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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화목을 이룬 가정 (엡 2: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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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을 이룬 가정 (엡 2:14~19)
  
 
이상적인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의 가정입니다. 본문 말씀 19절에 우리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가정에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133:3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하였습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오늘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가정의 요체(要諦)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은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처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면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시 84:3). 

1. 화목의 신비(神秘)

가정은 온 가족이 화목해질 때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도 가족끼리 불화가 계속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구조적으로 다른 사람과 화목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1)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고 그 사이에서 나는 자녀와 형제가 연결되어 가족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모두가 다 혈통으로 연결된 가족 공동체가 되지만 사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정을 남자와 여자라는 다른 개체가 연합해서 둘이 한 몸을 이룬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창 2:24). 이것은 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고 하였습니다(엡 5:31-32). 아무리 가까운 혈육관계라 하더라도 각각 다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마음을 같이 하고 화목을 이룬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2)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 가운데 자기와 생각이 같고, 가치관이 같은 사람끼리만 만난다고 하면 결국 자기 혼자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나 가족이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사람마다 성장 배경이나 문화적인 환경에 따라서 여러 가지 유형의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을 같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서
우리나라에도 점차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언어와 습관,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끼리 같은 마음을 가지고 화목을 이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부부간에 갈등과 가족 간에 불화로 인하여 이혼을 하거나 결손가정이 생기게 되는 것도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3)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또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이 되었을 경우 어떤 형태로든지 이를 극복하며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마음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32). 그렇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일 경우,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이를 극복하고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권속)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3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2. 화목의 요건

사도 바울은 부부의 신비를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엡 5:22-33). 거기서 오는 행복의 비결도 교과서적인 이론이나 과학적인 설명이 안 되는 신비적 요소가 있습니다.

1) 사랑하는 것입니다.

화목의 기본적인 요소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관계라면 아무리 화목을 도모하려 하여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나 또는 억지로 강요해서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 자식과 형제자매의 관계로 맺어진 가정은 우선 보기에 혈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 같으나 그보다는 거짓 없는 사랑이 작용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곤 합니다. 가족 간에도 조건을 제시하는 사랑이라면 이상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αγαπη)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보다도, 이적을 행하는 신비로운 역사보다도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고전 13:1-2).

2)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화목은 가족끼리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나는 지식이 있어서 많은 것을 알고, 또 사리에 밝아서 경우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해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볼 때 가능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정당하고 옳은 일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이 저와 같이 생각하지 않거나 다른 길을 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때 화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23-24).

3) 섬기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서로 섬기는 삶을 지향합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 남존여비(男尊女卑) 또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이 통용되었는데, 이는 이교 사상에서 온 잘못된 관습입니다.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거나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5:22-33에 나오는 부부의 도리는 서로 섬기는 개념입니다. 아내를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가정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며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아끼라고 한 것도 사랑으로 서로 섬기게 한 것입니다(갈 5:13). 부부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사이에, 또는 형제나 가족 모두가 서로 짐을 나누어지며 다른 가족을 위해서 몸으로 수고하며 섬길 때, 가족 간에 화목이 이루어지고 행복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화목케 하시는 예수님

인간의 집단은 어디에도 화목을 이루지 못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하고 또 자기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겉으로는 화합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분쟁과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에는 화목이 있습니다.

1) 본질이 평화입니다.

본문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 6:25-26).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기록하면서 성도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1:2).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평화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됩니다.

2) 역할이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27). 본문 말씀 16절에도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Cross)는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지점입니다. 곧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며 화목케 하는 원리를 뜻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예수님을 노래하면서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눅 1:79).

3) 결과는 완전한 평화를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미가 4:3에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디에나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는 다툼과 분쟁이 있고, 죽음과 공포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사랑과 평화가 자리잡게 됩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무덤 사이로 헤집고 다니던 군대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맑은 정신으로 평정을 찾았습니다(눅 8:35). 갈등과 대립으로 반목하던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사랑과 평화의 천국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의 평강이 가정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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