난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정확하게 1971년 추운 한 겨울 어느 날! 믿을 수도, 있을 수도 없는 기적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새벽 3시,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May 부인은 잠을 깨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새벽에 피아노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바로 Leslie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May 부인과 그녀의 남편은 떨리는 가슴으로 Leslie의 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미소를 머금은 Leslie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었습니다. 18년의 식물인간이 벌떡 일어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이 기적! 이 기적을 보는 순간, May 부인은 감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만은 Leslie를 잊지 않으셨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기적의 순간부터 Leslie는 눈물과 말로 생명의 표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목청이 어찌나 큰지, 그의 노래 소리는 그 동네 멀리까지 울려 나갔습니다. 미국 전역에 이 일이 알려지면서 Leslie는 TV 방송에서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제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신 은준관 박사님도 미국에 있을 때 Leslie의 피아노 연주를 TV에서 한번 지켜 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부터 정확히 38년 전에 일어난 한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이 때 Leslie의 기사를 쓴 기자는 이것을 “인간 승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May 부인의 사랑과 헌신이 낳은 기적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물론 이 실화는 May 부인이라는 한 인간이 만들어 낸 사랑과 헌신의 승리 이야기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로부터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것은 “과연 이 기적을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May 부인의 사랑과 헌신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결론에서 내리고자 합니다.      

II. 몸 말     

1. 기도하지 않는 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May 부인처럼 우리들의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생명력은 바로 기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혼의 대면이며, 호흡이며,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혼의 대면이며, 대화인 이 중요한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마땅히 기도해야 할 때 빌지 아니하고, 또 기도한다 해도 바르게 간구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오늘 본문의 “마땅히 빌 바”라는 말씀 속에는, 기도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대 전제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질병이 감기에서 시작되듯이, 모든 신앙의 문제는 기도의 부재에서 시작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기도가 고장이 나면, 우리의 영혼에 악마의 바이러스가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결국 병들게 마련입니다. 감기가 발전해서 폐렴이 되고, 폐렴이 발전해서 폐암까지 가게 되듯이, 우리 기도의 부재에서 영적인 침체가 오고, 결국에는 영적인 패배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먼저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기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고민하여 기도하시며,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계셨는데, 그들은 육신이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그렇게도 간곡히 부탁하셨건만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피곤하여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잠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0-41)
여러분, 제자들의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렇게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마땅히 해야 할 영혼의 호흡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2) 정욕으로 잘못 구함
그런가 하면 우리는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모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 체 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경우에도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정욕으로 잘못 구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기보다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기도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마태 20장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청탁을 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가시면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높은 왕좌에 오르실 것인데, 그 때 자신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마 20:22).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구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렇게 요한과 야고보처럼 주님의 뜻을 잘 모르고,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기도하기 쉬운 연약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르고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볼 때에는 당장에는 좋은 길인 것 같고, 당장 화를 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나중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기도를 우리의 욕심을 따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6:24). 이렇듯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 체, 우리의 정욕과 욕심에 의해서 잘못 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3) 기도 응답의 지연
그런가 하면 우리는 기도할 때, 그 응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빨리 응답되지 않고, 지연될 때 많이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아까 May 부인처럼 탄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하나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이렇게 탄식하다가 마침내는 지쳐서 우리의 기도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는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부모님들과 형제들을 위하여 안타깝게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지금 거의 40년을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 되는 분은 아직도 완강합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지금 거의 포기 상태에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눈물도 메말라 버렸습니다. 지금 그 분은 이제는 어떻게 구해야 할지조차 몰라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눈물로 호소하고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은 들려오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더욱 더 멀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 높여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더 깊은 공허감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정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기도의 한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우리가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오랜 동안 기도해도 그 응답이 더디고,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고, 직장문제를 위하여 기도하고, 자녀들을 위하여, 학업과 진로문제를 위하여, 배우자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기도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답답함이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우리는 깊은 좌절과 실망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기도의 한계성을 느끼면서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좌절감으로 인하여 탄식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기도의 한계와 좌절을 가리켜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좌절감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들을 가리켜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잃어버린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 인간들이 드리는 모든 기도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육신이 연약하여서 마땅히 해야 할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정욕대로 잘못 구할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기도함에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탄식하며, 더 이상 어떻게 빌어야 할 지를 몰라, 결국 기도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경험하는 우리 기도의 한계와 좌절입니다. 

