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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존중하라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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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존중하라 (창 2:18~25) 
 
 
❚존중이 사라진 틈

미국의 인기 작가이기도 한 찰리 쉐드 목사님은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부부들의 행동에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해보았습니다. 쉐드 목사님이 가장 눈여겨본 것은 부부들이 차에 타는 모습이었습니다. 우선 결혼을 앞둔 남자들은 여자 친구가 차에 탈 때 자기가 손수 문을 열어주고 여자 친구가 완전히 차에 오르고 난 후에야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고 천천히 운전석에 타는 것이었습니다. 열 명을 살펴보면 열 명 모두가 그런 매너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커플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아내가 먼저 차에 오르도록 문을 열어주는 남편은 열 명 중 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차에 오르고 아내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왜 빨리 타지 않느냐고 고함을 치는 남편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결혼 전에는 상당히 매너 있게 행동하던 남자들도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기혼 남성들의 습관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남 얘기 같지 않지요? 여러분 중에도 이런 분이 꽤 많을 것입니다. 물론 결혼 전에도 차 문 열어주는 일 따위는 상상도 안 하고 산 간 큰 남자분도 많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 전과 결혼 후 내 행동이나 태도에서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법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배우자에 대한 존중(尊重)의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결혼 전에는 아주 컸는데 결혼 후에는 점점 적어지거나 아예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요? 결혼 전에는 어떻게든 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잘 보여야지요. 게다가 저 사람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하고 결혼해주니 고맙기도 했고요. 그래서 귀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상황이 싹 달라집니다. 이미 결혼했으니 저 사람은 내 거지요. 당연히 내 마누라요 내 남편입니다. 

후회한들 지가 어떻게 하겠어요?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지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가정의 틈이 생깁니다. 배우자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기 시작하면서 부부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집니다. 어디 부부뿐이겠습니까? 자녀를 존중하지 않고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데서 우리 가정에 틈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을 파괴하기 원하는 마귀가 바로 이 틈을 이용해서 가정에 금이 가게하고 부부 사이가 무너지고 부모와 자녀 사이가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틈, 가정에서 서로를 존중해주지 않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틈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부 존중

첫 번째로 부부 사이의 존중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하네요.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미국 코넬 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가 남녀 간의 애정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알아보기 위해 2년에 걸쳐 남녀 5천명을 대상으로 연구해보니 남녀 간에 가슴 뛰는 사랑은 18~30개월이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남녀가 처음 만나면 대뇌에서 ‘도파민’이라고 부르는 화학물질이 분비되는데 이 도파민 때문에 서로 얼굴만 봐도 가슴이 뛰고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가 만난 지 2년 정도가 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이 도파민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사라지기 때문에 부부가 결혼한 지 2년 정도만 지나면 서로 더 이상 가슴 뛰는 일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론대로 결혼한 지 2년만 지나면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난다고 한다면, 그러면 도대체 부부가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이런 말씀을 하셨나 봅니다. “정으로 사나 뭐? 그냥 사는 거지.” 심지어 이런 말씀도 합니다. “그냥 애들 보고 사는 거야.” “못 헤어져서 사는 거지 뭐.” 부부 간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니까 애정이 아니라 그냥 습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허술한 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말씀에 나온 것처럼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부부도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2년 정도의 애정의 유효기간이 끝나면 그냥 못 헤어져서 살고 애들 봐서 살도록 그렇게 허술하게 만드셨겠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부부가 서로 바라만 봐도 가슴 뛰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는 식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셨습니다. 

이 안전장치가 바로 오늘 설교의 주제인 ‘존중’(尊重)이요 ‘존귀’(尊貴)입니다.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기고 배우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존중도 존귀도 넓게 보면 다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사랑이라는 것이 꼭 얼굴만 봐도 가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자꾸 생각나서 잠이 안 오는 그런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냄비가 확 끓어오르다가 금세 식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충동적이고 자극적인 냄비 사랑만 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아주 은근하게 오래 가는 뚝배기 같은 사랑을 만들어 부부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존중이요 존귀입니다. 따라서 부부는 평생 동안 살면서 이 존중과 존귀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부부 사이의 존중과 존귀에서 실패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처음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리고 오셨을 때 아담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한 눈에 반합니다. 요즘 애들 말로 하면 한 눈에 뿅 간 겁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충동적 사랑, 자극적 사랑, 냄비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사랑에 빠지면 증상이 어떻다고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애쓴다고 했지요? 안 해봤으면 말을 마세요. 그래서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아담이 하와를 향해 뭐라고 사랑 고백을 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얼마나 멋진 사랑고백입니까? 

제가 갓 결혼한 신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왜 핸드폰에 전화번호 입력시키면 전화 올 때 이름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새신랑 전화에 찍힌 이름이 ‘내 갈비뼈’에요. 그래서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내 갈비뼈가 누군데?” “목사님이 그것도 모르십니까? 제 아내지요.” 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핸드폰에 아내 이름은 ‘이혜진’으로 저장되어 있는데 얘는 ‘내 갈비뼈’라네요. 여러분 핸드폰에는 뭐라고 저장되어 있습니까? 혹시 ‘마누라’로 되어 있거나 아예 저장도 안 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아무튼 이 아담의 고백은 참 황홀하고 아름다운 사랑고백이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당신이 내 갈비뼈에서 나왔고 나와 뼈와 살이 같다는 뜻입니다. 24절에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내 신체구조가 당신의 신체구조와 같고, 내 정신구조가 당신의 정신구조와 같고, 내 사고방식과 삶의 목적이 당신과 같아서 우리 부부는 완전한 하나라는 뜻입니다. 정말 심오하고 멋진 사랑고백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멋진 사랑고백을 한 가정이 실패합니까? 왜 하나님이 만드신 첫 부부가 실패합니까? 죄를 짓고 난 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책망하자 아담은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당신이 내게 너무 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당신 없이는 내가 없고 내가 없이는 당신도 없다는 뜻입니다. 부부 간에 완전한 존중과 존귀로 하나 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니까 어떻게 반응합니까? 서로를 탓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서로에게 귀하고 소중하던 존재가 순식간에 책임전가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 부부는 서로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은 있었지만, 가슴 뛰는 뜨거운 사랑은 있었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사랑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보배

오늘날에도 수많은 부부가 이 아담 하와 부부 같은 실수를 합니다. 결혼 전에는, 또 신혼 초에는 이 두근거리는 사랑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2년 정도 지나면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식지요. 그 때까지 두 사람은 무얼 배워야 하느냐? 서로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기간에 존중과 존귀를 못 배우면 평생을 같이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서로 원망하고 비난하게 되고 그 때문에 부부 간에 서로 불신이 생기고 거리가 멀어집니다. 사랑은 다 식고 그냥 같이 산다, 애들 생각해서 못 헤어져 그냥 사는 불행한 가정이 되고 맙니다. 

서로의 존중과 존귀가 사라진 틈이 불신감과 실망으로 깊은 상처가 됩니다. 여러분, 부부는 서로에게 잘 해주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참 각별하게 잘 해줍니다. 남들이 봐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사모님을 위하고 존중해 줍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렇게 묻는다네요.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어떻게 그렇게 잘 해주세요?” 그러면 이 목사님은 꼭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그럼 부인에게 잘 해주는 것이 당연하지 못 해주는 것이 당연합니까?” 맞습니다. 부부는 잘 해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부인에게 남편에게 잘 해주고 존중해주는 분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이 시간 좀 연세가 있는 부부들 잘 들으세요. 특히 우리 경상도 남자 분들 잘 들으세요. 부부는 존중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 쪽이 무시하면 반드시 다른 한 쪽도 무시하게 마련입니다. 제가 그런 말 가끔 하지요? “젊어서 부인에게 함부로 하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합니다.” 이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젊어서 남편이 부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면 반드시 나중에 부인도 남편을 그렇게 대할 날이 옵니다. 그런 날이 올까봐 무서워서가 아니라 정말 우리 남편들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들도 좀 오래 살면 남편을 우습게보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나이 먹고 돈 잘 못 벌어오면 남편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남편은 영원히 남편입니다. 아내는 영원히 아내입니다. 부부는 영원히 ‘여보 당신’입니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부부가 왜 서로를 ‘여보,’ ‘당신’으로 부르는가? ‘여보’라는 말은 ‘같을 여’자와 ‘보배 보’자를 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보’는 ‘보배와 같이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란 뜻이라는 것이지요. 또 ‘당신’은 ‘마땅할 당’ 자와 ‘몸 신’자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당연히 내 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과도 뜻이 같습니다. 배우자는 바로 나 자신이요, 내 몸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입으로만 ‘여보, 당신’ 하고 부를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를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에게 아내만큼 소중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내에게 남편만큼 귀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에는 어리석게도 자기 배우자보다 다른 사람, 다른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부모, 자식이 정말 소중하긴 해도 자기 배우자만큼 소중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 이 말 들으니 좀 섭섭하십니까? 하지만 내가 부모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편이요 아내임을 기억하십시오. 또 황금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내 배우자만큼 귀하겠습니까? 직업과 사업, 친구가 소중하지만 남편, 아내만큼 귀중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라도 이렇게 해보십시오. 우선 여러분의 핸드폰에 저장된 아내 이름을 “내 갈비뼈”로 고치십시오. 닭살 돋습니까? 그러면 남편은 뭐라고 고쳐야 하나요? “내 머리?” “내 자기?” 알아서 고치십시오. 그리고 말로만이 아니라 오늘부터 정말 내 아내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고 그렇게 소중하게 대하십시오. 특히 기쁠 때, 잘 나갈 때. 행복할 때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괴롭고 지칠 때일수록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묻는 대신 아가서에 나온 표현처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고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부부가 손을 맞잡고 함께 나가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싸우던 중, 아내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기 싫으니까, 나가!” 요즘은 아내가 남편에게 나가라고 하는 모양이지요? 하는 수 없이 남편은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이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다시 고함칩니다. “나가라는데 왜 왔어?” 남편이 거북이 목을 하고 서서 모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귀중품을 빠뜨리고 가서 그것 가지러왔어.” “알았어. 빨리 갖고 나가!” 그 때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귀중품이 뭐겠어? 당신이야. 같이 가.” 그 한마디에 아내가 감동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마주보며 활짝 웃었고 부부 싸움도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다음날부터 오래도록 식탁의 반찬이 달라지고 아내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여러분도 부부 싸움 할 때 이 수법을 써먹기 바랍니다. 그런데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이 수법은 두 번 이상 써먹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써먹으면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자녀 존중