3. 성령님의 탄식의 기도

그런데, 그런데, 바로 이 기도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탄식하는 바로 그 곳에, 바로 그 자리에 오히려 참된 기도의 가능성이 있다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바울은 그 기도의 가능성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마땅히 기도할 바를 잃어버린 우리들이, 다시 한 번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유창한 언어도 아니요, 우리의 간절함도 아니요, 바로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연약함 가운데 있고, 기도한다 해도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잘못 구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먼저 안타깝게 기도하시기에, 우리는 비로소 참되게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들을 돕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여기서 “보혜사”라는 말은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즉 성령님은 쉽게  말하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돕는다”라는 단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경우에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즉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곁에 와서 그 짐을 같이 들어주고 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끝이다. 이제는 절망이다. 이제는 더 이상 길이 없다”라고 탄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와 함께 그 짐을 져주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도우시되, 특별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므로 우리를 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이 말씀은, 우리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며,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그래서 이제는 기도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이제는 마땅히 빌 바조차 모르게 되었을 때, 성령님께서 “그래 얼마나 무겁니?” 하면서 우리의 짐을 함께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모습과, 절망 가운데서 죽음을 택하는 모습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조차, 때로는 죄 가운데 빠져서 비틀거리고, 방황하고, 절망하고 탄식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그래서 기도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면서, 탄식하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렇다면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기도생활을 한번 돌이켜 볼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기도생활을 보시면 기뻐하시고 계실까요, 아니면 탄식하시고 계실까요? 솔직히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보시면 가슴을 치시고 탄식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마음에도 없는 기도, 형식적으로 겨우 중언부언하는 우리의 기도를 보실 때마다 성령님께서 탄식하시지 않을까요? 우리의 죄는 숨겨놓은 채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탄식하시지 않을까요? 우리 육신의 피곤과 여러 가지 일들을 핑계 삼아 가장 중요한 영혼의 호흡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기도를 무시하며 생활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 성령님께서는 탄식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또 때로는 잘못 구하고 있어도,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없이 탄식하시며, 기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도 않고, 또 기도하되 잘못 구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지시고 계십니다. 또 때로는 기도할 힘조차 없어 마땅히 빌 바조차 포기한 체 앉아 있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그 연약함을 아예 대신 짊어지시고, 오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정말 성령님의 이 탄식의 기도가 없으면,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아도,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간구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말씀인지요. 오늘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아멘!
우리들이 우리의 마땅히 빌 바를 모른 채 우왕좌왕할 때, 또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따라 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솔직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들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기도한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욕심을 따라 한 기도를 응답해 주셨더라면, 아마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가운데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말씀이 생각나십니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4).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그 길이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구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ruce Almighty 영화 이야기: 언젠가 제 친구목사가 제게 꼭 봐야 될 영화가 있다고 해서 본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Bruce Almighty라는 것이었습니다. Bruce는 사람이름이고, almighty는 전능한 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Bruce라는 사람은 TV 방송국에서 일하는 reporter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늘 방송국에서 무시를 당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맡아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평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8시 뉴스와 9시 뉴스의 앵커도 할 수 있는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은 늘 지방에 내려가 작은 사건들을 취재하는 그런 일들”이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일 때문에 직장 상사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는 홧김에 사표를 내고 직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홧김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지만, 막상 그에게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제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정말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데, 하루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 친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가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 맞습니까? 어떻게 제게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도 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이 녀석아 너는 왜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으냐? 나도 너 같은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나도 너 같은 녀석 때문에 피곤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나의 전능한 힘을 일주일 동안 줄 테니까, 네가 나 대신 7일 동안 하나님 역할을 좀 해라. 나는 네 덕분에 휴가를 좀 다녀와야겠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휴가를 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서서 가시는데, 물위를 걸어가셨습니다. 그 때 Bruce는 자신도 물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발이 물속에 빠지지 않자, 그는 신이 나서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몇 일 동안 정말 모든 것이 자기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다 되었습니다. 그는 신이 났습니다. 그가 길가를 걸어가다가 소화전을 보고 “소화전아 터져라”라고 외치니까 물이 솟아나옵니다. 

그리고 건너편 길에 예쁜 아가씨가 치마를 입고 오는데, 그쪽을 향해 “바람아 불어라”고 외치자 여인의 치마가 바람에 올라갑니다. 이렇게 그는 몇일 동안 신이나사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몇일이 지나서 하루는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바로 전 세계의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이 동시에 기도를 하니, 도무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인들의 모든 기도가 인터넷 이 메일로 올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교인들의 기도가 밤새도록 이 메일로 오는데, 도저히 다 읽고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꾀를 부리는데, 그것은 모든 기도에 “All" 그리고 “Yes"라고 응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제는 됐구나“ 하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도시에 폭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불을 지르고, 차를 뒤엎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남자가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것은 사기다” 그래서 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로또 복권을 샀는데, 그것이 일등으로 당첨이 되었소. 그런데 일등 당첨금이 단돈 17$밖에 안 되오. 그러니 이것은 사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Bruce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난  밤에 사람들의 모든 기도에 “Yes"라고 응답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로또를 사면서 ”하나님, 일등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한 기도가 다 응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로또를 산 사람들은 다 일등 당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난리가 난 것입니다. 

저는 영화의 이 장면을 보다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만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욕심을 따라 했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셨더라면, 나는 벌써 멸망의 길로 갔겠구나”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그 동안 우리들이 해 온 욕망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더라면, 아마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들 가운데는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잠언 기자의 말대로 벌써 멸망의 길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떻게 이 은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 녀석이 자기 죽을 줄도 모르고, 저렇게 욕심을 따라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 저 녀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 아니지요. 바로 저것이지요.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소서”
성령님께서 지금도 이렇게 우리들을 위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고 계시기에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III. 나가는 말

이제 아까 설교 초두에 말씀드렸던 38년 전의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오늘 설교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식물인간 Leslie를, 인간적으로는 완전한 불가능이었던 한 인간을 구원해 낸, 이 기적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이 기적의 주인공은 May 부인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 사건을 보고, 기자들은 그 기적의 역사가 May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맺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었습니다. 비록 May 부인의 헌신과 사랑은 초인간적이었으나, 그렇다고 그 기적은 May 부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분은, May 부인의 헌신 훨씬 이전부터, 기도할 수조차 없던 Leslie의 불쌍한 영혼과 삶속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Leslie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던 성령님, 바로 그 성령님께서 이 기적을 만들어내신 분이십니다. 다만 여기서 May 부인은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소중한 하나님의 도구요, 하나님의 증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잃어버린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기도소리를 먼저 들으십시다. 우리의 정욕과 욕심으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무릎 꿇어 성령님의 기도소리를 들으십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되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오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함께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역사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다. 육신이 지쳐 기도하기가 어렵습니까? 구하되 잘못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여 탄식하고 있습니까? 너무나도 큰 시련에 억눌려 어떻게 기도해야 될 지를 몰라 한숨짓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조용히 무릎 꿇어 내가 아파할 때 나보다 더 아파하시고, 내가 탄식할 때 나보다 더 탄식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의 탄식소리를 들으십시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의 그 연약함, 나의 그 문제로 인하여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우리의 기도를 다시 회복하십시다.  

여러분 가운데서 기도하기를 포기하려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바로 당신을)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찬송을 함께 부른다)

(기도초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바로 그 문제로 인하여 이 순간에도 탄식하시고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용기를 얻어, 우리의 기도를 회복하십시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기도의 무릎을 꿇어 기도하십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 가정을 위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우리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경제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놓여 있는 이 나라를 위하여, 전(前)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국민을 대표하도록 선택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과 정치지도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 독재자의 학정 하에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저 이북의 동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읍시다. 성령님을 힘입어 드리는 우리의 기도야말로 우리가 이웃과 교회와 이 민족을 섬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불가능의 상징이었던 Leslie에게 역사하신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속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있는 이 민족 위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