두 번째는 자녀 존중입니다. 좀 간단하게 말씀 드리지요. 에베소서 6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용돈을 많이 안 줘서? 과외를 제대로 안 시켜줘서?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를 인격체로 존중해주지 않고 부모 뜻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자녀를 존중(尊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을 때 자녀는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부모님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우리 애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데요? 애한테 얼마나 잘 해주는데, 얼마나 투자를 하고 얘 때문에 돈을 많이 쓰는데 그런데도 우리 애가 화를 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배가 불러서요? 아닙니다. 부모님들 잘 들으세요. 사실 저부터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녀의 진로나 학교, 장래는 존중하나(귀하게 여기나) 정작 자녀 자신은 존중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녀들은 자기 자신이 존중 받을 때 기뻐하고 힘을 냅니다. 공부를 남들보다 좀 못 해도, 학교를 남들보다 좀 좋은 데 못 가도 그래도 부모가 자기를 믿어주고 후원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힘을 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반드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녀가 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럴 날이 옵니다. 부모가 조바심이 나서, 마음이 급해서, 지금 당장 투자하는 만큼 결과가 안 나오는 것 같아서 안달하고 아이를 닦달할 때 아이는 불안해지고 화가 나게 됩니다. 

사실 이 말은 제가 제일 먼저 들어야 합니다. 제가 제 자녀들을 이렇게 대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공지영이라는 작가가 쓴 책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입니다. 솔직히 이 책은 안 읽어보았습니다만 제목만 보고도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로서의 제 자신의 자세부터 하나씩 고쳐나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길을 갈 때, 혹 그 일이, 그 길이 부모의 기대와는 좀 다르다고 해도 그 길이 죄만 아니라면 응원하고 후원할 수 있을 때 우리 자녀는 비로소 바른 인생의 길을 찾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기 가치를 인정받을 때 200, 300% 힘을 내서 최선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실망하고 힘이 빠집니다.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가족을, 아내와 남편을, 자녀를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존중합시다. 그리고 응원합시다. 그러면 그들이 힘을 내서 우리 가정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기억합시다. 배우자 존중도, 자녀 존중도 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2005년도에 손현주, 최진실 씨가 주연한 <장밋빛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성분들이 아마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부부는 부부갈등과 남편의 외도 때문에 거의 파경에 이르게 되지만 아내가 갑작스럽게 위암에 걸리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남편이 비로소 아내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되고 지극정성으로 아내의 병수발을 듭니다. 나중에 병이 깊어지면서 아내가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겨 온갖 짜증과 분노를 드러내지만 남편은 묵묵히 아내를 뒷바라지 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아내가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맺어집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거의 못 봤지만 그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수많은 시청자들이 아내를 죽이지 말라고, 결론을 해피엔딩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

비록 기독교 드라마도 아닌 대중 드라마지만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든 일에 때가 있듯이 아내와 남편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자녀를 존중하는 것도 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큰 병에 걸린 후 비로소 아내의 가치를 깨닫지만 때는 많이 늦은 것입니다. 남편은 고통당하는 아내를 보며 후회하고 또 후회합니다. “내가 왜 진작 저 사람에게 잘 해주지 못했을까, 왜 내가 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을까?” 여러분,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남편과 아내가, 또 부모가 이런 후회를 하며 살겠습니까? 

물론 그들 중에는 다행히 때가 안 늦은 분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와 남편을, 그리고 자녀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존중하십시오. 귀하게 여기십시오. 무엇보다 건강할 때 잘 해주세요. 때가 늦기 전에 존중해주세요. 바로 지금 귀하게 여기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마시고 말입니다. 이렇게 가족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후원할 때, 서로를 응원해 줄 때 그 가정은 살게 됩니다. 건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받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에 ‘틈’이라는 네 번의 시리즈 설교를 오늘 마치면서 아무쪼록 여러분의 가정이 마귀 사탄이 틈탈 그 어떤 틈도 없는 든든한 가정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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